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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가야의 대탑에서 티베트식 오체투지를 드리는 사람들
보드가야의 대탑에서 티베트식 오체투지를 드리는 사람들 ⓒ 김남희
간단한 자기 소개 후 이곳에서 지켜야할 계율을 전달받았다. 이곳에서 금지되는 건 살생(모기도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한다), 도둑질, 거짓말, 성적 접촉, 술 담배 등의 약물, 그리고 음악과 노래와 춤. 열흘간 외출 금지며 수업과 토론 시간 외에는 철저한 침묵을 유지해야 한다.

아, 앞으로 난 모기도 못 죽이고, 음악도 듣지 못하고, 하고 싶은 말도 참아야 하고,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업을 걱정해야 하는 고난의 길에 자발적으로 들어선 셈이다.

저녁식사 후 릭샤를 타고 중국 절로 갔다. 티베트 불교의 4대 종파 중의 하나인 카규파의 수장인 카르마파가 보드가야에서 공개강의를 진행 중이라 앞으로 일주일간은 저녁 마다 강의를 들으러 나온다고 한다.

카르마파는 몇 년 전 티베트를 여행할 때 절에서 뵌 적이 있다. 그때는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깡마른 소년이었는데 그 직후 중국을 탈출해 인도로 넘어왔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는 살도 많이 올랐고 앳된 청년의 모습이 보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 나이로 스물 하나.

'환생'이라는 티베트 불교의 핵심을 이해하지도 믿지도 못하는 나이기에 저 어린 스님에게 한없는 경외감을 표하는 사람들이 잘 이해되지는 않는다.

영어로 통역된 강의는 우리가 집착하는 물질의 '상', 인식하는 바깥 세계, 그 모든 것이 마음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것, 객관적 실재라고 믿는 것들의 비실재성을 설명하고 있었다.

강의가 끝난 후 숙소로 돌아오니 창 밖으로는 늘어진 나뭇가지의 그림자, 그리고 방 안 가득 차오르는 풀벌레 울음소리.'이곳에 있는 것만으로 이미 마음에는 평화가 가득 차오른다.

2004년 12월 22일 수요일 흐림

카르마파의 법문을 듣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스님들
카르마파의 법문을 듣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스님들 ⓒ 김남희
아침 6시. 종이 울리며 하루가 시작됐다. 명상, 식사, 강의, 요가, 점심 먹고 토론, 다시 강의와 명상, 그리고 저녁. 저녁 식사 후 다시 이어지는 강의.

강의 시간에 일어났던 의문들.

'업의 개념이 결국 현실 세계에 대한 체념이나 긍정(계급 제도 등에 대한)을 야기하는 게 아닌가?'
'끝없이 인간으로 환생해 생을 다시 겪는다 해도 이미 예전의 내가 아니고, 과거를 기억하지도 못하는 한 모든 경험은 새로운 것이므로 그에게는 반복이나 윤회의 의미가 없는 게 아닌가?'
'마음에는 한계가 있는가?'
'마음과 이 모든 현상세계의 시작은 어디인가?'

저녁 먹고 다시 카르마파의 강의를 들으러 나갔다 돌아왔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법당에서 108배를 드렸다. 절을 마치고 난 후에는 명상을 하며 앉아 있었다. 이 고요한 밤에 혼자 법당에 앉아 있을 수 있어 얼마나 좋은가.

2004년 12월 23일 목요일 흐림

다시 새벽 6시.

무거운 몸을 끌고 아침 명상. 오전 강의를 듣다가 스님께 질문했다.

