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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는 집안이 어려워짐에 조강지처를 생각한다는 옛말이 있다. 지난 한 주 동안 한국 주재 일본대사관 앞은 물론 전국이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과 시마네현의 ‘다케시마(독도)의 날’ 조례안 제정에 반대하는 시민들과 정당ㆍ시민단체들의 연이은 반일 시위로 들끓었다.

심지어 3월 18일 낮 12시 서울 일본대사관 앞에서는 일본의 독도의 날 조례를 규탄하며 50대의 한 시민단체 회원이 분신을 시도하기도 했다. 반드시 적합한 대응이라 할 수는 없지만 일제 침략을 다시 떠올리는 일본의 망언 망동에 대한 한국민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그 규탄 목소리의 중심에 역시 시민단체가 있음을 보게 된다.

시민들의 자연스럽고 정당한 분노가 시민단체를 통해 조직되고 분출되고 있는 것이다.

또 끓어오르는 분노에도 불구하고 실제 일본과 일본국민을 움직일 수 있는 마땅한 수단이 없는 현 실정에 거의 유일한 방법으로 많은 사람들이 제시하고 있는 것이 일본의 양심적인 세력, 시민단체와 연대하는 방안이다.

이 방안은 결국 우리 정부에서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 강화 및 역사교과서 왜곡 시정 등 과거사 재정립을 위한 내부 조치를 충실하게 하는 것으로 일본을 압박하기 위해 범정부적인 대책기구를 구성하기로 하고, 이것을 중심으로 장기적으로는 여기에 시민사회 등을 유기적으로 묶어 대규모 ‘대일(對日) 컨트롤 타워’를 탄생시킨다는 구상을 하고 있다.

또 한·중·일 3국의 시민단체 등과 연대해 왜곡 시정 노력을 전개해 가기로 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언론에서도 일제히 이러한 시민단체들의 국제적 연대 운동에 크게 기대를 걸고 있다.

<중앙일보> 3월 21일 [취재일기] 민간교류 더 활발해야
<경향신문> 3월 21일 [사설] 독도, 냉정하고 체계적으로 접근해야
<문화일보>
3월 21일 <위기의 한일 해법은 없나-3> 시민단체간 ‘독도’조율 나서나
3월 19일 <한일관계 격랑>한-일 시민단체 ‘역사왜곡’규탄
<동아일보> 3월 11일 [사설] 날조 교과서 거부, 日 시민 양심에 건다


실제 그동안 일본에서의 왜곡된 역사 교과서가 학교 교육에서 채택되지 못한 데는 일본 시민단체의 노력과 한일 시민단체의 연대가 크게 효과를 발휘하였다.

특히 <문화일보>는 3월 21일 그 동안 있었던 사례들을 잘 소개하고 있다. 2001년 일본 우익단체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이 만든 후소샤[扶桑社]판 교과서에 대해 당시 일본 시민단체 ‘어린이와 교과서 전국네트워크21’이 먼저 대응을 시작하고 한국의 ‘아시아평화와 역사 교육연대(교과서운동본부)’가 나중에 가세했던 일, 충남 서산시가 자매결연관계를 활용해 일본 나라[奈良]현 덴리[天理]시의 새역모 교과서 채택을 막은 것은 소중한 경험으로 오늘날에도 활용될 수 있는 사례라는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문제가 국제 인권이슈로 주목받게 된 것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를 비롯한 아시아 각국 시민사회 연대가 이뤄낸 성과로 소개되고 있다.

92년 정대협이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문제를 제기한 뒤 93년 빈세계인권대회, 96년 베이징 세계여성대회에서 결의문이 채택됐고, 96년 유엔 인권위원회 결의문 이후 유엔과 국제노동기구(ILO)도 일본정부의 공식사죄와 법적 책임이행을 권고해왔다.

국내 태평양전쟁희생자 유족단체들이 지난 1998년 1심에서 ‘위안부’ 피해자 일부승소판결을 이끌어냈던 것도 후쿠오카 관부재판 지원회 등 일본 시민단체와의 교류 덕이었다.

<동아일보>도 3월 11일 사설에서 2001년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과 시민그룹은 학교들이 왜곡된 역사 교과서 채택을 반대해서 ‘어린이와 교과서 전국네트 21’ ‘스기나미 어머니 모임’ 등을 결성해 항의집회, 전국 순회강연, 기자회견, 인간띠잇기 행사 등을 열어 역사왜곡 교과서를 채택하지 말라고 요구한 것을 소개했다.

그 노력의 결과 결국 왜곡된 역사 교과서의 채택률은 0.039%에 그쳤다고 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시민단체의 활동에 크게 기대를 걸고 있다. 사실 일본과 같은 집단주의 문화가 강한 사회에서 국익으로 보이는 방향에서 벗어나서 진실과 정의를 주장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민단체의 그러한 노력은 값지고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에서 시민단체, 시민운동은 그 언론들에서 오늘날 어떤 대접을 받고 있을까. 아니 대접을 떠나서 어떤 취급을 받고 있을까.

