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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천안으로 거처를 옮겨 집필에 전념하던 80년대 중반의 임종국 선생
서울에서 천안으로 거처를 옮겨 집필에 전념하던 80년대 중반의 임종국 선생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무서운 눈빛의 그 일본군의 말대로 정확히 20년 후 체결된 굴욕적 한일협정은 서른일곱 성인이 된 그에게는 너무도 큰 충격이었고 그는 문학이라는 자신의 진로를 또 바꾸어 이듬해 1966년 저 유명한 <친일문학론>을 펴낸다. 그가 바로 친일파가 주류가 된 척박한 이 땅에 친일문제연구의 씨를 뿌린 고 임종국 선생이다.

임종국 선생은 <친일문학론>을 시작으로 <발가벗고 온 총독>(1970), <정신대 실록>(1981), <일제침략과 친일파>(1982), <밤의 일제침략사>(1984), <일제하의 사상탄압>(1985), <한국문학의 민중사>(1986), <친일논설 선집>(1987), <일본군의 조선침략사 1·2>(1988·1989) 등을 펴냈다. 이어 전 10권 분량의 <친일파 총사> 발간을 계획하고 저술 중 폐기종으로 1989년 11월 12일 천안에서 타계했다. 당시 나이 불과 61세.

타계 전까지 선생의 연구 활동을 잠시나마 지켜본 서울대 국문과 명예교수인 김윤식 선생에 의하면 임종국 선생은 침낭과 식기를 챙겨 가지고 당시로서는 근대 문헌 자료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던 고려대 도서관에서 몇 날이고 나오지도 않고 아무도 손대지 않았을 먼지 가득한 책들과 씨름을 하고 계셨다고 한다. 선생의 연구 활동에 대한 열정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리라. 그러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친일관련 연구에 몰두하면 할수록 선생에게 돌아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생활고뿐이었다.

게다가 친일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선생의 글은 일반 매체에서는 그리 환영받지 못했다. 요즘도 친일문제라면 여전히 금기의 영역 중에 하나인 우리나라이고 보면 선생의 생전에는 오죽했겠는가. 한 예로 대표적인 역사 전문 출판사인 한길사 김언호 사장은 작년 5월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우편을 보내 1979년 판매금지 조치로 인해 문광부에 빼앗긴 <해방 전후사의 인식>(약칭 해전사) 제1권 초판본 500여 부를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김언호 사장에 의하면 문제가 된 것은 책에 실린 임종국 선생의 ‘일제 말 친일 군상의 실태’란 논문으로 100쪽에 걸쳐 친일파들의 이름을 낱낱이 거론하며 ‘친일청산이 민족정기를 세우는 중대한 과제’라고 지적한 글이 당시 검열을 담당했던 당국자들에게는 몹시 못마땅했다는 것이다.

한승조 전 고려대 명예교수
한승조 전 고려대 명예교수 ⓒ 시민의신문
그렇다면 임종국 선생의 글을 못마땅하게 여긴 검열 당국자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임종국 선생의 글을 직접 검열한 당사자는 아닐지라도 한승조는 당시 검열의 당사자 중 하나였던 것 같다. 한승조의 이력 중에는 ‘공안문제연구소 민간 감정위원’ 활동이 포함돼 있는데 그것은 국가보안법 사건 재판이 벌어질 때마다 소견을 발표해 피고인들의 ‘이적성’을 판단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승조는 이장희 교수의 저서 <나는야 통일 1세대>라는 책에 대한 소견서에서 “쥐덫에다 남북한의 평화통일이라는 맛있는 음식을 놓고 그 덫에 걸려드는 어린이들을 낚아채는” 책이라고 ‘악평’을 한 바가 있다. 한승조와 함께 소견서 제출에 참가한 또 다른 인사는 이화여대 김용서 교수와 명지대 이인수 교수이다.

김용서 교수는 작년 3월 한국해양전략연구소 강연에서 “정당한 절차를 밟아서 성립된 좌익정권을 타도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복원하는 방법에는 왜 군부 쿠데타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 이해될 것이다”라고 말해 물의를 빚었고 이인수 교수는 이승만의 양자다.

