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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구룡포 공원의 '일본인 공덕비'. 해방 후 비문을 시멘트로 발랐다.
포항 구룡포 공원의 '일본인 공덕비'. 해방 후 비문을 시멘트로 발랐다. ⓒ 추연만

'일본인 탑'의 뒷면. 탑의 재질은 화석이고 일본에서 가져 왔다고 함
'일본인 탑'의 뒷면. 탑의 재질은 화석이고 일본에서 가져 왔다고 함 ⓒ 추연만
이러한 구룡포 항의 정수리에 일제 때 항만건설에 몸담은 한 일본인 업자의 공로를 기리는 ‘공덕비’ 탑이 아직도 산등성이에 턱 버티고 있다. 이 탑은 구룡포 공원에 있다. 폭 1.5미터, 높이 5미터나 되는 탑신은 구룡포 항을 향하고 있다. 일본에서 건너온 자연석(나무화석(化石) 2기로 ‘ㅗ’자 형으로 세운 탑이다.

탑의 앞과 뒷면은 시멘트로 덧칠해 비문은 볼 수 없지만 보는 이들에게 예사로운 탑이 아닐 것이라고 금방 짐작하게끔 한다.

이 탑의 주인(?)은 누구일까? 왜 비문을 지웠을까? ‘ 일본 공덕비‘가 아직도 이 땅에 있단 말인가? 다른 곳도 아닌 호미곶 근처에!

일본 신사가 있던 자리로 오르는 길. 양 쪽으로 탑 건립에 후원한 사람들 비가 빽빽히 늘어 서 있다.
일본 신사가 있던 자리로 오르는 길. 양 쪽으로 탑 건립에 후원한 사람들 비가 빽빽히 늘어 서 있다. ⓒ 추연만
의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하게 찾을 수 있었다. 구룡포 공원은 일제 때 인본 신사(神社:일본 고유의 신을 모시는 곳)가 있던 자리였다. 그리고 인근에 사시는 80대 할아버지 네 분이 생생한 당시의 상황을 들려주셨다.

일제는 한반도 강점과 동시에 구룡포가 한 눈에 내려 보이는 명당(산)에 신사를 세워 일본인 뿐만 아니라 한국인도 참배토록 했다. 공원 근처에 사시는 서아무개(87세)씨 외 3명의 할아버지들은 “우리는 국민(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강제로 신사참배를 했다”고 증언했다.

일제 때 건립한 비를 해방 후에 또다시 사용했다
일제 때 건립한 비를 해방 후에 또다시 사용했다 ⓒ 추연만

비의 뒷면. 신사 조성 때 찬조금 낸  이름이 시멘트로 가리워져 있다.
비의 뒷면. 신사 조성 때 찬조금 낸 이름이 시멘트로 가리워져 있다. ⓒ 추연만
“해방되기 5, 6년 전에 일본인들이 신사 주변에 ‘공덕비‘와 ’일본 육군 기념비‘를 세웠고 신사조성 후원자 이름을 도리문(신사 입구 기둥 문) 앞, 양쪽 계단비석에 파 넣었다. 일본인 뿐 만 아니라 한국인 선주나 유지들도 많이 가담했지!”

일본 신사가 있던 자리에서 본 구룡포 전경
일본 신사가 있던 자리에서 본 구룡포 전경 ⓒ 추연만

신사가 있던 자리에 지금은 용왕당이 있다.
신사가 있던 자리에 지금은 용왕당이 있다. ⓒ 추연만
그 시절, 할아버지들의 나이는 20대 전후. 아직도 기억이 뚜렷하다.

“저 탑은 구룡포 항 개발업체 회장인 ‘도가와 미사부로(十河彊三部) 공덕비‘다. 비석 앞면에는 이 일본인의 이름이 뚜렷하게 들어 간 것을 본 적이 있어. 그리고 현재 충혼탑이 있는 곳에는 ’일본 육군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지.”