국내 시민단체에 대한 언론의 비난

<동아일보>
3월 13일 [사설] 청와대 ‘시민단체 정치’의 부메랑
3월 10일 [사설] 시민단체, 돈은 어디서 나오나


<동아일보>는 3월 10일 사설에서 어느 시민단체가 개최한 세미나를 소개하면서 오늘날 시민운동의 일탈에 관해, 그리고 시민단체들의 문제점에 관해 정치화와 권력화로 요약하고 있다. 정책과 입법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일부 시민단체의 힘이 갑자기 커지면서 ‘시민단체 전성시대’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고 하고, 권력을 감시 비판해야 할 일부 시민단체들이 법과 정책에 구애받지 않는 거대한 권력이 되고 있다고 한다.

경제부총리 후임, 국방부 차관 등 고위 공직자 인사 문제에 일부 시민단체들이 지나치게 개입해서 인선을 어렵게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이렇게 시민단체가 중립성과 순수성을 잃고 ‘견제 받지 않는 권력’으로 치닫고 있는 그 원인은 바로 집권세력에 의한 ‘시민단체 활용 정치’의 결과이며 그 부메랑임을 뼈아프게 새겨야 한다고 지적한다.

더구나 단식과 농성 같은 극단적 수단으로 국가 대사를 번번이 왜곡시키고 반대급부로 정부의 용역사업이나 지원금을 받고 있다고 하고, 그래서 시민단체의 운영에 필요한 돈은 어디서 나오느냐고 묻고 있다. 이렇게 시민단체들의 운영과 관련해서 그 재정적 근거(돈줄)를 의심함으로써 도덕성에 심대한 타격을 입히고 있다.

이 신문은 일본에서 왜곡된 역사교과서 채택을 반대하고 일제하 정신대가 잘못된 것임을 고발하며 끈질기게 노력한 양심적 시민단체들의 운영자금은 어디에서 나오는지는 왜 의심하지 않을까. 어떻게 이렇게 상반된 태도를 보일 수 있을까. 우리 속담에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말이 있지만, 그 정도가 좀 심하지 않는가.

한국 시민단체(활동가들)의 현실과 그들의 활동

오늘도 우리 사회의 어느 곳에선가 진실과 정의를 위해서 일신의 영달을, 아니 언감생심 영달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조금이나마 평안한 삶을 선택하지 않고 힘들게 살아가는 많은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우리 사회의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탈락한 낙오자들인가? 일부 위에서 본 언론들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혹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들도 우리의 친구들이고 우리의 후배, 동생 혹은 선배 언니 형들이다.

그들이 그나마 젊었을 때에는 열정만으로 버틸 수 있다. 그러나 그들도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고 살아야 하는 시민들이고 그렇게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한 명 내지 두 명의 자식을 낳아서 키울 때 부모로서 좀더 잘해주고 싶지 않을까.

그런데 그것을 최소한으로 억제하며 건강하게 오늘도 살아가고 있다. 그들에게 우리 사회는 무엇을 해주었는가. 별다르게 훌륭한 지원을 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이렇게 돌팔매질은 하지 말아야 하고, 그러다가 필요하면 이렇게 앞장서라고 부추기는 것은 또 무엇인가.

한 국회의원은 3월 21일 국회에서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을 주도하는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의 연간 회비가 9억 3600만원인데, 이에 대응하는 우리 정부 예산은 1년 평균 13억 7천만”이라며 “일본의 일개 시민단체와 우리 정부의 한해 관련 예산이 비슷하다는 게 부끄럽지 않느냐”고 추궁했다.

그런데 지난주 금요일 필자가 소속한 시민단체는 새로이 앞으로 1년을 투신할 자원 상근활동가의 1년 연봉을 마련하기 위한 후원의 밤을 개최하였다. 그 연봉이 얼마쯤 되는지 일반 시민들은 짐작할 수 있을까. 그 돈이 기껏 600만원이다.

그런 1일 호프집을 개최하면 단지 소문만을 듣고 와서 기꺼이 하루 맥주 몇 잔 값을 내는 사람은 거의 드문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거의 대부분 시민단체 기존 열성 회원들과 인간관계 때문에, 그들의 의지와 노력을 마음으로 공감하기 때문에 1년이면 몇 군데 시민단체들의 그런 행사에 찾아와서 약간의 후원금을 내고 몇 잔의 맥주를 함께 한다.

