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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마을 사람에게 편지를 전해주고 있는 모습
산골마을 사람에게 편지를 전해주고 있는 모습 ⓒ 박상건
문득 그이를 처음 만나러 가던 날, 그 선명한 눈길의 발자국들이 새롭게 와 닿았다. 그 때도 춘설이 남아 있었다. 지리산 모롱이 굽이굽이 돌아갔었다. 그 고개가 ‘팔령치’였다. 그 고갯길을 내려가면 인월이다. 특히 인월장은 전북 남원시 운봉면, 산내면 사람들과 경남 함양군 마천면 휴천면 등 영호남 사람들이 모여 형성된 특이한 오일장이다. 고개 하나로 그 고개를 떠받치는 계곡 하나로 영호남이 갈리는 곳이지만 살아가는 모습은 그 계곡물처럼 하나로 삶의 줄기를 이루는 곳이다.

최장식씨 역시 그 지리산 자락에 있는 전라도에서 태어나 경상도 땅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아 살아가고 있다. 인월장은 산골마을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곶감, 산나물 등 자연산 먹거리들이 대부분이다. 여기서 조금 더 내려가면 그이가 근무하는 마천우체국인데 그 해 겨울 끝자락에서 만난 인월장에서 나뭇가지에 매달린 곶감을 사들고 찾아간 기억에 생생하다.

우체국 직원은 8명인데 집배원이 절반을 차지한다. 이곳 우체국에 근무하는 최장식씨는 1979년 집배원이 되어 올해로 올해 26년째 지리산록을 넘나들고 있다. 그이의 배달망은 지리산이 품고 있는 스물세 개의 마을. 특히 가채 마을, 의평 마을, 의중 마을 등은 눈비 내리는 날에는 사람 접근이 어려운 오지이다. 교통이 막혀도 집배원 오토바이는 쉬지 않고 산길을 뚫고 편지를 기다리는 농부들을 찾아간다. 그이가 하루 배달하는 우편물은 자그마치 500여 통.

농부들과 호흡하는 집배원 사랑 26년

집배원을 천직으로 생각하며 사람이 좋아 자연이 좋아 이 길을 달리겠다는 최장식씨.
집배원을 천직으로 생각하며 사람이 좋아 자연이 좋아 이 길을 달리겠다는 최장식씨. ⓒ 박상건
이런 오지를 배달하다보니 사고도 많았다. 96년 신작로 공사 중이던 트럭에 받혀 골짜기로 데굴데굴 굴러 큰 사고를 당했던 것. 이 사고로 그이는 무릎수술을 받았고 쇠파이프를 다리에 박았다. 그래서 지금껏 한 쪽 다리를 절고 있고 다리를 구부리지 못한다. 그 후 얼마가 지나서 그이는 다시 사고를 당했다. 이번에는 꽁꽁 얼어붙은 산길에서 오토바이가 쭈르르 미끄러져 발목을 다친 것이다.

지금도 배달 후에는 집에서 매일 뜸을 떠서 침을 맞는다고 했다. 수술을 하라는 주위의 권고도 있었지만 지리산 서북부 지역은 아무나 배달할 수 없는 험난한 지역이다. 그래서 자신으로 인해 업무의 공백이 생길 경우 다른 동료들이 고생할 것을 염려해 이도 그만 포기하고 만 것이다.

사고는 꼬불꼬불한 길가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난데없이 개가 달려들어 허벅지를 물어뜯기도 했다. 그래도 사람이 좋아 자연이 좋아서 평생 한 길을 달리고 있다는 그이.

“교통이 많이 불편해서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생각해보면 세상에서 쉬운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일은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봐요. 공기 맑고 물 맑은 지리산에 사는 사람들은 저마다 심성이 곱지요. 정들면 다 이웃이라고 하잖아요? 편지를 받고 기뻐하는 얼굴들을 보면 하루 피곤함이 싸악 가거든요.”

동료 집배원과 마을 사람들이 출판기념회 열어 줘

대선이다 총선이다 해서 선거철이 끝나면 다시 농협장 선거가 닥쳐 유난히 선거 관련 우편물이 많고 그 우편물이 오지 집배원들의 짐받이의 하중을 거의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선거철이 좀 지나는가 싶으면 이제는 우편물의 거의를 광고물이 차지하고 있을 정도란다. 연필심에 침 발라 꾹꾹 눌러쓰던 그런 편지들이 줄어들고 있는 게 못내 안타깝다는 최장식씨.