'대정 6년' '부동명왕' 이란 글이 보임. 구룡포 거주 일본인 신사 앞에 있던 것이라 한다..
'대정 6년' '부동명왕' 이란 글이 보임. 구룡포 거주 일본인 신사 앞에 있던 것이라 한다.. ⓒ 추연만
당시는 일제가 신사참배와 더불어 각종 기념일을 만들어 한국인들에게 강요하는 등 극성스런 황민화정책으로 조선민족 정신말살에 혈안이 된 때다.

할아버지들이 언급한 일본 육군 기념일(3월 10일 : 일본군의 중국 봉천 입성일)이 1938년에 제정되고 그 후 본격적인 창씨개명 작업이 전국적으로 진행된 역사를 더듬어 보니, 구룡포에서 자행한 일본인 만행이 단지, 한 지역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누가 왜, 탑과 비석에 시멘트를 덧칠 했습니까?” 질문을 하자, 네 분 할아버지들 사이에 약간의 긴장감이 돈다.

“저 양반이 시멘트를 발랐어. 비석을 몽땅 뽑아버리든지 아니면 그냥 놔뒀으면 후세에 제대로 된 친일청산을 했을 텐데”라고 혀를 차시며 서아무개 할아버지를 쳐다보신다.

“이 양반아! 해방이 되어 동네 청년들이 밧줄을 걸어 신사의 도리문을 부수고 시멘트로 왜놈 이름을 없앤 것이 잘못이냐? 당시에는 애국심으로 했어! 그런데, 오늘날까지 탑이 저렇게 흉하게 서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일제때 세운 탑 기단 위에 세운 충혼탑<원 비석은 일본 육군 기념일(3월 10일.일본군이 중국 봉천에 입성한 날)비>
일제때 세운 탑 기단 위에 세운 충혼탑<원 비석은 일본 육군 기념일(3월 10일.일본군이 중국 봉천에 입성한 날)비> ⓒ 추연만

시멘트로 덧칠한 기단부를 파헤쳐 보니 일본 글씨가 보인다
시멘트로 덧칠한 기단부를 파헤쳐 보니 일본 글씨가 보인다 ⓒ 추연만
할아버지들의 신경전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역사바로세우기에 대한 또 다른 각성을 촉구하는 채찍질로 다가온다. 친일잔재는 도처에 깔려 있다.

관련기관들 공적비 존재 알았으나 방치상태

포항시의 문화 관련 기관들이 구룡포 공원안에 ‘공적비’ 존재를 알면서도 지금까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포항시 관광과 관계자는 “구룡포공원이 일본 신사 자리고탑이 일본인 공적비란 것도 알고 있다”며 “그러나, 구룡포 공원부지가 ‘적산토지’로 분류돼 포항시가 제대로 관리 못했다. 좀 더 실태파악을 한 후 대책수립에 노력하겠다”고 답했다.

포항시청 홈페이지에는 ‘구룡포 개척자 유공탑’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포항문화원 관계자는 ”공덕비의 존재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역사적 기록으로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예산도 많지 않다“며 "공덕비와 관련 된 별도의 대책은 계획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 비석이 뭔지 알 수있는 표지판조차 없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하자 “검토해 보겠다”고 답했다.

작년 12월 말에 ‘탑 주인공(?)’의 후손 30여명이 탑 앞에 경배했다 한다.

“기자 양반, 저 탑과 비석에 새겨진 글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할아버지, 친일 극복의 마음을 모으면 방법은 찾을 수 있겠지요.

“우리 민족의 앞날을 위해 저 탑은 철거해야 해! 시멘트 칠한 장본인으로서 비문을 꼭, 보고 싶네. 그래야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거야.

87세 할아버지께서 반드시 연락하라고 전화번호를 적어 주신다.

덧붙이는 글 | '지역 사회와 역사 바로세우기'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신 분들과 공동으로 연속 기사를 쓸 예정입니다. 관련 정보를 가지신 분은 연락 바랍니다. 016-815-2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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