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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순간 지난 2000년 6월 13일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과 직접 영접나온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밝은 표정으로 역사적인 악수를 하고 있다.
역사의 순간 지난 2000년 6월 13일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과 직접 영접나온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밝은 표정으로 역사적인 악수를 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환영 나온 평양 시민들 지난 2000년 6월 13일 오전 김대중 대통령 및 수행원을 태운 차량들이 평양시내를 가로질러 백화원초대소를 향하는 길에 평양시민들이 몰려나와 꽃을 흔들며 환영하고 있다.
환영 나온 평양 시민들 지난 2000년 6월 13일 오전 김대중 대통령 및 수행원을 태운 차량들이 평양시내를 가로질러 백화원초대소를 향하는 길에 평양시민들이 몰려나와 꽃을 흔들며 환영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택시 기사를 하면서 노동운동을 했던 조재형씨가 쓴 글에 작곡가 윤민석씨가 가락을 실은 <서울에서 평양까지>라는 곡의 노랫말은 "서울에서 평양까지 택시요금 2만원, 소련도 가고 달나라도 가고 못가는 곳 없는데, 광주보다 더 가까운 평양은 왜 못가, 우리민족 우리의 땅 평양만 왜 못가"로 시작한다.

이 곡이 나온지 15년이 지난 지금, 남한에서 자동차로 '혁명의 수도 평양'을 방문하는 것은 여전히 금지돼 있다. 그러나 현재 평양까지는 못가도 자동차로 개성을 방문하는 것은 가능해졌다. 또 비록 택시를 타고 가지는 못해도 서울에서 평양으로 사람이 아닌 물건을 택배로 보내는 것은 가능해졌다.

2000년 6월 15일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 순안공항에서 두 손을 맞잡은 뒤 남북한이 지난 5년간 꾸준히 교류협력을 해온 결과다.

6·15 이후 '적대관계'가 '상호의존적 관계'로 발전

50년의 한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꾸준히 이산가족 상봉이 이어졌다. 사진은 지난 2000년 8월 15일 남북 이산가족 상봉 당시 북의 아들 리동섭씨가 남의 노모와 눈물의 상봉 장면.
50년의 한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꾸준히 이산가족 상봉이 이어졌다. 사진은 지난 2000년 8월 15일 남북 이산가족 상봉 당시 북의 아들 리동섭씨가 남의 노모와 눈물의 상봉 장면. ⓒ 사진공동취재단
6·15 남북 공동선언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50년 동안 지속된 '적대관계'가 지금은 '뗄래야 떼 수가 없는 상호의존적 관계'로 발전하고 있음은 남북관계를 보여주는 여러 통계수치로 증명된다.

우선 남북교역액은 6·15 공동선언 전인 1999년 3억3300만 달러에서 지난해에는 6억9700만 달러로 2배 이상 늘었다. 2004년 남북한 교역규모는 북한 대외 무역액의 19.6%로, 남한은 39%를 차지한 중국에 이어 두번째로 큰 교역상대가 됐다.

인적 교류는 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남한의 방북 인원은 1999년에 5599명이던 것이 2004년에는 금강산 관광객을 제외하고도 2만6534명으로 늘어 2만명 시대를 개막했다. 금강산 관광객은 이미 100만명을 넘어섰다. 또 1만명의 이산가족이 상봉을 했다. 비록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수치이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금강산 관광과 함께 개성공단 건설, 경의선 동해선 철도·도로 연결사업 등 이른바 3대 경협사업도 본궤도에 올랐다.

정부가 지원한 민간 베이스 사업인 금강산관광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육로 버스 관광을 거쳐 승용차 관광의 단계까지 올랐다. 개성공단 건설은 지난해 12월 15일 시범단지에서 첫 제품이 출하되어 당일 생산된 북한산 냄비가 서울의 한 백화점에서 판매돼 서울 시민의 밥상에 오르는 단계에 진입했다. 남북의 허리를 잇는 경의선·동해선도 2002년 9월 18일에 연결을 위한 착공식이 열려 지난해 12월 연결이 완료되어 임시 개통되는 데 이르렀다.

