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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오랜 경력을 갖진 못했지만, 제 생각에 변호사는 고통을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채권관계든, 원한관계든 억울함의 마지막 해소 처로 사람들은 변호사를 찾기 때문입니다. 의뢰인의 사연은 그야말로 구구절절합니다.

모든 경우에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의뢰인들의 절절한 아픔이 고스란히 변호사에게 전이되는 사건들이 있습니다. 소위 시국사건이라 불리는 민주화 운동관련 국가보안법 사건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개인의 사사로운 이해를 버리고, 민주화를 위해 외로운 가시밭길 감옥행을 주저하지 않는 이들이야말로 의인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감옥행 입구에서 항상 함께 고통과 희생을 나누면서 무자비한 수사관들과 싸우고, 냉혹한 판사들 앞에서 피고인의 정의로움을 소리 높여 외치는 변호사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 변호사들이 1988년 범국민적 민주화 운동의 성과를 통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을 만들었습니다.

살아있는 민주화 운동의 역사라고 할 이돈명, 한승헌 변호사님을 비롯하여 이제는 고인이 되신 유현석, 조영래, 황인철 변호사님 등 수많은 존경스런 의인들이 민변의 회원들입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민주화운동에 뼈를 묻겠다고 결심을 굳힌 저도 변호사 개업신고보다 민변 가입신청을 먼저 하였습니다.

“범죄행위를 합의로 봉합하겠다고?”

그러나 국가보안법의 존폐를 둘러싼 홍역이 온 세상을 뒤흔들고, 꿈속에라도 다시 떠오를까 두려운 고문의 기억을 뼈 속 깊이 새기고 있는 고문피해자들까지도 잔혹한 고문진상을 다시 까밝혀야만 했던 2004년의 끝자락에 서서 저는 민변회원이란 이름이 너무도 부끄럽습니다.

국가보안법 존폐논란의 한가운데에 서 있으면서, 국가보안법으로 가위눌린 우리사회의 참담한 억압의 굴레를 끊어낼 열쇠를 양손에 거머쥐고도 끊임없이 무책임하고, 수준 낮은 정치행태를 보여 온 국회의원들, 열린우리당의 지도부라는 국회의원들 중 상당수가 민변출신이기 때문입니다. 민변은 창립 당시부터 국가보안법의 위헌성, 구시대적·구조적 인권침해 소지를 지적했으나, 항상 민주화 운동세력의 수적 열세, 역량부족으로 인해 국가보안법 폐지는 난망한 과제였습니다.

그런데 국가보안법 폐지를 비롯한 과거청산과 개혁을 전면에 내건 열린우리당이 과반수를 넘는 다수당이 된 지금, 그 열린우리당의 지도부에 수십년 동안 민주화운동을 함께 해온 민변의 변호사 출신들이 포진해 있는 지금, 국가보안법의 명줄을 끊는데 가장 큰 장애물은 다름 아닌 열린우리당의 반개혁적·기회주의적 행태입니다.

국가보안법의 문제를 한나라당과의 4자회담에서 ‘합의처리’하겠다고요? 한나라당의 뿌리는 국가보안법으로 기득권을 유지해온 구시대세력입니다. 그들은 민주화운동과 인권에 대한 가해자입니다. 국가보안법의 피해자는 민주화 운동세력을 비롯하여 반공주의와 군사주의로 억눌려 생활에온 전체 국민입니다. 국가보안법의 폐지문제는 이 가해자와 피해자들 간의 문제입니다.

