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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앨범에 실려있는 선생님 사진입니다.
고등학교 앨범에 실려있는 선생님 사진입니다. ⓒ 박희우
때는 1983년입니다. 군 제대 후 대학 진학을 위해 상담차 오랜만에 모교를 찾았습니다. 1978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니 5년만입니다. 학교가 왠지 낯설게 느껴집니다. 저는 교무실로 들어갔습니다. 학생들이 대입학력고사 성적표를 받기 위해 줄을 서 있습니다. 가끔 저처럼 나이든 사람들도 보입니다. 선생님들도 여럿 앉아 계십니다. 그런데 아는 분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5년이란 세월이 그렇게 길지도 않는데 말입니다.

제 차례까지는 좀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저는 창문 너머로 운동장을 봅니다.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공을 차고 있습니다. 제가 졸업한 고등학교는 축구로 유명했습니다. 공설운동장에서 축구경기가 열릴 때마다 응원을 가곤 했습니다. 한 아이가 골을 넣었나 봅니다. 환호성이 제 귀에까지 들립니다.

물론 운동장에서만 그런 소리가 들리는 건 아닙니다. 교무실에서도 희비가 엇갈립니다. 성적이 좋은 사람은 얼굴에 기쁨이 넘쳐 흐릅니다. 반면에 성적이 나쁜 사람은 한숨을 푹푹 내쉽니다. 저도 긴장이 되었습니다. 열심히 한다고는 했지만 생각대로 성적이 나와줄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갑자기 낯익은 얼굴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키가 작았습니다. 황토색 가죽점퍼를 입었습니다. 광대뼈가 툭 튀어나오고 곱슬머리입니다. 출근을 방금 했는지 다른 선생님들과 인사를 나눕니다. 아, 저는 짧게 신음을 토해내고 말았습니다. 제가 그렇게 존경해마지 않던 국어선생님이십니다.

저는 "선생님!"하고 부르려다 멈칫했습니다. 그때 하필 특유의 말더듬이 발동하는 것이었습니다. 평소에는 괜찮다가도 돌발적인 상황이 벌어지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머리가 여간 혼란스런 게 아니었습니다. 가슴까지 쿵쾅댔습니다.

고등학교 때의 제 모습입니다.
고등학교 때의 제 모습입니다. ⓒ 박희우
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습니다. 차라리 모른 척 하기로 했습니다. 필시 선생님도 저를 알아보지 못할 겁니다. 저는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갖은 상념이 머리를 스쳐지나갑니다. 국어선생님의 뒷모습이 자꾸만 떠오릅니다.

국어선생님이 '기미독립선언문'을 칠판에 적습니다. 그 틈을 타 급우들이 장난을 칩니다. 선생이 헛기침을 몇 번하지만 급우들이 듣지를 않습니다. 안 되겠다 싶었던지 선생님이 저를 부릅니다.

"박희우, 기미독립선언문을 읽도록!"

물론 그 날만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거의 매일이다시피 선생님은 저에게 책을 읽으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게 싫었습니다. 목소리도 떨리고 다리마저 후들거렸습니다. 그런데 몇 번 하다보니 자신감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책 잘 읽는 학생으로 통했습니다.

불과 5년 전입니다. 그런데도 선생님께서는 많이 늙으셨습니다. 저는 슬그머니 창 쪽으로 걸어갑니다. 바깥풍경이 여간 을씨년스러운 게 아닙니다. 모든 게 낯설게만 느껴집니다. 갑자기 친구들이 보고 싶어집니다. 모두들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나둘 얼굴이 떠오릅니다. 그때였습니다. 뒤에서 누가 나를 부르고 있습니다. 저는 뒤를 돌아보고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습니다.

"요놈, 인사도 안 하고!"

국어선생님이 뒷짐을 진 채 활짝 웃고 계셨습니다. 저는 죄스러움에 무릎이라도 꿇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따뜻하게 제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머리도 쓰다듬으셨습니다. 스물 다섯 살의 제자가 아직도 선생님 눈에는 고등학교 시절 제자로 보이시는 모양이었습니다. 저는 아무 말도 못하고 얼굴만 붉혔습니다.

"희우, 박희우 맞지. 자네는 책을 참 잘 읽었어. 내가 그랬지. 자네는 글 쓰는 소질을 타고난 것 같다고. 훌륭한 작품 하나 남겨야지. 안 그래?"

제가 졸업한 고등학교입니다.
제가 졸업한 고등학교입니다. ⓒ 박희우
5년이 지났는데도 국어선생님은 저를 정확히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얼굴만 기억한 게 아니었습니다. 이름까지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어디 이름뿐입니까. 고등학교 때 제게 한 말까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그 날도 선생님은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법대를 가겠다고? 나도 법대를 졸업했지만 국어선생이 되었어. 허허, 이것도 운명인가."

글 쓰는 소질. 선생님의 그 말 한마디가 이렇게까지 저를 괴롭힐 줄 몰랐습니다. 저는 법대를 다니면서도 글 쓰기에 매달렸습니다. 해마다 12월이면 신춘문예 병에 신음하곤 했습니다. 쉰 살을 바라보는 지금도 저는 문학에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든 게 선생님, 당신 때문입니다. 당신의 말 한 마디가 저를 문학도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저는 오늘도 등기소에서 등기신청사건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법대를 졸업하고 법원에 들어왔지만 그러나 한 번도 문학을 버린 적이 없었습니다. 이제 저는 현실로 돌아가야겠습니다. 그래도 법은 제 밥줄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못다한 등기신청사건을 처리합니다. 제 도장만 찍으면 등기사건은 완료됩니다. 저는 다시 한 번 이름을 확인합니다. 한효종. 등기부상 오래 전 소유자입니다. 그분이 정말 제 은사인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1939년생이시니 일흔 살 가까이 되십니다. 동창들에게 선생님의 안부를 물어봐야겠습니다. 운이 좋아 만날 수 있다면 선생님은 필시 제게 이렇게 말하실 겁니다.

"자네는 글 쓰는 소질이 있어. 책을 내면 꼭 한 권 갖다주게나!"

덧붙이는 글 | <내 인생의 멘토>에 응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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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이 맞는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저는 수필을 즐겨 씁니다. 가끔씩은 소설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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