<조선일보> 3월 22일 [사설] 미국의 대북 핵정보 왜곡 여부 철저히 가려야
<동아일보> 3월 11일 [사설] 한국의 敵은 누구냐고 묻는 미국
<세계일보> 3월 21일 "고래잡이 허용을" "안 된다"


이렇게 어렵게 현상유지를 하면서 하는 그들의 활동은 어떤 것인가? 건설업자 개발론자 그리고 일부 언론의 비난을 받으면서 우리 환경을 지켜 자손 대대로 살만한 자연환경을 지키는 데에 그들이 있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각 기관이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것을 과거에는 온갖 탄압, 오늘날에는 온갖 압력을 무릅쓰고 감시하고 고발하는 데에 그들이 있다. 가정에서, 사회에서 물리적 폭력, 언어폭력, 성폭력에 시달린 여성들을 보호하는 데에도 또 그들이 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한반도 전체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노력에도 그들이 있다.

이 부분은 예를 들어 조금 자세히 살펴보자.

<동아일보>는 3월 11일 사설에서 미국의 하원 국제관계위원장이 북한 핵 청문회에서 한국의 대북(對北) 포용정책이 지나치다고 비판하고 “한국은 누가 적(敵)이고 누가 동지인지를 분명히 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 이런 발언이 한국 정부의 그동안의 북핵 및 대북한 정책이 잘못된 결과임을 카네기재단, <아시안 월 스트리트 저널> 등의 입장 표명을 인용해 지적하고 있다.

미국은 핵 확산을 막기 위해 대북 경제압력을 높이려는데 한국은 경협을 통해 북한을 부양하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공동의 가치로 추구하는 맹방인 한국과 미국이 신뢰의 토대가 흔들리지 않도록 정부는 좀더 분명한 입장을 보여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그리고 3월 21-22일 미국의 북핵 관련 정보가 조작된 것임이 드러났고 이에 대해 기사, 사설들이 나왔다. 맹방인 한미간 신뢰의 토대가 흔들리지 않으려면 누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신뢰관계란 어떤 것인가? 한국 정부에 그렇게 촉구한 그 언론은 과연 미국의 정보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져보지 못했는가? 그 언론은 어느 나라의 언론이며, 어느 나라를 떠나서 언론으로서의 제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미국의 대외정책이 정의와 진리를 추구하는지 아니면 미국의 국익을 우선하는지, 그 과정에서 과연 진실에 입각해서 정책이 입안되고 추진되는지를 한번쯤 생각은 해보는가? 이러한 세계 유일 초강대국의 한반도 정책을 감시하는 다윗 역할도 역시 시민단체의 소수 활동가들, 그리고 그들을 뒷받침하는 회원들이 하고 있다.

시민단체, 그 활동가와 회원들로서는 차라리 그런 거대한 힘에 대항하는 것은 마음이나 편하지, 평범한 일반 시민들의 생계문제, 교통편의 문제와 관련될 때에는 상당히 당혹스럽다. 부산에서, 서울에서 고속철도나 순환도로를 개설하는 데에서의 환경문제, 또 3월 20일 동해 바다에서 고래 포획 허용 여부를 놓고 상인들과 시민단체가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는 문제 등이 그 예이다.

시민단체의 건강한 발전에 필요한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단체들은 작은 실수들도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사회의 각종 이해관계에 초연해 있으면서 진실과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존재라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들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등불을 밝히고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나아가 이러한 존재가 최근에는 경제발전에도 긴요하다는 평가를 세계적으로 받고 있다. 후진국 시절 사회가 혼란스러울 때에는 가족 및 혈연관계가 개인을 지탱해주지만 선진국으로 되면서 점차 사회의 제도와 법질서가 자리 잡혀 감에 따라 그 제도를 틈새에서 보완해주는 사회단체들이 시장경제의 질서 유지에도 긴요하다는 것이다.

개인의 이익을 떠나 공공의 이익과 질서를 추구하는 그들이 있기에 시장경제가 부정과 부패, 혼돈과 무질서에 빠지지 않고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 시민단체와 그 네트워크가 ‘사회자본’으로 개념 규정되면서, 각종 ‘물적자본’ ‘인적자본’과 함께 경제발전의 긴요한 요소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재정적 근거를 의심하면서 시민단체의 도덕성을 훼손하려는 언론과 언론인들은 한 달에 1만원씩의 후원과 함께 하는 참여를 통해 시민단체의 도덕성을 지켜가는 것이 참으로 이 시대에 필요한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 <참언론 참소리>

참언론대구시민연대는 대구에서 처음으로 결성된 언론개혁운동단체다. 지역사회 민주주의가 안착되기 위해서는 법제도적 장치 마련과 더불어 지역사회를 정비하고 발전시킬 참언론의 존재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참언론 참소리>칼럼은 기존의 <참언론 대구시민연대 언론신경쓰기 칼럼>을 확대 개편했다. <참언론참소리>칼럼을 통해 개혁을 거부하고, 기득권층과 유착 그들만의 이해를 대변하는 언론의 그릇된 모습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사회 주요 이슈에 대한 올바른 해법을 제공할 예정이다. 

김재훈 기자는 참언론대구시민연대 공동대표입니다.

자세한 문의 : 053-423-4315 / www.chammal.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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