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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회암사터, 왼쪽에 초가집이 보인다. 산에는 나무가 없어 황량함이 더한 것 같다
1950년대 회암사터, 왼쪽에 초가집이 보인다. 산에는 나무가 없어 황량함이 더한 것 같다
회암사 영화의 중심에는 지공, 나옹, 무학, 보우 네 분의 스님이 있다. 회암사는 지공대사가 1328년에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는데 금나라 사신을 이곳으로 안내했다는 기록이 있고 태고보우는 1313년에 이 절에서 출가했다는 말이 있어 그 이전에 회암사는 창건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금나라 사신을 안내할 정도라면 작은 절은 아닐 것으로 추측되나, 태생을 알 수 없는 절로 받아들이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창건을 지공으로 돌리려는 의지가 강하다. 여하튼 실질적인 창건은 이 절에 아주 큰 공을 들인 지공에서 출발한다 할 수 있다.

지공의 제자인 나옹화상에 의해 거대사찰로 변모되고 무학대사와 이성계의 만남으로 이 절의 성격이 완전히 바뀐다. 그 후 불심이 깊은 문정왕후와 불교 중흥을 꿈꾸던 보우의 만남으로 중흥의 꽃이 피려고 하였으나 문정왕후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꽃은 피기도 전에 시들어 버린다. 이후 회암사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어 결국 폐사가 되는 운명을 맞게 된다.

회암사가 언제, 어떻게 폐사되었는지 정확하게 알려진 기록은 없다. 마지막 기록으로 1566년에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 한다"라는 말이 전하고 1595년엔 "회암사 옛터에 불탄 종이 있다"라는 기록이 있는 점을 감안하면 1566년과 1595년 사이에 유생들에 의해서이거나 임진왜란에 의해서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석재불두(출토유물), 회암사의 영화와 쇠락 모두를  담고 있는 듯하다(발굴사료전시장에서 촬영)
석재불두(출토유물), 회암사의 영화와 쇠락 모두를 담고 있는 듯하다(발굴사료전시장에서 촬영) ⓒ 김정봉
1595년에 '회암사가 옛터'로 기록된 점을 감안하면 임진왜란 이전에 폐사된 것으로 추측되고 발굴 시 알려진 사실에 따르면 불상을 깨트려 여기저기 흩어 놓았다고 하니 폐사의 원인을 고의적인 훼손으로 봐야 하기 때문에 불교에 불만을 가진 유생들에 의해서 불태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회암은 언제 창건되어 언제 폐사되었는지, 탄생과 죽음이 알려지지도 않은 채 영화의 불꽃을 피우고 쓸쓸히 꺼져 버린 절인 셈이다.

250년 정도 폐사된 채 더 당할 것도 없이 남아 있다가 또 다른 슬픈 일을 당하게 된다. 1821년(순조 21년) 회암사지 북쪽에 놓여 있던 지공, 나옹, 무학대사의 부도가 이응준에 의해 훼손되는 아픔을 겪게 된다.

이 일이 알려진 뒤 이응준은 유배길에 오르게 되고 훼손된 부도는 수습이 되어 지금의 회암사에 모셔지게 된다. 그때가 순조 28년(1828년)이다. 회암사는 회암사터에서 800여m 산으로 더 올라가야 한다. 회암사 오른쪽 언덕 소나무 밭에는 위에서부터 나옹, 지공, 무학의 부도와 부도비가 나란히 모셔져 있다. 회천면이 한눈에 들어오고 뒤로는 천보산의 바위가, 주변엔 늘씬한 소나무가 아름드리 뻗어 있다. 회암(檜岩)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노송과 바위가 한데 어우러진 예쁜 곳이다.

무학대사 부도와 쌍사자석등, 조선시대 부도 중 가장 아름다운 걸작으로 손꼽힌다
무학대사 부도와 쌍사자석등, 조선시대 부도 중 가장 아름다운 걸작으로 손꼽힌다 ⓒ 김정봉
회암사터를 둘러보기 전에 입구에 있는 발굴사료전시장에 전시된 유물을 보고 가면 도움이 된다. 이곳에서 유물에 관련된 자세한 설명도 들을 수 있다. 회암사터에 들어서면 일자로 길게 쌓인 석단과 기단 위에 덩그렇게 놓인 괘불대의 크기에 놀라게 되고 중간 정도에 서면 회암사터의 규모에 한 번 더 놀라게 된다.

