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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랫말의 힘, 추억과 상투성의 변주> 책 표지
<노랫말의 힘, 추억과 상투성의 변주> 책 표지 ⓒ 책세상
그럼 랩이나 락도 아니고 또 뽕짝도 아니라면 뭘까. 아마도 잔잔하고 온화한 노래. 달콤하고 구슬픈 세상살이 이야기. 또는 사랑 이야기가 진지하게 흘러나오는 노래.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발라드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너무 강렬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느려터지지도 않는 빠르기. 또 부담 없이 들을 수 있고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면서도, 사랑과 이별을 노래하는 노래. 상투적인 노랫말 같지만 거기에서 옛 추억이 묻어나고 또 옛 사랑과 헤어짐이 담겨 있는 노래. 그게 발라드이다.

그 발라드 노래들을 시대별로 하나하나 이어가며 그 노랫말이 주는 뜻과 느낌들을 새롭게 정리한 책이 나왔다. 이른바 김수경이 쓴 <노랫말의 힘, 추억과 상투성의 변주>(책세상·2005)가 그것이다.

“1980년대 중후반, 발라드가 그렇게 부각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20여 년이 지난 지금, 당시의 발라드가 남긴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까. 나는 그 해답의 단서가 노랫말의 힘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문제를 풀어보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17쪽)

그렇다면 발라드는 다른 노래들과 달리 어떤 노랫말을 지니고 있을까. 랩이나 락처럼 조금은 반항적이고 조금은 거칠고 또 많은 외국말 가사가 되풀이되고 있을까. 아니면 뽕짝처럼 흘러간 옛 사연들만 가득 차 있을까.

물론 랩이나 락이라고 해서, 또한 뽕짝이라고 해서 그렇게 한쪽으로만 몰고 갈 수는 없다. 시대가 변했고, 그렇게 한쪽 방향만 고집하는 노랫말들이 이제는 여기저기 다채롭게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발라드에는 어떤 노랫말들이 사용돼 왔을까. 그에 대해 김수경은 1980년대 초와 중반, 그리고 1990년대로 이어가면서, 비록 똑같은 그 노랫말인 것 같지만 그것이 어떻게 다른 옷을 입고서 나타났는지 밝혀주고 있다.

이를테면 박인희가 부른 <모닥불>이라든지 정수라가 부른 〈아! 대한민국〉, 조용필이 부른〈단발머리〉, 소방차가 부른 〈그녀에게 전해주고〉, 그리고 최진희가 부른 〈우린 너무 쉽게 헤어졌어요〉라는 노래. 그게 1980년대 초반에 유행한 발라드인데, 그 노랫말들은 대부분 박건호씨가 지었던 것이다.

그리고 1980년대 후반에는 양인자씨가 많은 노랫말들을 써서 새로운 노래들을 유행시키게 된다. 이를테면 이선희가 부른 〈알고 싶어요〉라든지, 조용필이 부른 〈킬리만자로의 표범〉, 김국환이 부른 〈타타타〉등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수 없이 많은 노랫말을 써서 그 발라드 풍 노래들을 유행시켰던 박건호씨와 양인자씨가 쓴 노랫말에는 어떤 게 묻어나고 있는가.

그건 그저 뜬구름 잡듯 허공에 대고 메아리치는 노랫말이 아니라, 현재 살아가고 있는 삶 속에서 일어나는 구체적인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애매모호한 비유적인 표현들을 갖다 붙이기보다는 듣는 즉시 이해하고 또 함께 느낄 수 있는, 그야말로 설명이 필요없는 노랫말을 반복해서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 언젠가 나를 위해 꽃다발을 전해주던 그 소녀
오늘따라 왜 이렇게 그 소녀가 보고 싶을까
비에 젖은 풀잎처럼 단발머리 곱게 빗은 그 소녀
반짝이는 눈망울이 내 마음에 되살아나네

-조용필 <단발머리>(박건호 작사·조용필 작곡)

달 밝은 밤에 그대는 누구를 생각하세요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 꾸시나요
깊은 밤에 홀로 깨어 눈물 흘린 적 없나요
때로는 일기장에 내 얘기도 쓰시나요
나를 만나 행복했나요
나의 사랑을 믿나요
그대 생각하다 보면 모든 게 궁금해요

-이선희 〈알고 싶어요〉(양인자 작사·김희갑 작곡)