"한국 비구니 스님들 중에는 '다음 생에는 꼭 남자의 몸을 받아 태어나 성불을 이루겠다'는 말씀을 하는 분들이 있다. 실제로 승단에서도 비구니는 법락에 관계없이 1년 된 비구승에게도 예를 갖추고 공경을 표해야 하는 차별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비구니를 차별하는 전통은 불교계 일반에서 받아들여지는 전통인데 흥미롭게도 탄트라 불교에서는 여성을 차별하는 요소가 없다. 부처님 생존 당시의 시대 상황을 반영한 결과로 보수적이고 차별적인 계율이 불교에 남아있는 건 사실이다. 나 역시 승단의 비구니에 대한 차별적인 태도에는 의문을 가지고 있고, 개인적으로는 동의하지 않는다. 달라이 라마께서는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깨달음을 얻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전생이나 환생의 개념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토마(폴란드에서 온 그는 언제나 잔뜩 찌푸린 얼굴로 딴지 거는 식의 질문을 끊임없이 해댄다. 그런 그에게 '투덜이'라는 애칭을 붙여주기로 했다)의 질문에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느냐고 스님이 되물었다.

투덜이의 대답.

"물론 있다. 정신병원에서 일할 때 그런 사람을 많이 만났다."

어쩌면 이 진지한 시간에 저런 대답을, 저토록 진지하게 할 수 있는지. 스님께 또 물었다.

"만약 전생의 업으로 인해 동물로 태어났다면 다음 생을 위해 그들이 쌓을 수 있는 선한 업은 무엇인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은 특별한 축복이므로 감사히 여기고 좋은 업을 쌓아야 한다(다음 강의에서 스님은 길에서 거리에서 굶주리는 개와 이 절에 머물며 사랑을 받고 먹을 것을 충분히 보장 받는 개를 비교하며 후자의 개는 전생의 업이 끝나가는(Completing Karma) 과정이라고 했다)."

지금의 내 수준에서 종교로서의 불교, 믿음과 갈구의 대상인 신앙으로서의 불교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저 긍정적인 불교적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려 노력할 뿐.

티베트 불교 4대 종파 중 하나인 카규파의 수장인 카르마파. 달라이 라마에 이은 티베트 불교의 큰 스님이다.
티베트 불교 4대 종파 중 하나인 카규파의 수장인 카르마파. 달라이 라마에 이은 티베트 불교의 큰 스님이다. ⓒ 김남희
오후에는 위빠사나의 걷기 명상을 배웠다. 지금까지 배운 세 가지 명상 중 가장 마음에 든다. 발걸음을 옮기는 것을 의식하며 최대한 천천히 걸으며, 걷는 것에 집중하기. 무엇보다 육체적 고통이 없고, 집중도도 가장 높은 것 같다.

저녁 명상을 할 때 어깨와 다리의 통증이 너무나 심해 참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호흡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다리의 고통에만 집중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게다가 머릿속은 어쩌면 이렇게 널을 뛰듯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쉼 없이 건너다니는지….

잠깐 놓치면 어느새 딴 생각, 잠시 집중했다 싶으면 다시 또 잡념. 그런 나를 들여다보는 것도 재미있다. 어라, 1분을 못 넘기고 또 딴 생각이네. 다리가 아프다고 투덜거리다가 산에 갔던 생각, 산에서 내려와 먹었던 파전을 생각하다가 금세 엄마 생각,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궁금해 하다가 다시 집 생각에 친구들 생각. 내 머릿속이 이렇게 복잡하고 산만한 잡념의 덩어리일 줄이야.

2004년 12월 24일 금요일 흐림

이곳에서 새벽은 늘 빨리 찾아온다. 곤한 잠의 끝을 집요하게 흔드는 종소리. 온 마을을 덮는 안개처럼 조금씩 꿈의 끝자리를 잠식해 들어오는 새벽. 아침은 늘 흐릿한 회색빛으로 시작된다.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보리수 나무 아래서 카르마파의 법문을 듣는 스님들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보리수 나무 아래서 카르마파의 법문을 듣는 스님들 ⓒ 김남희
안개는 정찰 나온 척후병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순식간에 논밭을 감추고 마을을 덮어버린다. 옥상에서 아침을 먹으며 마을을 내려다보노라면 안개 사이로 숨은 논밭과 마을이 신비롭게까지 느껴진다. 고요한 평화로 가득한 성탄 전야의 아침이다.

오늘 오후 강의 시간에 투덜이가 또 시작했다.

"불교가 우울하고 염세적인 종교라는 비판을 들어보았는가?"

