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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담출판사
여자 하루키라 불리는 에쿠니 가오리. 서정적인 감수성으로 사랑이야기를 독특한 그녀만의 색채로 그려왔다. <냉정과 열정사이>의 루소편을 집필하여 일본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얻은 바 있다.

그 후로 그녀의 작품들이 하나 둘 번역되어 출간되면서 그녀가 그리는 사랑관에 마니아층을 중심으로 깊게 물들인 상황. 그러나 그녀는 연애소설뿐 아니라 동화적인 상상력으로 일상을 그린 작품들도 다수를 이룬다.

그 중에서 이번에 소개할 작품은 <호텔 선인장>이다. 우리나라 만화 <호텔 아프리카>를 연상케 하는 이 작품은 그녀가 연애소설에만 국한된 작가가 아님을 반증해준다. 그녀는 사실 연애소설, 에세이, 동화적인 작품 등 넓은 범위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더욱이 <호텔 선인장>은 배경에서부터 나오는 주인공들의 캐릭터, 그리고 스토리 라인까지 참신함과 친구로 지내길 작정한 듯 하다. 그만큼 신선함을 느낄 수 있으며, 좀 더 에쿠니 가오리를 관찰하고 싶게 만드는 점이다.

<호텔 선인장>은 아파트 이름이다. 독특한 이름을 가진 아파트이지만 어느 곳보다도 평범한 아파트이다. 다른 회색빛의 삭막한 건물들과 별다른 차이점이 없는 이 아파트 안에 들어가면 세 명의 친구를 만날 수 있게 된다.

오이, 모자, 숫자 2라는 세 주인공이 산다. 이들은 서로에게 무관심하며 자신의 세계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서로 점차 서로를 알아가며 우정을 키워 나가는 이야기이다.

이처럼 주인공들이 현실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비현실세계의 사람들이다. 사람을 의인화한 이 주인공들은 비현실 속에서나 있을 법하지만 그들의 모습과 행동은 현실 속의 사람들의 모습이다. 이들 모습에서 도심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이들은 저마다 개성도 강하다. 늘 초록으로 빛나는 오이. 항상 기쁨이 되는 일만을 추구하며 인생에 우울함이란 끼어들 수조차 없는 완벽한 오이. 자신은 앉지도 못해 필요 없지만 친구를 위해 의자를 마련하고 담배 피우는 친구를 위해 재떨이를 준비하는 등 자신의 거실을 친구들에게 개방하는 마음 좋은 그이지만 왠지 그의 삶은 건조하다.

늘 숫자 1을 꿈꾸는 숫자 2. 신경이 예민하고 소심해서 쉽사리 상처받는 그는 간혹 기분이 좋은 밤이면 옥 이불을 덮고 숫자 1이라 착각하며 잠에 든다. 그러나 아파트가 헐리게 되자 발 벗고 나서는 객기를 부리기도 한다.

자기 공간에 갇혀 독서를 즐기는 모자. 어릴 적 자신을 무척이나 사랑해주었던 할아버지와 헤어진 후 냉소적인 사람으로 변해버린 모자. 위스키와 거북이, 그리고 먼지 쌓인 책이 그의 전부이다. 그를 받아줄 안락한 붙박이 장롱만 있으면 된다.

캐릭터들도 저마다 개성이 있지만 어쩐지 내 자신의 모습을 혹은 옆집의 어떤 이웃을, 내 친구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바로 현실 속의 인간들의 모습을 그렸기 때문이 아닐까.

어느 시가의 동쪽 변두리에 오래된 아파트가 있었습니다. 낡고 허름한 회색의 석조 건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안으로 들어서니 제법 선선하여 기분이 무척 좋았습니다. '호텔 선인장', 이것이 이 아파트의 이름이었습니다. 호텔이 아니라 아파트인데도 그런 이름이었습니다. 호텔 선인장에는 아주 작은 마당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배를 깔고 누워 있었습니다. 이 아파트의 현관을 들어서면, 실내라고도 실외라고도 말하기 어려운 공간이 있습니다. 우측 벽에 우편함이 늘어서 있고, 왼쪽 구석에 철제 접이식 도어가 달린 엘리베이터가 있고, 그 앞으로 좁은 통로가 나 있으며 막다른 곳이 마당이었습니다. 그 중 3층 한구석에 '모자'. 2층 한구석에 '오이' 그리고 1층의 한구석에 숫자 '2'가 살고 있었습니다. 세 사람은 죽이 잘 맞는 친구들이었습니다. - 본문 중에서

이런 그들은 서로 취미도 다르고, 직업도 다르며 근본적인 사고방식도 다르다. 그러나 점점 서로를 알아가며 특별함과 소중함을 제 나름의 방식으로 일깨워 간다.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자신의 일부분을 투영하고 있음을, 그리고 자신 또한 상대방의 일부분으로 대신 채워나감을 깨닫게 된다. 이야기 내용은 굉장히 단순하다. 이렇게 친해진 그들에게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당연한 이치라고 가르쳐 주듯 그들은 헤어짐에 직면하게 된다.

분명 에쿠니 가오리는 헤피엔딩으로 만들 수도 있었지만 이미 그들의 모습이 현실 세계의 모습이듯 끝까지 현실을 그리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사실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다. 만나고 헤어지고, 사이사이 무관심 속에 서로를 배척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

어쩐지 에쿠니는 좀 더 동화적으로 포장하려 했던 것은 조금이나마 우리들의 현실의 잔인함을 감추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것은 오버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만남이 있듯 헤어짐이 있기 마련이고 또 다시 만남이 있다. 그것이 바로 세상사는 이치이다.

이들이 평생 서로에게 무관심 한 채 살았다면 헤어짐조차 없었겠지만 헤어짐이 있다는 것은 만남이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평생 서로의 존재에 대해서 몰랐을 이들이 '호텔선인장'이라는 곳에서 서로를 알게 되고 헤어지는 모습은 바로 우리들의 살아가는 모습이다. 그 작은 인연의 모습을 따뜻한 삽화와 함께 보다보면 가슴이 따스해 지는 동시에 약간의 여운과 쓸쓸함 마저 느끼게 될 것이다.

게다가 책 사이사이에 끼워져 있는 환상적인 분위기의 유화는 호텔 선인장의 구석구석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만든다. 어떤 시인의 말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면 이 책은 그 섬으로 가는 여정을 그렸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호텔 선인장

, 소담출판사(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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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분야에 도전하고 싶습니다. 제가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해 보고 듣고 느끼는 그 순간순간을 말입니다. 기자라는 직업을 택한지 얼마 되지도 못했지만 제 나름대로 펼쳐보고 싶어 가입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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