그러나 김수경이 당시 박건호씨와 양인자씨에게서 찾고자 했던 점은 비단 그 뿐만이 아니다. 그들 두 사람이 수 없이 많은 노랫말을 썼고, 정말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노랫말을 썼다는 공로뿐만 아니라, 정작 더 중요한 것은 ‘노랫말이 먼저, 멜로디는 나중’이라는 가치판단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그건 요즘 들어 불고 있는 풍토와는 전혀 다른 일이었다. 요즘에는 멜로디가 우선이고 노랫말은 나중이다. 세상에 뜰 수 있는 곡을 미리 짜 놓고서 그 뒤에 노랫말을 따라 붙이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니 옛날, 노랫말에 따라 영감을 얻어 곡을 창작하던 그때보다는 훨씬 더 뒤떨어진 영감과 느낌을 받는다. 그만큼 그 시대에 좋은 노랫말을 써서, 거기에 따라 영감을 얻어 작곡하도록 그 토대를 만들었던 박건호씨와 양인자씨는 대단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노랫말들이 1990년대로 흘러가도 좀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과 헤어짐과 아픔과 슬픔이 똑같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상투성’이란 게 그것이다.

대중가요가 다들 그렇듯, 시대를 달리 해도 사랑과 이별, 그리고 그 아픔 등 비슷비슷한 노랫말들이 수 없이 들어 있다. 더욱이 새로운 곡들이 쏟아져 나와도 다들 거기서 거기다. 그래서 상투적이고 뻔한 말들을 빼면 정작 알맹이가 들어 있는 노랫말을 찾기란 쉽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정말로 상투적인 표현은 다 쓸모없고 진부한 것인가? 김수경은 그에 대한 해답을 이 책 후반부에 밝혀주고 있다. 사실, ‘가지 마라’, ‘그리움이 사무친다’, ‘나 정말 당신을 사랑해’, ‘그대 없는 세상’, ‘당신은 너무합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으며’ 등 상투적인 말들이 그 당시에도 많이 쓰였고 시대를 달리해도 똑같이 사용됐다. 그런데도 그 당시 신선할 것 같지 않은 노래들이 어떻게 히트곡이 될 수 있었는가.

그에 대해 김수경은 그 노래들이 정말로 ‘획기적’인 노랫말을 담고 있었고, 사랑과 이별과 슬픔을 담아내는 노래 속에 ‘구체적인 공간’까지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이를테면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 ‘그 아픔까지 사랑한거야’,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 하는 노랫말들. 그리고〈광화문 연가〉 〈남남〉 〈사랑하기에〉 〈잃어버린 우산〉 등에 담긴 구체적인 상황과 그 공간 표현.

“위에서 예로 든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다르고 있는 노래들이다. 이별했으나(혹은 이별을 앞두고 있으나) 아직 그녀를 사랑한다든가 잊을 수 없다는 점은 기존의 사랑․이별 노래와 다를 바가 없는 듯하다.

그러나 함께 있는 오늘이 지나고, 내일이 오면 남남이 되고 말 것이라는 깨달음(〈남남〉),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왜 떠나가야 하는지, 그런 말은 믿을 수가 없다는 항변(〈사랑하기에〉) … 그러나 이 같은 새로움을 빛나게 하고 그 의미를 분명하게 드러내주는 것은 오랜 시간 쌓여 온 상투성에 기반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88쪽)


90년대가 지나고, 새로운 천년이 되었어도, 아니 “천년이 두 번 지나도” 여전히 발라드계에는 사랑과 헤어짐과 슬픔을 담는 상투적인 노랫말들이 되풀이될 것이다. 그건 다른 노래와 마찬가지로 발라드가 대중성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릇 대중성을 지향하는 노래라면 거기에는 보통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노랫말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그래야만이 대중들이 요구하는 욕구에 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듯 고리타분한 듯, 늘 되풀이될 수밖에 없는 상투적인 노랫말이 앞으로도 똑같이 사용될 것인데, 그렇다면 그 속에서도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이겠는가? 그건 상투적인 노랫말이 좀더 색다른 뜻과 구체적인 현장감을 담아내도록, 노랫말을 짓는 사람들이 그 디딤돌 역할을 충실히 해 주는 데 달려 있지 않겠나 싶다.

그래서 그 옛날 박건호씨와 양인자씨 같이 ‘노랫말이 먼저, 멜로디는 나중’이라는 가치판단이 현 발라드 계에도 다시금 부활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만큼 부르기 좋고 이해하기 쉽고, 그야 말로 대중성을 받는 노랫말을 지어내기란 쉽지 않는 일일 텐데, 다시금 그런 작사가들이 일어났으면 한다.

노랫말의 힘, 추억과 상투성의 변주

김수경 지음, 책세상(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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