남북은 또 지난 5년간 총 124번, 연 평균 24번 이상의 각종 대화를 가졌다. 장관급 회담의 경우 2000년 7월 이후 지난해 5월까지 모두 14번이 개최되었다. 그 이후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달 21∼24일에 15차 남북 장관급회담이 서울에서 열림으로써 다시 남북 대화가 본궤도에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군사 분야에서도 긴장을 완화할 수 있는 신뢰구축의 단초가 마련됐다. 휴전선에서의 상호 비방방송은 이미 자취를 감췄으며 서해상의 우발적 충돌방지방안에도 합의했다. 남북한 군 당국이 6·25전쟁 정전협정 이후 처음으로 마주앉아 장성급회담(2회)을 개최해 비록 초보적 수준일망정 신뢰구축을 통한 평화공존의 단초를 마련한 덕분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의 평가

개성공단 첫 생산 냄비 '불티' 지난해 12월 15일 오후 서울 롯데백화점 본점에서 시민들이 북 개성공단에서 처음으로 생산된 리빙아트 냄비를 구매하고 있다.
개성공단 첫 생산 냄비 '불티' 지난해 12월 15일 오후 서울 롯데백화점 본점에서 시민들이 북 개성공단에서 처음으로 생산된 리빙아트 냄비를 구매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진성철
이와 같은 6·15 공동선언의 성과와 한계는 13일 '대북 햇볕정책의 계승자'인 노무현 대통령이 6·15 남북공동선언 5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에서 밝힌 다음과 같은 대목에 잘 함축돼 있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은 대립과 갈등으로 점철되어온 반세기 분단 역사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우리 겨레가 화해와 협력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큰 희망을 안겨주었다. 나아가 전 세계에 한반도의 미래가 훨씬 안정되고 밝을 것이라는 믿음을 주었다.

당초의 기대만큼 진전되지 못한 부분이 있고, 그래서 답답해하는 분들도 있지만, 6·15 공동선언이 없었다면 과연 이러한 성과가 가능했겠는가? 북핵문제가 불거진 이후에도 지금과 같은 상황을 유지할 수 있었겠는가를 생각할 때, 그 역사적 의미는 참으로 크다 하겠다."


6·15 공동선언을 연출한 당사자이자 대북 햇볕정책의 집행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은 그 역사적 의미에 대해 6·15 남북공동선언 5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 기조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진전은 북한 사람들의 생각이 많이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6.15 정상회담 이후 보도매체를 통해서 남북교류 장면을 자주 보고 있다. 남쪽에서 지원해준 비료와 식량이 북한 전역에 배포됨으로써 북한 주민들은 이제 남한사람들이 잘 산다는 것과 우리가 그들을 도와주려 한다는 진심을 알고 과거의 부정 일변도의 생각을 크게 바꾸고 있다.

남쪽 국민들도 과거 북쪽이라면 모든 것을 반대하던 태도를 보인 사람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것과 같은 동족을 아끼고 지원하는 것은 별개라는 성숙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북한의 변화

변하는 북 지난 5월 26일 개성공단 신원 공장에서 북한 여성근로자들이 작업을 하고 있다.
변하는 북 지난 5월 26일 개성공단 신원 공장에서 북한 여성근로자들이 작업을 하고 있다. ⓒ 로이터/연합뉴스

북한 땅 달리는 남측 트럭 행렬 지난 5월 21일 북측에 전달할 비료를 실은 대형 트럭 수십여대가 개성공단 인근을 지나고 있다.
북한 땅 달리는 남측 트럭 행렬 지난 5월 21일 북측에 전달할 비료를 실은 대형 트럭 수십여대가 개성공단 인근을 지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김 전 대통령의 말대로 6·15 공동선언 이후 북한 주민들에게는 엄청난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는 '위로부터의 혁명'이 북한 주민들에게 엄청난 대남 인식의 변화를 초래한 것으로 요약된다.

그 인식의 변화는 물론 북한의 최고 지도자인 김정일 위원장의 '결단'에 따른 것이다. 일종의 '위로부터의 혁명'이다. 즉,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김정일 위원장은 '미제의 괴뢰정부인 남조선 대통령과의 상봉'을 '력사적인 일대 전변'이라고 교시한 데 따른 것이다.

그 '일대 전변'이라는 교시 덕분에 그 교시를 누구보다도 충실히 따라온 북한 주민들에게 '미제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야 할 남조선'은 하루아침에 '피를 나눈 민족이 사는 대한민국'으로 바뀐 것이다. '미제의 압제에서 신음하는 괴뢰국가'라는 신화를 깬 6·15 공동선언은 북한의 경제난과 맞물리면서 북한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2002년 7·1 경제관리개선조치는 이같은 인식의 변화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지난 50여년간 북한 주민들의 의식구조를 지배해온 배급제가 7·1 경제관리개선조치에 따라 공식 폐지됨에 따라 주민들은 스스로 노력한 만큼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시장에서 상품을 사는 새로운 현실에 적응해야 했다.