여기서 잠시 한승조의 이력을 살펴보자. 그는 1969년부터 1995년까지 고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1980년 11월부터 1984년 12월까지 한국국민윤리학회 회장, 1982년 문교부 정책자문위 국민정신분과 위원장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기획처장, 1983년 민주평화통일자문위 상임위원, 1985년부터 1989년까지 ‘민족지성’ 발행인, 1985년부터 1992년까지 한국정신교육중앙협의회 회장, 1985년 한국도덕정치교육연구소 소장, 1997년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서평위원회 위원장 등 유독 ‘정신’과 ‘윤리’ 분야에서 활동하였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전두환 정권으로부터는 새마을훈장 협동장(1981년), 국민훈장 동백장(1984년), 국민훈장 모란장(1986년) 등을 각각 받았다.

이처럼 한승조가 왕성하게 활약하던 당시는 친일이라는 원죄를 가리기 위해 반공 이데올로기가 전가의 보도처럼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던 때였으니 임종국 선생은 사회와 담을 쌓고 후일을 기약하는 심정으로 더욱 친일문제연구에 매진했을지도 모른다. 선생은 생전에 마땅히 받아야 할 존경과 예우는커녕 가족의 생계조차 제대로 책임질 수 없었으나 친일파들의 행적을 기필코 기록으로나마 남기고 말겠다는 의지를 지닌 시대의 등불 같은 지식인이었다.

장준하와 박정희처럼 한 시대를 살면서도 전혀 다른 삶을 살다간 역사의 인물들이 많다. 또한 같은 고장 출신이면서 친일과 항일의 상반된 족적을 남긴 인물들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경북 영덕의 경우 일제에 비행기를 헌납한 거물 친일파 문명기와 평민 출신 의병장 신돌석이 있는가 하면 경남 밀양에는 일본 국회의원까지 지낸 친일단체 대의당 당수 박춘금과 대표적인 항일 투쟁 단체인 의혈단장을 지낸 약산 김원봉 등이 있다. 멀지 않은 미래에는 한승조와 임종국 역시 위와 비슷한 예로 언급될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친일파들에 의해서 1949년 와해된 반민특위의 정신은 1989년까지 온전히 임종국 선생 개인이 이어왔다고 하면 과연 누가 이의를 달 것인가. 이제 제2의 반민특위가 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4월이면 출범할 예정이며 나아가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환수특별법도 이번 임시 국회에서 논의될 예정이다.

29일 임종국 선생 기념사업회 창립 예정

2003년 11월 9일 천안 공원묘지에서 열린 임종국 선생의 14주기 추모제.
2003년 11월 9일 천안 공원묘지에서 열린 임종국 선생의 14주기 추모제. ⓒ 박도
이 모든 친일역사 청산의 수레바퀴를 40년 간 온 몸으로 밀고 왔던 임종국을 기억하고 존경하는 몇몇 사람들이 모여 3월 29일 서울에서 조촐하게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선생의 뜻을 되새기려 한다. 기념사업회는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을 비롯해 김삼웅 독립기념관장, 정운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김재용 실천문학 주간 등 평소 선생의 뜻을 이어 친일문제연구와 실천 활동을 벌여온 분들이 주축이 되고 있다.

기념사업회는 우선 선생이 연구에 몰두하면서 많은 역작들을 남기셨고 현재 선영이 모셔져 있는 천안시에 추모 조형물을 건립하고 정부에는 문화훈장 추서를 요구할 계획이다. 또한 선생의 이름을 딴 <임종국 문화상>을 제정해 학예, 언론, 사회 운동 분야에서 ‘역사 정의 실현’ 활동을 왕성히 벌이는 인사들을 격려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1992년 김창숙 선생의 이름을 딴 심산상(心山賞)을 추서 받으신 선생은 이제 자신의 이름으로 된 상을 만들어 생전에 직접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선생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많은 후학들을 끊임없이 길러내실 것이다. 이러한 기념사업회에 고대인들이 동참하기를 권유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민족’ 고대 100년의 역사 속에는 이처럼 어둠 속에서 빛났고 앞으로 더욱 더 빛을 발할 임종국이라는 이도 있었음을 기억해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덧붙이는 글 |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는 3월 29일 오후 7시 30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층 교육장에서 출범식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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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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