스님은 그건 불교를 잘못 해석하고 표면적으로만 받아들인 결과라고 대답했다. 가끔은 투덜이에게 가만가만 일러주고 싶다.

"나 역시 너처럼 의심이 많지만 때로는 질문에 시간을 갖고 답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려볼 필요도 있어"라고.

불교의 계율 중 살생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중절'에 관한 질문이 나왔다.

"강간으로 인한 임신이거나 산모의 생명이 위험한 경우에도 중절은 살인이므로 해서는 안 되는가?"라는. 마찬가지로 안락사에 대한 질문도 나왔다. 어려운 상황이기는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고통들이 업으로 인한 것이므로 안락사나 중절에 반대한다는 스님의 대답이 나는 불만족스러웠다.

독실한 가톨릭이라 장애아를 낳을 것을 알면서도 중절을 하지 않아 온 가족이 고통을 겪고 있는 동생의 회사 동료가 생각났다. 갑자기 왜 눈물이 났는지, 몰래 울었다. 한 번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인데 그 아픔이 너무 생생하게 다가왔다.

오늘 저녁 명상의 주제는 '죽음'이었다.

'죽음은 피할 수 없다. 다가오고 있고, 얼마 남지 않았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므로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자.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생각해 보라. 네 자신이 곧 죽는다고 생각해보자.'

너무도 고통스런 저녁 명상이었다. 스님의 안내대로 죽음에 대해 명상하는 내내 이 지독한 육체적 고통을 왜 겪어야 하는지, 명상 없이도 행복하게 잘 살아왔는데 왜 이 고생을 하나 회의가 가득 몰려왔다.

어제 동물로 태어나는 걸 생각해보라는 명상을 할 때도 그렇고, 오늘 죽음(엄마의 죽음을 생각해보았을 때)에 관한 명상 역시 유난히 고통이 심하다. 마음의 불편함이 육체로도 민감하게 전이되는 걸까?
요즘 몸과 마음이 다 예민해져 있는 것 같다. 이것 역시 명상의 효과인 걸까? 이 과정을 시작하기 전에 명상 시간에 졸지나 않을까 걱정했던 건 기우였다. 육체적 고통이 너무 심해 졸 틈도 없다.

등불이 밝혀진 밤의 대탑을 걷고 있는 티베탄 스님들
등불이 밝혀진 밤의 대탑을 걷고 있는 티베탄 스님들 ⓒ 김남희
성탄 전야의 저녁에 티베트 절에서 듣는 불교 강의. 오늘의 주제는 자비와 참을성, 친절과 관용.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돌리는 것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정신병자가 이상한 행동을 하면 화내지 못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마음의 병을 갖고 있는 환자라고 생각하고 화내거나 분노하지 말자.'

강의 끝에 카르마파가 성탄 전야에 이곳에 모인 사람들을 위해 작곡한 노래를 들려주었다. "세상에는 신처럼 노래 부르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지만 불행히도 나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으므로 티베탄 야크처럼 노래하겠다"며. "내가 작곡한 걸 읽지도 못하겠는데…"라며 떨리는 감정을 토로한 후 그가 불러준 노래. 그리고 성탄을 축하한다는 인사. 단순한 곡조가 마음에 스미는 아름다운 노래였다.

강의에서 돌아와 법당에서 108배를 올렸다. 어두운 법당에서 혼자 절을 올리고 침묵 속에 앉아 있는 이 소중한 시간. 법당에서 나와 불탑 주위를 돌다가 문득 성탄 전야임이 다시 생각났다.

"예수님, 이 세상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중얼거리는 나. 지금의 이 평화와 행복을 오래 간직하고 싶다.

2004년 12월 25일 토요일 흐림

성탄절이다. 2000년 전 팔레스타인 땅에 목수의 아들로 예수가 오신 날. 서른 셋의 나이에 세상을 구원하고 떠난 사람. 오늘따라 성탄의 의미가 새삼스럽다. 내가 또 다른 위대한 성인인 부처의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 이곳에 와 있기 때문일까.