이처럼 경제난으로 배급제가 붕괴되자 북한 주민들은 암시장 경제를 발달시켰으며, 이곳에서 유통되는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과 남쪽에서 지원해준 비료 및 식량은 북한 주민들의 의식과 행동 양식에 변화를 가져왔다. 게다가 6·15 이후 남북간 2만명의 왕래와 10회의 이산가족 상봉 등을 통해 남한 주민과의 '접촉면'이 증대하면서 적어도 이제 남한이 자신들의 최대 원조국인 중국보다도 더 잘 산다는 사실을 모르는 북한 주민은 없게 되었다.

그것은 남한에 대한 경계심이 사라지는 대신에 동경심이 자리잡는 계기가 되고 있다. 남한의 가요·드라마 등 대중문화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으며 중국제보다는 남한 상표가 있는 상품을 '명품'으로 인정할 정도라고 한다. 또 몇 차례의 대규모 민간행사에서 이미 확인되었지만 남한 주민의 호주머니를 노린 상품과 호객행위까지 등장했다.

남한의 변화

"김대중은 빨갱이" 지난 2003년 4월 19일 서울시청 앞 '반김반핵 자유통일 청년대회'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간첩', '빨갱이'로 표현한 피켓이 등장했다.
"김대중은 빨갱이" 지난 2003년 4월 19일 서울시청 앞 '반김반핵 자유통일 청년대회'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간첩', '빨갱이'로 표현한 피켓이 등장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증오 지난 2004년 12월 4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집회에서 북핵저지시민연대 회원들이 국가보안법 폐지가 북한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며 김 위원장의 사진과 인공기를 불태우고 있다.
증오 지난 2004년 12월 4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집회에서 북핵저지시민연대 회원들이 국가보안법 폐지가 북한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며 김 위원장의 사진과 인공기를 불태우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남쪽 국민들도 과거 북쪽이라면 모든 것을 반대하던 태도를 보인 사람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것과 같은 동족을 아끼고 지원하는 것은 별개라는 성숙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라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처럼 사상 첫 남북 정상회담은 북한에 대한 남한 사회의 인식도 크게 변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북한은 '불구대천지'의 '원수'가 아니라 같은 땅 위·같은 하늘 아래서 함께 숨쉬며 살아가야 할 한민족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남북 정상회담 직후 통일부가 국민 1500명을 대상으로 한 대북 인식 조사에 따르면 ▲통일을 향해 함께 나아가야 할 동반자(43.3%) ▲동반자이자 적(52.7%) ▲적(2.7%) 순으로 조사됐다. 반면 지난해 9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민주평통)가 1000명에게 실시한 설문조사에선 ▲포용하고 함께 살아야 할 동포(58.4%) ▲동포이자 적(34.1%) ▲적(5.5%)으로 나타났다.

북한은 '적'이 아닌 '동포'라는 인식이 눈에 띄게 확산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6·15 공동선언 이후 시간이 흐를수록 '동반자이자 적'이라는 중간자적 대북 인식이 크게 줄었다는 부분이다. 즉, 북한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고조되는 가운데 부정적 인식도 덩달아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양극화 추세는 지난 5년간의 잦은 만남과 '접촉면'의 증대로 북한의 실상이 알려지면서 그동안 판단을 유보하며 중간자 입장을 견지했던 '부동층'의 시각이 '모 아니면 도'인 쪽으로 입장을 분명히 한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민주평통의 한 관계자는 "평양이나 금강산을 다녀온 분들 중에 이런 양극화 추세가 두드러진다"면서 "그동안 중간자적 입장을 가진 분들이 북한에 다녀온 뒤에는 더 북한체제를 이해하고 동정심을 갖게 되는 '친북파'와 오히려 주민을 헐벗고 굶주리게 만든 김정일 체제에 대한 증오심을 갖고 돌아오는 '반북파'로 양극화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북한동포 돕기운동을 해온 한 종교인은 또 다른 관점에서 부동층이 줄어듦을 지적한다. 이 종교인은 "인도적 지원에 반대해온 보수 인사나 한나라당 의원 가운데서 북한을 방문한 뒤에 참담한 현실을 보고서 북한을 지원해야 한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는 경우가 종종 있는가 하면, 오히려 대북 지원 활동가 중에서 북한 관료들과 대화하고 일을 하는 과정에서 인민에 대한 지원보다 체제안정을 우선시하는 '체제의 벽'에 절망감을 느껴 대북 지원을 '밑빠진 독에 물 붓기'로 인식해 소극적으로 돌아서는 경우도 가끔 보았다"고 말했다.

