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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겨울 책이 처음 출간되자마자 사뒀다가 지금에서야 다 읽었습니다. 아마 제목이 좋아서 샀던 것 같습니다. 그림에 대한 지극히 비뚤어지고 난해한 인식을 조금이나마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십 년간 나의 생활과 동떨어져 있던 '그림'을 함께 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나의 현실과 정서에 더 가까운 책들을 먼저 읽다보니 늘 우선순위에서 멀어져 있었습니다. 지난 주에 퇴근길에 틈틈이 읽었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미술 시간은 그래도 즐거운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림 그리기가 싫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힘든 게 있었으니, 문제는 그림 그리는 도구였습니다.

물감의 색은 부족했고, 이상하게도 나의 물감은 뭔가 색이 잘 안 묻어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붓도 한 둘밖에 없었던 것 같았는데 그마저도 질이 그렇게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좋은 물감과 다양한 크기의 질좋은 붓을 사용할 때, 어린 마음에 불만이 좀 있었습니다. 집안 사정을 생각해서 한 번도 말을 해 본 적은 없지만요.

포스터를 그리는 날에는 내가 가진 도구에 대한 불만에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요즘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포스터를 꽤 많이 그렸던 것 같습니다. 불조심, 반공, 수출 100만불 기념 등등. 그런데 포스터는 다른 수채화와는 달리 일반 물감으로는 제대로 표현하기 힘들었습니다. 색을 균질하게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정성을 들여 색을 칠해도 얼룩덜룩해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조금 여유가 있는 애들은 '포스터 칼라'를 사용했습니다. 깨끗하고 균질한 색감, 아직까지도 미술 시간만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포스터 칼라'입니다. 정말 가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제일 좋아했던 시간은 '크로키' 시간이었습니다. 도화지와 4B 연필만 있으면 됐으니까요.

그러나 미술 시간에 대한 이러한 추억도 초등학교 졸업과 함께 끝이 났습니다. 그 후 그림을 직접 그리기 보다는 미술사에 대해 암기해야 했고, 그저 그렇거나 이해하기 힘든 그림을 좋은 그림(名畵)이라고 강요당했습니다. 그림 보는 재미가 휘발된 채 '정상적인' 교육 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그림과 제 삶과의 연관 관계는 더 이상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림을 보면 불편했습니다. 해석해야할 것 같았고, 정작 해석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쉽게 이해하고 느껴지는 그림은 분명 명화는 아닐 것이라고 단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람들이 전시장을 찾고, 그림에 대해 제각각 한 마디씩 늘어놓을 때, 저는 그런 행동과 말에 엄청난 가식이 섞여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직까지 전 '모나리자'가 뭐 그리 대단한 작품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그림' - 보다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명화' - 은 늘 불편하고 멀리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림이 조금 편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가끔 책이나 블로그에서 그림을 만나면 이상하게 편안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특히 후배가 다음 칼럼(블로그 이전 버전)에 글을 쓰면서 꼭 그림과 음악을 곁들였는데, 화가도 작품명도 모르는 그런 그림에서 '글' 이상의 무언가가 느껴졌습니다. 문득 그림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그림에 대한 '거부감'은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졌지만, 그러나 '거리감'은 여전했습니다.

공주형의 글을 만난 건 참 행운입니다. 공주형은 글을 잘 씁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녀에게서 그림이 '생활'이 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베르메르의 <우유를 따르는 여자>, 김상유의 <세심정>, 박수근의 <실직>, 고흐의 <누에넨의 감자 먹는 사람들>, 레핀의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도미에의 <삼등열차>와 <일등열차>, 고흐의 <룰랭의 초상>, 마네의 <술집 여종업원> 등은 그녀의 안내가 없었다면 결코 눈여겨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림이라고 해서 모두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글과 싫어하는 글을 나누어 받아들이듯, 내게 좋아하는 음악과 그렇지 않은 음악이 있듯이, 그림 역시 개인에 따라 그 취향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림에 대한 거리감이 씻은 듯 사라졌습니다. 이 단순한 발견을 하는 데 저는 삼십 오 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이 깨달음의 계기를 마련해 준 동갑내기 큐레이터 공주형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사랑한다면 그림을 보여줘 - 다정한 큐레이터 공주형이 사귄 작품들

공주형 지음, 학고재(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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