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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면 발포리에 있는 충무사 정경
도화면 발포리에 있는 충무사 정경 ⓒ 김성철
28일 오전 10시 전남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에 있는 충무사에서 신중식 국회의원, 진종근 고흥군수, 천승범 고흥경찰서장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충무공 이순신 장군 제460회 탄신기념 다례행사를 거행했다.

진종근 고흥군수가 제관을 맡아 헌주
진종근 고흥군수가 제관을 맡아 헌주 ⓒ 김성철
이 날 다례행사는 봉충회 주도로 진종근 고흥군수가 헌관을 맡아 분향과 헌작, 축관과 축문낭독, 헌관 재배, 헌화 분향순서로 진행했다.

신중식 국회의원을 비롯한 이 지역 각 기관단체장들이 참석한 다례식
신중식 국회의원을 비롯한 이 지역 각 기관단체장들이 참석한 다례식 ⓒ 김성철
이 곳 충무사는 1976년 충무공의 업적을 추모하기 위해 봉충회를 주축으로 한 고흥보전위원회가 구성되어 1976∼1980년(5년간)에 걸쳐 건립되었다.

충무사가 건립되기 이전에는 마을 앞 '영세불망비'가 세워진 비석 앞에서 다례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의 약력

1545년(인종 1년) 서울에서 태어남
1552년(명종 8년) 충청도 아산군으로 이사함
1572년(선조 5년) 훈련원 별과에 응시하였으나 낙방
1576년(선조 9년) 식년무과에 합격 함경도 권관
1579년(선조 12년) 훈련원의 봉사(종8품)
1579년(선조 12년) 충청도 병마절도사의 군관이 됨
1580년(선조 13년) 발포만호(종4품)
1582년(선조 15년) 발포만호 파직
1582년(선조 15년) 함경도 훈련원 봉사로 재임용됨
1583년(선조 16년) 훈련원 참군(정7품)
1586년(선조 19년) 사복시 주부(종6품)
1586년(선조 19년) 함경도 조산보 만호
1587년(선조 20년) 녹둔도의 둔전관에서 백의종군
1588년(선조 21년) 아산으로 낙향
1589년(선조 22년) 정읍현감(종5품)
1591년(선조 24년) 가리포 수군첨사(종4품)
1592년(선조 25년) 임진전란 발발, 각 해전에서 승리
1593년(선조 26년) 삼도수군통제사
1594년(선조 27년) 당항포해전, 영등포해전 승리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삼도수군통제사
1598년(선조 31년) 노량해전에서 전사
1643년(인조 21년) 충무(忠武)시호를 받음

충무사가 있는 도화면 발포리는 임진전란이 일어나기 12년 전에 이순신 장군이 36세에 발포만호(鉢浦萬戶)로 부임을 하여 1년 8개월 재임하다 첫 파직을 당했던 곳으로 유명하며 난중일기에도 자주 등장한다.

장군이 파직 당한 이유는 이렇다.

군기감 서박이 검열하고 간 후 동원 뜰에 서있는 오동나무를 가야금 악기재목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즉각 베어 올리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이 때 이순신 장군은 그 명령을 여지없이 일축하고 흙 한줌이나 돌 한덩이라도 국가의 소유 재산인데 베어 올릴 수 없다고 거부했다.

이순신 장군은 이 사건으로 1582년 1월 군기경차관의 감찰을 받고 파직을 당했으나 이후 정읍현감 등을 거쳐 임진전란(1592년)이 발생하기 1년 전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하면서 발포에서 거북선을 제작했다.

이 곳은 정걸, 나대용, 이순신 장군 등이 판옥선을 개조하여 거북선을 만든 선소 터가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남아있다고 하는데 바다를 매립하는 바람에 선소 터가 모두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충무사에서 내려다 본 발포 만호진성
충무사에서 내려다 본 발포 만호진성 ⓒ 김성철
지금까지 발포에 남아 있는 문화재로는 지방기념물 27호로 지정된 발포 만호진성(鉢浦 萬戶鎭城)이 있다.

발포는 예로부터 천혜의 조건을 갖춘 군사 요충지로 마을 전체가 성벽으로 둘러쌓여 있고 성벽은 옹형에 가까운 사다리꼴 형태로 전체 둘레는 560m이고 높이는 약 4m이다. 성안 건물로는 동헌과 객사, 배수로, 무기고, 동문, 서문, 남문, 망루 터 등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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