아무튼 남북 긴장은 완화되고 있지만 북한 변수를 둘러싼 남한 내 보혁(保革) 갈등이라는 새로운 변수가 확산되고 남남(南南)갈등이 지속되는 결과도 이러한 양극화 현상의 방증으로 풀이된다.

부산에 펄럭이는 인공기 지난 2002년 9월 28일 창원 종합운동장에서 벌어진 부산아시안게임 축구 경기에서 북측응원단이 인공기를 흔들며 응원하고 있다.
부산에 펄럭이는 인공기 지난 2002년 9월 28일 창원 종합운동장에서 벌어진 부산아시안게임 축구 경기에서 북측응원단이 인공기를 흔들며 응원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북한 누나, 악수 한번만!" 지난 2002년 9월 부산아시안게임 당시 남측 어린이들이 북측 취주악대원들과 손을 잡고 있다.
"북한 누나, 악수 한번만!" 지난 2002년 9월 부산아시안게임 당시 남측 어린이들이 북측 취주악대원들과 손을 잡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6·15 공동선언의 성과와 한계는 결국 '신뢰의 문제'

이와 같은 6·15 공동선언의 성과와 한계는 결국 다시 '신뢰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 1차적 원인은 남북의 최고 지도자끼리 서명(수표)한 남북(북남) 공동선언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데서 찾을 수 있다.

정상회담 당시 양 정상이 서명한 '남북공동선언'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고 명시돼 있지만 아직까지 답방은 실현되지 않았다.

김 전 대통령도 13일 6·15 남북공동선언 5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 기조연설에서 6·15 공동선언의 성과를 자평하면서 "한가지 유감스러운 것은 남북공동선언에서 합의된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답방이 아직도 실현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면서 "이는 남북관계가 신뢰와 협력 속에 획기적으로 발전되기 위해서 절대로 필요한 사항이다"고 지적했다.

이와 같은 인식은 노 대통령도 다르지 않다. 노 대통령은 13일 6·15 공동선언 5년의 성과와 변화상을 열거하면서 "그러나 지금까지의 성과에 만족할 수는 없으며 앞으로 더 나아가야 한다"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약속의 실천이다"고 지적했다.

그 후 5년, 함께 모인 남북 6.15공동선언발표5주년기념 민족통일대축전 개막식이 14일 오후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 열리고 있다.
그 후 5년, 함께 모인 남북 6.15공동선언발표5주년기념 민족통일대축전 개막식이 14일 오후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 열리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노 대통령은 이어 "북핵문제가 걸려 있지만, 이것이 남북간 기존 합의의 이행을 지체하거나 무산시킬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전제하고 "합의한 사항들을 반드시 이행해 나가는 것이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며 "관계발전은 신뢰 위에서 가능하고 그 신뢰는 약속을 지키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고 역설했다. 노 대통령이 구체적으로 '서울답방 이행'을 촉구하지는 않았지만, 그 말 속에는 6·15 공동선언에서 약속한 '2차 정상회담'을 포함해 이산가족 상설면회소 설치 및 상봉 등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산가족들의 숙원인 상설면회소의 경우, 정상회담 2주일 후인 2000년 6월 27일 금강산에서 열린 1차 적십자회담에서 설치에 원론적으로 합의한 뒤 2003년 11월 3일 5차 적십자회담에서 '합의서'에 서명까지 했지만 북측은 착공을 미루고 있다.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답방' 건은 북측 사정을 고려해 2차 정상회담을 전제로 '제주 방문'에서 '도라산역'으로까지 바뀌었지만 아직 아무런 응답이 없다.

그런 가운데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답방 요구는 점점 거세지는 추세다. 2차 남북 정상회담 추진의 필요성도 2002년 73.4%에서 2004년 84.6%로 높아졌다(민주평통 여론조사 결과)

김정일 위원장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 계승자'인 노무현 대통령의 어깨 위에는 6·15 공동선언에 대한 '약속 이행 → 신뢰 구축 → 관계 발전'이라는 공동책임이 짊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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