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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이기원
해마다 봄이 되면 학교에서 하는 신체검사 날이 되면 학교에 가기 싫었습니다. 시력검사 때문입니다. 친구들은 깨알 같은 숫자도 척척 읽는데 시력표 맨 위의 동그라미가 어느 방향으로 뚫려 있는지도 분간하기 힘들었습니다. 시력표에 있는 걸 하나도 읽지 못하고 쩔쩔 매다보면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런 나를 선생님은 딱하다는 듯 바라보았고 친구들은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았습니다.

지금처럼 가지고 놀 장난감이 흔하지 않았던 70년대 아이들은 굴러다니는 나뭇가지나 돌로 공터에 금 그어 놓고 놀았습니다. 땅뺏기 놀이, 시계 붕알 놀이, 제기차기, 비석치기 등의 놀이를 할 때 공터에 금 그어 놓고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눈이 나쁜 탓에 놀이를 할 때 금을 정확하게 보지 못해 욕을 많이 먹었습니다. 그런 날이 계속되다 보니 어느 사이에 친구들과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눈이 나빠 동네 어르신께 인사도 못하고

어린 시절 저희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늘 강조하신 것 중의 하나가 동네 어른을 만나면 공손하게 인사 잘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다 동네 어른께서 뉘 집 애가 인사성이 바르다는 얘기를 들으시면 집에 와서 나를 불러 앉혀 놓고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 어떤 사람과 마주치게 되면 인사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눈이 나빠지기 시작하면서 길에서 사람들과 마주치는 게 걱정이 되었습니다. 동네에서 만나는 사람들이야 평소에 보아온 모습대로 짐작하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쩌다 평소와는 다른 옷을 입고 다가오면 그 사람이 누군지 멀리서는 알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사를 해야 하는 아는 어른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위해서는 눈을 잔뜩 찡그리고 바라봐야 합니다. 눈 나쁜 사람들이 그나마 사람이나 사물을 조금이라도 정확하게 보기 위한 행동이지요.

그런데 어른들의 입장에서 보면 꼬마 녀석이 버르장머리 없이 째려본다는 느낌이 들었나 봅니다. 하루는 동네 어른 중의 한 분이 아버지에게 내 버르장머리 없는 행동에 대해 얘기하신 모양입니다. 그날 저녁 아버지에게 심하게 혼이 났습니다. 아니라고 아무리 변명을 해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야단을 맞으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그 후로는 길에서 사람을 만나는 게 정말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먼발치에 사람이 보일라치면 길 옆 밭으로 들어가 숨을 때도 있었습니다. 보리밭 사이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사람이 지나가면 나와서 길을 걸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외톨이가 되고 길을 걷다가도 사람을 마주치기 겁을 내던 나는 자연스럽게 혼자서 하는 일을 좋아했습니다. 주로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조그맣게나마 학교에 도서관이 있어서 책을 많이 빌려다 읽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털어 놓을 대상이 마땅치 않아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가끔씩 허공을 보며 공상에 잠기기도 했는데 주로 눈이 좋아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눈을 감고 오래오래 있다가 눈을 뜨면 혹시 눈이 좋아지지 않을까 생각하며 눈을 감고 한동안 있다가 눈을 떠보았지만 달라지는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투명한 비닐이나 유리조각을 주워서 눈에 대고 보면 혹시 눈이 좋아지지 않을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콜라병 밑바닥에서 새 세상을 보다

그런데 5학년 가을의 어느 날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점심 도시락을 후딱 먹어치우고 운동장 가에 혼자 앉아 시간을 보내가다 무심코 주변을 둘러보니 콜라병이 깨져서 뒹굴고 있었습니다. 무심코 병 조각을 주워 눈에 대고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다른 조각으로 볼 때는 별 느낌이 없었는데 두꺼운 병 밑바닥을 주워 눈에 대고 보니 멀리 보이는 풍경이 선명해졌습니다.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겨도 역시 잘 보였습니다.

문득 칠판 글씨도 잘 보일까 궁금해졌습니다. 칠판 글씨가 보이지 않아 옆자리에 앉은 친구의 공책을 기웃대며 써야 했습니다. 병 밑바닥을 들고 교실로 뛰어갔습니다. 그리고 교실 뒤에 서서 병 밑바닥을 눈에 대고 칠판을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칠판의 글씨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칠판에 달려가서 조그맣게 내 이름을 써놓고 뒤로 와서 병 밑바닥을 눈에 대고 보았습니다. 내 이름이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당시의 경험은 어린 내겐 감격 그 자체였습니다.

이젠 옆자리 친구 눈치 보지 않고 칠판 글씨를 공책에 옮겨 쓸 수 있다는 게 좋았습니다. 교실 밖에 나가서 병 밑바닥의 깨진 부분을 돌로 갈아 다듬으면서 이젠 나도 칠판 글씨를 읽을 수 있다고 몇 번이고 되뇌었습니다.

6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수업 시간마다 이상한 걸 눈에 대고 칠판을 보는 나를 붙들고 상담을 했습니다. 그리고 가정 방문을 오셔서 안경을 써야 한다고 부모님께 말씀하셨습니다. 안경을 쓰게 되면서 소중하게 간직했던 콜라병 밑바닥도 어딘가로 사라졌습니다.

나에게 콤플렉스는 인생의 달디 단 약

안경을 쓰게 되면서 눈이 나빠 겪어야 했던 극심한 콤플렉스에서는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외톨이로 지내던 것이 여전히 몸에 배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 것보다는 혼자서 하는 일에 익숙합니다.

세상에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는 말을 믿고 사는 편입니다. 눈이 나빠 외톨이로 지낸 초등학교 시절이 있었기에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에 빠져들 수 있었습니다. 그런 생활이 현재의 내 모습을 만드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오마이뉴스>와의 인연도 이런 습관의 결과물입니다.

살다 보면 주위의 많은 이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다양한 복 고루고루 챙겨 남부럽지 않게 사는 이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돌아본 내 모습이 초라해지기도 합니다. 건강을 상실하고 오랜 투병 생활을 하는 이들과 가족들을 보면 가족들끼리 오순도순 마주앉아 따뜻한 밥 먹을 수 있다는 현실이 행복하기만 합니다.

콤플렉스를 극복하지도 즐기지도 못한 채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그 콤플렉스에 빠져 살아온 나날들이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삶이 아이들이 외는 구구단처럼 정해진 답이 있는 게 아닙니다.

공연히 잘난 사람들과의 비교를 통해 받는 열등감과 상실감을 극복할 수만 있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최선을 다할 수만 있다면 콤플렉스가 있는 삶이라도 살아볼만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살다보면 콤플렉스가 내 삶의 중요한 자양분이 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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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콤플렉스 극복기> 응모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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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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