국가보안법 문제를 ‘합의처리’하겠다는 것은 고문가해자와 그 피해자 사이에서 그 과거의 해결을 ‘합의’를 통해 처리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가해행위는 범죄행위입니다.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법에 따른 엄정한 처벌만이 있을 뿐 피해자와의 화해로 사태를 봉합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가보안법 가해자들과 ‘합의’는 56년 동안의 피와 땀에 젖은 희생을 무참히 짓밟는 것이며, 칼바람이 온몸을 찌르는 여의도 아스발트 위에서 수십일 째 분투하는 1300여명 단식농성단의 애절한 호소를 냉혹하게 외면하는 것입니다. 4자회담을 통해 국가보안법 폐지는 물론, 부분적인 개정이라도 이뤄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말 순진하고 바보 같은 착각입니다.

한나라당은 지금 국가보안법 개정안이 있다며 열린우리당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들이지만 여기에 말려드는 순간 그들은 그 개정안마저 변질시켜 결국 국가보안법의 존치 또는 아무런 의미 없는 부분 개정으로 몰고 갈 것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한나라당의 손짓에 미혹되어 늪으로 빠져드는 열린우리당의 지도부가 민변 출신이란 사실이 한없이 부끄럽습니다.

"박승환 의원이 같은 민변소속임이 부끄럽다“

민변회원 자격이 부끄러운 또 하나의 이유는 한나라당의 민변회원 박승환의원 때문입니다. 그는 국가보안법으로 뜨거운 공방이 진행되는 가운데 열린우리당 이철우 의원을 ‘간첩’이라고 지목했고, ‘공개적으로 전향’하라고 국민 앞에서 주장했습니다. 그 속내가 색깔론을 통해 사람들의 반공주의를 자극하려는 것임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이 발언을 통해 이철우 의원과 그의 가족이 받았을 고통을 그는 한번이라도 생각해봤을까요.

이철우 의원 본인은 당시 사건이 안기부의 고문에 의해 조작되었고, 그 수사책임자가 한나라당의 정형근 의원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철우 사건 당시 그의 어린 딸은 아무것도 모른 채 빨갱이 간첩의 딸로 낙인찍혀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철우 의원이 지난 총선에 출마했을 때도 바로 그 사건이 최대 쟁점이 되어 가족들은 십여 년 전의 고통스런 시간을 다시 경험해야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철우 의원은 사면 복권되었고, 과거의 전력도 선거를 통해 완전히 평가받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다시 ‘간첩’임을 고백하고, ‘공개적으로 전향’하라니요.

‘전향’은 인간의 양심을 무자비하게 난도질하는 야만행위이며, 그래서 법무부에서도 지금은 전향서는 물론 준법서약서도 쓰지 못하도록 방침을 바꾸었습니다. 박 의원의 발언은 면책특권의 범위를 넘는 범죄행위이며, 명백한 인권침해 행위입니다. 민변은 사회의 민주화와 함께 인권옹호를 절대적 과제로 삼고 있는 변호사들의 모임입니다. 그런 민변의 회원임을 내세우면서 스스로 인권을 무참히 짓밟는 행각을 벌이다니요.

이렇게 민변회원임이 부끄러워 단식에 돌입합니다. 수십일 동안 차가운 도로 위를 지키는 1300여 단식농성단에게 항상 죄송스러웠던 부담을 손톱만큼이라도 덜기 위해 저도 오늘부터 단식에 들어갑니다. 열린우리당 지도부가 ‘4자회담 파기’를 선언하더라도 저는 더 이상 믿을 수가 없으므로 이들을 규탄하는 항의 농성에 들어가겠습니다. 당론으로 국가보안법 폐지를 정해놓고도 지금까지 자중지란에 빠져 뭐하나 제대로 한 것도 없으면서도 ‘믿어 달라’는 그들을 이제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단식으로 항의하면서 한나라당 박승환의원의 반인권적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어 민변총회를 통해 그의 제명을 결의하도록 할 것입니다. 그것만이 이철우 의원과 가족, 그리고 같은 고통을 받은 수많은 고문과 학살피해자들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는 것일 것입니다. 그것만이 고통을 먹고 사는 변호사로서 이제 그 고통을 나의 것으로 승화시키는 길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국가보안법은 완전히 폐지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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