그래도 매일 구불구불 산길을 오르내리면서 마주치는 지리산의 풀이며 나무들이 버거운 삶을 위안해주곤 한단다.

“저 작은 풀꽃 하나를 보아도 남이 알아주든 말든 세상에 제 몸을 맡기고 당당히 자기 세상을 꽃피어 가잖습니까? 청솔가지 꺾어 아궁이 물 불 지피며 누군가를 기다리듯이 저 또한 조급함을 털며 사는 풀 한포기 심정으로 넉넉하고 여유로운 마음가짐으로 편지를 기다릴 마을 사람들을 찾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자연에 빠져 살던 그이는 이 지역에 사는 한 시인을 만나게 되었고, 그 시인이 건네준 <지리산 문학> 동인지 한권을 받아들면서 시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94년 <문예한국>으로 정식 등단했고 지금은 이 문학동인회 회장을 맡고 있다.

시에 푹 빠져 들면서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논두렁에서 먼 산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시상을 떠올리다가 그만 달리던 오토바이와 함께 논두렁으로 곤두박질친 것이다. 그렇게 시상에 빠져 시골길을 달리다 보니 편지를 다른 집에 배달하기도 했다며 너털웃음을 짓던 그이. 그렇게 시를 따라 다니는 길 집배원에게 첫 시집이 태어났다. ‘나의 물음표’라는 시집이었다. 우체국 동료들과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경사났다면서 출판 기념회를 열어주었다.

최근에 출간된 <지리산문학> 동인지. 그이는 이 동인회 회장을 맡고 있다.
최근에 출간된 <지리산문학> 동인지. 그이는 이 동인회 회장을 맡고 있다. ⓒ 박상건

농부들 공과금 농기계 등 잔심부름은 집배원의 몫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흘러만 내리는 물/미운 것 좋은 것 가리지 않고/지상의 모든 이들에게/골고루 자기 살을 떼어준다”고 사람과 자연에 대해 따뜻하게 노래한 시인의 눈길, 집배원의 아름다운 심성이 그대로 젖어 있는 시편들이다. 다른 시에서도 이러한 정서가 그대로 배여 나온다. “흰 구름 어깨동무로 한가로이/상무주 능선을 타고/진한 솔향기에/그름도 취하고/나도 취하고//신선들이 쉬었다간/일엽초로 어깨띠를 두른 괴돌바위가/날 부르며/자네도 쉬었다 가라하네”(‘상주능선을 따라서’ 중에서)

시를 쓰면서 돌멩이 하나 풀 한포기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더라는 그이. 그렇게 묵묵히 자기의 세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이 천직의 길을 자랑스럽게 살아간다는 그이. 지리산 길들을 꿰뚫고 다니는 그이를 일러 마을사람들은 ‘산신령’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그이는 그냥 길만 달리고 그 길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 길들이 빨려들어가는 집집마다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한다. 그 집안의 문제들을 속속들이 다 안다. 한 식구처럼 지낸 결과이다. 그래서 오지의 집배원은 편지만 배달하는 것이 아니라고들 한다. 각종 공과금 납부에서부터 농약이나 농기계를 도맡아 잔심부름을 해주고 있다.

나이든 농부들이 대부분인 산골마을에서 이런 일들은 집배원들의 ‘숙명적인 과제’처럼 되어 있다. 일감을 받기 전에 집배원이 먼저 달려가는 것이 천직이요, 인지상정처럼 되어 있다. 오토바이를 몰고 가다가도 나물 캐는 아낙을 보면 그 옆에서 함께 대화를 나누며 나물을 캐고 벼를 베는 농부를 만나면 부르지 않아도 논두렁에 오토바이를 세워둔 채로 낫을 잡기도 한다. 또한 고구마 줄기를 털어주기도 하고 마을 잔칫날에는 읍네를 오고가는 아낙들의 짐꾼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이의 짐받이에는 그렇게 쌀자루와 가래떡이 실려 오고가곤 한다.

