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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천봉 휴게소에 즐비한 구상나무 고목
설천봉 휴게소에 즐비한 구상나무 고목 ⓒ 이승열

설천봉에서 향적봉 오르는 입구의 구상나무 고목과 산철쭉
설천봉에서 향적봉 오르는 입구의 구상나무 고목과 산철쭉 ⓒ 이승열
차를 타고 길을 떠나면 막혔던 속도 풀릴 만큼 여행을 좋아하는 시어머니는 올해 여든다섯이시다. '시'자가 들어간 것은 비록 죄 없는 시금치일지라도 가까이 해선 안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만큼 고부간의 미묘한 갈등은 나이, 성격, 교양 모든 것에 관계없이 일상 속에 존재한다. 모녀, 혹은 고부 관계인 어머니와 시누이, 나 이렇게 셋은 이 모든 것을 초월해 일년에 수차례씩 함께 여행을 떠난다.

분홍색, 고운 것, 체면을 중요시하는 어머니와 편함, 실용을 최우선시하는 나는 성격, 취향, 식성 등 여러모로 별로 공통점이 없다. 딸과 며느리를 좌, 우로 거느리고 여행할 수 있다는 어머니의 만족감과 세상에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맘껏 생색 낼 수 있다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우리의 잦은 동행을 가능케 한다.

설천봉까지 15분만에 공간 이동시킨 곤돌라와 분홍의 모녀 그리고 파란 나. 오랫동안 여행을 함께 하면서도 고부간에 처음 찍은 사진이다.
설천봉까지 15분만에 공간 이동시킨 곤돌라와 분홍의 모녀 그리고 파란 나. 오랫동안 여행을 함께 하면서도 고부간에 처음 찍은 사진이다. ⓒ 이승열
우리의 윗세대에서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딱 한분 생존해 계신 시고모님의 팔순잔치를 위해 상경하신 어머니가 생뚱맞게 또 딴소리시다. 우리들이 너무 바빠 요즘은 한번도 여행을 하지 못했다고 투정이시다.

"말도 안돼. 저번에 남해도 갔다 오고 보성도 갔다 오고 그랬잖아요."
"그러니? 늙으면 원래 정신이 없단다."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시다. 연휴 때는 떠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데 교통지옥을 헤치고라도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강원도를 선택하지 않고 아랫녘으로 여행지를 삼은 것은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다. 8시가 조금 지난 시각인데도 영동고속도로로 진입로는 벌써 주차장으로 변해 있었다. 우린 그저 아래로 쌩쌩 달리기만 하면 된다. 대전, 통영 고속도로가 개통되고 나서 무주까지 걸리는 시간이 딱 2시간 반이다. 휴일마다 주차장으로 변해버리는 웬만한 서울근교 여행지보다 시간이 훨씬 적게 걸린다.

고령에 무릎까지 시원찮은 어머니와의 동행이니 걷는 구간을 최소화하고 볼거리가 많은 곳을 선택해야 한다. 향적봉까지 가는 곤돌라를 타기 위해 무주리조트에 도착한 시각이 10시 반. 곤돌라를 타려고 선줄이 거의 2km는 넘을 듯하다. 그늘 한점 없는 땡볕에 꼬불꼬불 끝이 보이지 않는다. 줄을 정리하는 안내원에게 물으니 1시간정도면 탈 수 있을 거란다. 말도 안 된다 했더니 아까보다 줄이 좀더 늘었으니 그럼 1시간 반이란다. 내 생각엔 2시간 이내로 어림도 없는데 이쪽 사람들은 늘 이렇게 여유가 있고 서두름이 없어 나까지 꼼짝없이 무장해제를 당하고 그들과 같은 언어로 말하게 한다.

산위에서 보면 내가 사는 세상이 골짜기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산위에서 보면 내가 사는 세상이 골짜기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 이승열

덕유산 정상 향적봉. 장날만큼 많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덕유산 정상 향적봉. 장날만큼 많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 이승열
곤돌라는 채 15분도 걸리지 않고 해발 1520m 설천봉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이곳에서 덕유산의 정상 향적봉까지 걸린 시간이 단 20분. 1시간도 걸리지 않고 덕유산 향적봉에 닿을 수 있는 세월이 신기하기도 하고 참으로 허무하기도 하고 만감이 교차한다. 무주구천동 삼공리 매표소에서 백련사를 거쳐 향적봉까지 3시간을 넘게 걸었던 옛 시절이 정녕 꿈같다.

여느 저잣거리와 다를 바 없는 설천봉 레스토랑에서 한 개에 2500원이나 하는 소시지로 요기를 한 뒤 우리는 바람처럼 향적봉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파란 하늘에 분홍색 철쭉, 고사목이 된 구상나무가 해발 1600m의 높이를 체감하게 한다. 산위에 서면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의 넓이와 사람들과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계룡산 정상에서 바라본 내가 살고 있는 동네는 내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산과 산이 겹쳐진 틈새, 잠시 산이 숨을 고르고 있는 골짜기에 내가 살고 있는 집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자연의 한 모퉁이에 기대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었던 것이다.

