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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창
비 내리는 창 ⓒ 박상건
그렇게 어디론가 흘러가면서 내 마음의 창틀에 고인 흔적들도 휩쓸려 감을 느낀다. 묵은 것들이 사라져 가는 사이에 어느 이름 모를 묘지의 풀 한포기도 적시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빗줄기는 이승과 저승의 가교자라는 생각에 이른다.

빗줄기와 햇살의 만남, 자연의 위대한 조화

모두가 빗줄기를 통해 파랗게 일어서는 그런 봄날이다. 행복은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버 빗줄기의 부지런한 움직임에서 읽는다. 행복은 거저 떨어지는 것이 열매가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동안의 감정의 조절을 통해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내가 나를 다스리는 그 여부에 따라 행복의 열매를 따기도 하고 상실을 아픔을 맛보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산다는 일은 그러니 누굴 탓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다가가 적셔드는 빗줄기 같은 것이다. 내가 먼저 만든 사랑으로 누군가의 가슴을 적실 수 있다면 그것이 순수하고 창조적인 행복이 아니겠는가. 비에 젖은 창틀에는 언젠가 바람이 불 것이다. 그리고 그 흔적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지워갈 것이다.

마치 어느 강가에 소복차림의 한 여인이 뿌리던 그 가루처럼, 우리는 이 땅에서 곧 멈출 봄비처럼 인연의 고리를 흙에 묻을 것이다. 강물에 뿌리며 작별할 것이다. 빗줄기는 그렇게 슬픔의 상징어이면서, 기쁨의 햇살과 동행하는 자연의 위대한 생산품이다. 이 비 그치면 녹슨 창틀에 남은 슬픔과 절망, 혹은 고독의 흔적을 빛나는 햇살이 탈탈 털어서 말려줄 것이다. 그 햇살은 삶의 환희의 상징어이다. 비와 햇살 사이에는 인간의 희로애락과 고진감래의 담론이 압축되어 있는 셈이다.

비와 햇살의 극과 극이 아니라 1막1장의 자연이 연출해내는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휴먼 다큐 같은 것이다. 마치 어느 노스님의 사리처럼 빛나던 빗줄기가 창틀에 끼인 녹슨 부스러기에 젖어 들어가 청동가루처럼 햇살에 톡, 톡 튀면서 빛나는 것을 보아라. 그것은 자연의 위대한 조화이며, 인생의 슬픔과 기쁨의 찬란한 만남의 상징어인 셈이다.

손바닥에 빗물을 받아 놓고 나를 읽는다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그런 빗줄기를 한 움큼 받아든다. 내 삶의 부스러기들을 하나씩 세워 보는 동안 내 손바닥에 빗물이 샛강처럼 갈라진 손금을 타고 흘러간다. 그 손금의 강줄기를 따라 먼 훗날의 희망을 그려보는 일도 의미 있는 일이리라.

그런 내일을 길모퉁이를 향해 진달래와 자운영이 환하게 불을 밝힌다. 그 거리 한 복판에서 내 마음의 정원에도 이 봄비를 뿌리고 싶다. 내 마음에도 아름다운 꽃밭, 마음의 꽃밭을 만들어 빗줄기를 맞고 싶다. 빗줄기에 젖어들고 싶다.

그 꽃밭에 찬란한 봄날의 꽃 한 송이가 피기를 소망한다. 언젠가 꿈 한 송이가 폭죽처럼 이 세상 한복판에서 터지길 기다려 보는 것이다. 기다라며 그리워하며 먼 훗날의 봄 길을 향해 끝없이 걸어가고 싶은 것이다.

그 거리에도 청초한 꽃들이 피어 있길 소망한다, 내 마음의 꿈 한 송이를 위해 잠 못 이루는 밤을 지나 다시 아침이 오고 창가에 서 있다. 빗줄기는 여전히 무심하게 내리고 있다. 무심으로 사는 일이 무엇인지를 이 비 그치기 전에 작설차 한 잔 우려 놓고 곰곰이 생각해본다.

작설차 한 잔 놓고 음미하는 자아와 자연의 오묘함

저 빗방울에 적셔 꿈을 키워왔을 세작 잎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무심으로 생각을 적신다. 뜨거운 물에 떨어뜨리는 찻잎이 호수의 연꽃처럼 푸르게 두 팔을 벌린다. 조회시간 조무래기들의 손들처럼, 운동회 때 보여준 아이들의 어깨걸이처럼 찻잔 속에서 아름다운 잉태가 보인다.

빗방울에 수런대는 보길도 세연정의 수련
빗방울에 수런대는 보길도 세연정의 수련 ⓒ 박상건
그런 사이에 차 향기가 창밖으로 흘러간다. 어쩜 저 향기는 자신이 살아온 어느 비탈진 산 어귀 차밭의 땅뙈기를 향하는 수구초심 같은 기표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허공에 포물선을 그으며 나부껴 가는 모습이 세상의 여백이 무엇이며, 여백처럼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짐작케 한다. 푸른 허공이 세세한 나뭇가지의 존재를 알려주는 여백이었듯이, 사각의 창틀은 그 향기의 여백이 되어 주고 있다.

액자사진처럼 창틀에 흩어지는 저 향기의 그림자. 그 향기는 이내 봄비에 축축하게 적셔든다. 그들의 아름다운 만남이 창틀에 파노라마처럼 그려진다. 세상에 태어나 불혹을 지나는 상념의 굴렁쇠를 굴리며 저 창틀에 유년의 기억과 그리움, 그리고 자연의 소생하는 모든 생명의 살붙이들이 향기롭게 태엽에 감긴다. 언젠가는 다시 이 순간도 또 다른 봄비를 만나 추억의 필름을 되돌려 줄 것이다. 유난히 향기로운 꽃 그림자가 맑고 밝은 빗방울 안에서 흔들거리는 그런 봄날의 아침이다.

덧붙이는 글 | 박상건 기자는 91년 <민족과 지역>으로 등단한 시인이고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 물> 편집부장을 거쳐 현재는 <계간 섬> 발행인, 섬문화연구소 소장, 서울여대 겸임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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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언론학박사, 한국기자협회 자정운동특별추진위원장, <샘이깊은물> 편집부장,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위원, 한국잡지학회장, 국립등대박물관 운영위원을 지냈다. (사)섬문화연구소장, 동국대 겸임교수. 저서 <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섬여행> <바다, 섬을 품다> <포구의 아침> <빈손으로 돌아와 웃다> <예비언론인을 위한 미디어글쓰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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