아침 명상 시간에 선생님이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조용히 인사했다.
"얼마나 아름다운 크리스마스인가"라며. 이렇게 고요하고 평화로운 성탄의 아침을 맞은 적이 있던가. 세상 모든 존재들의 행복과 평안을 절로 갈구하게 되는 아침.

어제 저녁에 준비해 놓은 과자와 사탕, 귤, 차 등을 하나씩 그릇에 담아 모두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내가 이 세상에 있음을, 예수가 세상에 왔었음을, 부처가 왔었음을 기뻐하는 나의 작은 마음. 그 마음이 또 모두를 기쁘게 한다면 좋겠다.

씨를 받아 대를 이어온 보리수 나무에 바쳐진 꽃들
씨를 받아 대를 이어온 보리수 나무에 바쳐진 꽃들 ⓒ 김남희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던 스님이 죄 없는 순진한 어린 아이의 질병으로 인한 고통 역시 전생의 업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우리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과거의 업으로 인해 이 생에 고통을 당해야 한다면, 그것도 아직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은 어린아이가 그런 고통을 당해야 한다면 부당하지 않은가? 그럴 경우 지금 이 생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나의 질문에 스님이 대답했다.

"고통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것이며, 현재에만 일어날 수 있는 게 아니라 언제든지 닥쳐오는 것이므로 그것을 깨닫고, 지금 주어진 상황에서 깨달음을 얻도록 간구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라고.

미국인 소녀 니키가 물었다.

"불교에서는 다른 종교의 위대한 성인들, 마더 테레사처럼 남을 위해 평생을 바치고 봉사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보는가?"
"그들이 불자가 아니라 해도 역시 존경받고 존중해야 한다. 부처의 길만이 깨달음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다른 종교의 장점과 힘을 스스로 찾아보고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점심 시간에 침묵이 해제되었다. 다들 모여서 밥을 먹으며(게다가 크리스마스 특식이라고 반찬이 10가지 가까이 나왔다) 이야기를 나누는데 너무나 좋았다. 말도 오랜만에 하니까 이렇게 좋기도 하구나.

네덜란드에서 온 한스가 내게 물었다. 스테판 베츨러라는 유명한 학자가 있는데(다수의 불교 책 번역으로 유럽에서 꽤 알려진 인물이라고 한다) 그가 티베트 불교도였다가 나중에 한국불교에 귀의했단다.
그래서 자기도 선불교에 관심을 갖게 되어 일본에 가서 수행도 해봤는데, 한국 선불교의 특징은 뭐냐고 물었다. 뭐, 알아야 대답을 하지.

열흘의 명상 강좌가 열리는 루트 인스티튜트의 대법당
열흘의 명상 강좌가 열리는 루트 인스티튜트의 대법당 ⓒ 김남희
그러고 보니 나는 우리 불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티베트 절에 와서 티베트 불교를 배우고 있구나. 하지만 무슨 불교인가가 그리 중요한 걸까. 중요한 건 부처의 가르침을 내 삶에서 실천하려는 의지지. 그래도 돌아가면 한국불교에 대해서도 공부 좀 해야겠다. 아, 살수록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생각만 강해지고, 배우고 익혀야 할 것들은 엄청나게 늘어만 간다.

저녁 명상 시간에 드디어 졸았다. 오늘은 '업'에 대한 화두로 명상하는 시간이었는데 초반에 졸았다. 이제 제법 명상 자세가 익숙해졌다는 뜻인가? 졸기까지 하다니….

오늘 저녁 카르마파의 강의 내용.

'우리 자신이 장애나 고통을 창조한다. 가짜 총인 줄 모르고 공포에 모든 재산을 빼앗긴 사람의 이야기처럼 우리의 인생도 이와 같다. 우리 자신이 창조한 고통, 가짜인 현실에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만다. 우리가 현실을 직시하고 공포와 두려움을 들여다보면 우리에게 그것을 극복할 힘이 내재해 있음을 알게 된다.'

덧붙이는 글 | 2004년 12월 2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인도 보드가야의 명상센터에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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