집배원 빈 짐받이에는 고구마와 나물을 실려 보내는 농부들

함양 마천우체국 앞에서 배달 나가기 전 '시인 집배원' 최장식씨 모습
함양 마천우체국 앞에서 배달 나가기 전 '시인 집배원' 최장식씨 모습 ⓒ 박상건
“뭐 제가 다 좋아서 하는 일 아닙니까? 저뿐만 아니라 동료 집배원들도 어디선가 남모르게 이웃들을 도우며 함께 살아갈 것입니다. 어떤 날은 마을 사람들이 불러서 가보면 고구마 한 푸대를 건네 주기도 하고 산나물을 곱게 다듬어 저녁 밥 맛있게 먹이라고 덕담도 전해주곤 합니다. 모두가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친절은 이자까지 붙여서 되돌아온다는 말을 생각게 하는 대목이다. 그런 마을사람들과 집배원 사이이지만 간혹 슬플 때도 있단다. 외국에 돈 벌러 갔던 남편이나 자식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전보와 군대 갔던 아들의 옷가지를 배달하러 갈 때이다. 요즈음에는 집집마다 전화가 있어 이런 비보가 줄어들고는 있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런 일들이 이따금 마음을 무겁게 하고 씁쓸하게 한단다.

그이는 매일 아침 여덟시 반에 함양군 마천 우체국에 출근한다. 우편물 종류에 따라 하루가 슬프게 시작되기도 하고 기쁘게 시작되기도 한다. 소포꾸러미만 바라보아도 그 내용물을 알아낼 수 있다. 그 종류에 따라 그 집안의 풍경이 먼저 그려진다. 특히 가정 형편이 딱한 집안일수록 기쁘지 않는 우편물 꾸러미 앞에서 먼저 눈시울이 붉어지게 된다. 그런 날은 배달 가는 그 길이 그렇게 멀고 험하게 와 닿을 수가 없단다.

그렇게 달려가는 길은 자신의 육신을 다독이며 가는 길이기도 하다. 그이는 날이 궂으면 늘 발목이 시리고 시큰거린다. 수술 후유증 탓이다. 욱신거리는 ‘상처’에 대한 저항하는 만큼 자신의 힘을 쏟아내게 되고, 그런 탓에 몸무게가 줄어 날로 젊어진다고 농담 아닌 농담을 하던 그이.

암투병을 이겨낸 딸 아내 등 최장식씨 가족
암투병을 이겨낸 딸 아내 등 최장식씨 가족 ⓒ 박상건

가족 암 투병 등 어려운 사정에도 한결같은 이웃사랑의 전도사

몇 년 전에는 어린 딸까지 골수암에 걸려 대수술을 받았고 이를 온 가족의 끈끈한 사랑으로 이겨냈다. 누구보다도 힘겨운 병마와 싸우며 사는 가정이지만 집배원에 대한 자랑스러움과 이웃에 대한 애정은 더욱 깊어져 갔다. 그래서 다시 잠시 아픔을 잊고 힘차게 그 길을 달려갈 수밖에 없다는 그이. 장시간 안부를 묻는 서로의 통화를 마친 뒤 나는 최근의 시집과 에세이집을 답례로 보냈다.

그 우편물을 배달할 또 다른 집배원을 떠올렸고 그가 몰고 달릴 오토바이 바큇살이 쉴 새 없이 풋풋한 시골길을 떠올렸다. 그 시골길을 감아 돌리며 달리는 뒤안길을 생각하며 그가 보내온 동인지의 시 구절이 그가 기다리고 있을 행복의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눈 덮인 산골마을 외딴 집으로/나보다 먼저 간 고라니 발자국/추위 속에 배가 고픈 고라니 발자국이다/눈 위를 끄어가며/삶의 무게로 푹 페인 발자국들/고라니 발자국 따라/집배원의 발자국이/새하얀 눈 위를 뽀드득뽀드득/일부인(日附印)으로 찍혀가고 있다”(지리산문학 42집 ’고라니 발자국 따라‘에서)

덧붙이는 글 | 박상건 기자는 91년 <민족과 지역>으로 등단한 시인이고 <뿌리깊은나무> <샘이깊은물> 편집부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계간 섬> 발행인, 섬문화연구소 소장, 서울여대 겸임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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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언론학박사, 한국기자협회 자정운동특별추진위원장, <샘이깊은물> 편집부장,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위원, 한국잡지학회장, 국립등대박물관 운영위원을 지냈다. (사)섬문화연구소장, 동국대 겸임교수. 저서 <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섬여행> <바다, 섬을 품다> <포구의 아침> <빈손으로 돌아와 웃다> <예비언론인을 위한 미디어글쓰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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