회암사터 전경, 천보산을 배경으로 넓은 터에 아늑하게 자리하고 있다
회암사터 전경, 천보산을 배경으로 넓은 터에 아늑하게 자리하고 있다 ⓒ 김정봉
기단 마다 연이어 있는 소맷돌과 거기에 새겨진 태극무늬는 이 절이 보통 절이 아님을 잘 말해준다. 나옹을 보기 위해 앞다퉈 몰려든 아녀자와 보우가 개최한 무차대회에 참석한 평민들은 소맷돌을 권위의 상징물로 여겼을지 모른다. 불국사의 깔끔한 소맷돌이나 춘천 청평사의 질박한 소맷돌에서 느끼지 못한 어떤 권위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소맷돌의 태극무늬
소맷돌의 태극무늬 ⓒ 김정봉
소맷돌과 함께 이 절의 사세를 가늠할 수 있는 석물이 서쪽 끝에 있는 당간지주다. 절의 규모에 비하면 초라해 보이나 보통 절은 한 쌍인 데 비해 한 쌍은 짝을 잃었지만 두 쌍인 점이 특이하다. 원래 당간지주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절의 규모에 맞게 한 쌍씩 서로 다른 곳에 있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당간지주, 다른 절과 달리 두 쌍이 있는 것이 특이하다
당간지주, 다른 절과 달리 두 쌍이 있는 것이 특이하다 ⓒ 김정봉
회암사터는 여간해서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당간지주를 끼고 군부대 담장을 따라 오르면 산중턱 마루에 전망대가 있다. 그 나마 회암사터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내려가서 주춧돌에 서보고 멀리 부도 근처에도 가보고 싶은 욕구가 생기나 발굴은 또 하나의 훼손이라는 말이 생각나 카메라 망원렌즈로 구석구석 보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다.

회암사는 천보산 기슭의 경사면을 따라 계단식으로 8개의 단지를 조성하고 그 위에 건물을 배치한 가람이다. 조감도에서 제일 중심에 있고 가장 규모가 큰 건물이 보광전이고 그 바로 뒤에 설법전이 있으며 사리전과 정청(政廳)이 그 뒤를 잇고 있다. 남쪽으로는 보광전에 이르는 계단과 도로가 나 있다.

전망대에서 본 회암사터 전경
전망대에서 본 회암사터 전경 ⓒ 김정봉
조감도 맨 뒤쪽에 자리한 5동은 일반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가운데 정청이 있고 양쪽으로 건물이 붙어 있는데 조선시대 객사와 비슷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보광전 뒤쪽으로는 구들방이 마련된 요사채가 밀집되어 있는데 이 지역에서 청기와가 집중적으로 출토되어 왕의 행차 시 거주했던 공간으로 추측된다.

추정 복원 조감도, 가운데 가장 큰 건물이 보광전이고 그 뒤로 설법전, 사리전, 정청이 연이어 있다
추정 복원 조감도, 가운데 가장 큰 건물이 보광전이고 그 뒤로 설법전, 사리전, 정청이 연이어 있다 ⓒ 김정봉
발굴 터에 가깝게 접근하여 볼 수 있는 곳이 회암사터 동쪽 부분이다. 유물의 가치가 좀 떨어질지 몰라도 이 지역이 매력적인 이유는 여기에서 거대한 석조와 맷돌2기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서 생활자기가 집중적으로 출토되어 취사공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맷돌과 석조의 규모로 볼 때 여기서 감당했을 식사 양을 가늠할 수 있는데 동시에 2000명의 식사를 동시에 할 수 있었다 한다. 부엌 터의 규모가 보광전의 면적(24.9m × 21m, 넓이 523㎡ )과 거의 같은 35m×15m(525㎡)나 된다고 하니 가히 그럴 만도하겠다.

맷돌과 석조, 생활용구여서 그런지 다른 유물 보다 정이 간다
맷돌과 석조, 생활용구여서 그런지 다른 유물 보다 정이 간다 ⓒ 김정봉
석조 바로 옆에서 배수로의 흔적을 볼 수 있다. 회암사의 배수로 시설은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잘 되었다고 한다. 북서와 북동 방향으로 흐르는 계곡물을 절 안으로 끌어들여 지상으로 흐르게 하여 한국정원의 특징인 자연과의 조화를 꾀했고 보광전에 이르러서는 지하 배수로로 연결시켜 기능적 측면도 강조하였다.

배수로 흔적, 계곡 물을 끌어들여 절안으로 흐르게 하였고 보광전에 이르러서는 지하 배수로로 흐르게 하였다
배수로 흔적, 계곡 물을 끌어들여 절안으로 흐르게 하였고 보광전에 이르러서는 지하 배수로로 흐르게 하였다 ⓒ 김정봉
새소리, 물소리 대신 차소리와 사람들 소리가 들리고 계곡과 나무들 대신 아파트와 레미콘 공장 그리고 군부대가 보이긴 하지만 회암사터에 나 홀로 빠져 있으면 어느 강원도 산골 폐사지에 있는 착각도 생긴다. 회암사의 영화와 조락이 머릿속에 오버랩되면서 스쳐 간다.

당간지주 앞에는 나옹을 보기 위해 길이 막힐 정도로 모여드는 부녀자들의 모습이 보이고 보광전 앞에는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주최하고 있는 보우의 모습이, 정청 안에는 무학과 조선 태조가 만나 대화하는 모습이 보인다. 한쪽에선 맷돌 가는 소리, 달그락 설거지하는 소리 그리고 밥짓는 소리와 수로를 따라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보광전 앞에서는 '저 절을 불태우라'라고 외치는 유생들의 소리가 들리고 불상을 갈기갈기 토막내는 장면과 보광전이 불길에 휩싸이는 장면 등이 보인다.

이런 장면과 소리는 최근에 발굴 작업이 한창인 석물과 유물 하나하나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지난날의 영화는 사라지고 황폐함과 쓸쓸함만이 남아 있는 회암사터는 이제 하나씩 햇빛을 보고 부흥의 꿈을 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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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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