덕유산 정상 향적봉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요즘은 어디를 가든 세상의 사람들이 다 그곳에 모여 있는 것 같다. 멀리 보이는 향적봉 대피소는 분홍색 철쭉들로 둘러싸였다. 산에서 만나는 철쭉은 꽃잎의 투명함 때문에 애잔하다. 나무에 붙어 있는 꽃잎의 수만큼 바닥엔 그 역할을 다한 꽃잎들이 뒹굴고 있다. 더 늦기 전에 침낭을 가지고 와서 산장에서 하룻밤 보내며 별들을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괴목마을의 수로에 졸졸졸 흐르는 물이 햇빛에 반사되어 투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괴목마을의 수로에 졸졸졸 흐르는 물이 햇빛에 반사되어 투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 이승열

250년 동안 마을을 지키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함께 했을까?
250년 동안 마을을 지키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함께 했을까? ⓒ 이승열
안국사로 가는 길목에 괴목마을이 있었다. 250년이 된 괴목이 마을을 지키고 있어 괴목마을이란 이름이 붙은 이곳은 작가 박범신이 젊은 시절을 보낸 정신적 고향 같은 곳이다. 그는 40대 중반 불현듯 덮친 분열과 절망으로 절필을 선언했다가 97년 발표한 <흰소가 끄는 수레> 연작으로 다시 연필을 들었다. 그는 삶에 지치고 세상에서 비껴난 초로의 사내가 되어 온통 흰빛뿐인 이곳을 찾아온다. 찾을 고향이 존재하는 그에게 왈칵 부러움을 느낀다. 내 고향은 84년 이후 접근 불가 지역이 되어 버렸다.

"무주를 먼저 떠올린 것이 내겐 더욱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무주는 내 젊은 날 가장 외로웠던 한 시절을 보낸 곳일 뿐만 아니라 눈이 웬만큼 쌓인다 해도 도로가 폐쇄되는 경우는 거의 없으므로…."- 박범신의 <흰소가 끄는 수레> 중

무주양수발전소, 전망대, 하부댐(무주호), 상부댐(적상호) 호수 뒤로 다시 지은 적상산 사고가 보인다.
무주양수발전소, 전망대, 하부댐(무주호), 상부댐(적상호) 호수 뒤로 다시 지은 적상산 사고가 보인다. ⓒ 이승열
적상산 안국사는 양수수력발전소 건설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있었다. 가을철 붉게 물든 단풍이 붉은 치마를 두른 여인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하여 적상산이라 한다. 해발 800m에 있는 적상호 상부댐 전망대에 오르니 아래 하부의 무주호 푸른 물과 내가 달렸던 길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원래 호수 자리에 적상산 사고가 그 뒤에 안국사가 있었다 한다.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적상산성에 승려들로 하여금 조선왕조실록과 선원록을 보관하고 있던 사고를 지키게 하기 위해 이곳에 절(호국사)을 안국사로 고쳤다 한다. 임진왜란과 갖은 전란에서도 소임을 다한 적상산사고는 1910년 사고의 책을 규장각으로 옮기고 일제에 의해 그 건물이 철거되었다 한다. 1990년 초에 댐 건설로 절 지역이 수몰지구에 포함되자 1991년부터 이전을 시작하여 1993년에 절을 완전히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적상산 안국사 오르는 길. 내가 지나온 길. 삶의 길
적상산 안국사 오르는 길. 내가 지나온 길. 삶의 길 ⓒ 이승열

파란 하늘만 보이는 적상산 안국사 입구의 함박꽃. 텃밭 가득했던 내 고향집의 함박꽃은 다 어디로 갔을까?
파란 하늘만 보이는 적상산 안국사 입구의 함박꽃. 텃밭 가득했던 내 고향집의 함박꽃은 다 어디로 갔을까? ⓒ 이승열
갓 10년이 넘은 안국사는 별로 특색이 없는 전각들로 구성된 평범한 절이다. 하지만 자연석으로 쌓은 8km가 넘는 적상산성과 적상산 정상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덕유산의 연봉들은 멋진 풍광을 자랑한다. 향적봉, 설천봉, 무주리조트가 오밀조밀하게 한눈에 들어온다. 하얀 뭉게구름이 초록색 잎에 한 송이씩 매달려 파란 하늘과 대비를 이루는 모습과 붉은 함박꽃의 향연은 쉬이 자리를 뜨지 못하게 만든다. 돗자리를 펴고 큰대자로 누워 산들거리는 바람을 느끼며 티끌하나 없는 파란 하늘을 가슴속에 담고 싶다. 호흡을 길게 하고 첩첩이 쌓인 능선들을 바라본다.

덧붙이는 글 | 무주 이야기2-별이 쏟아지던 밤, 반딧불이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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