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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가 공공근로 나가셨다고요? 동사무소에서 연락은 왔나요?"

한국빈곤문제연구소 간사는 쉬지 않고 전화상담을 하고 있었다. 서울 개포동에 있는 사무실은 고맙게도 한 종교단체에서 절반을 뚝 잘라 내준 곳인데, 그 이름에 걸맞게(!) 옹색하기만 했다.

류정순(55) 소장은 막 한 방송사와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조만간 정부의 최저생계비 관련 발표가 있을 예정이라 세간에서는 류 소장의 의견이 궁금한 모양이다.

"현실성 없는 인상은 정말 무의미한 거 아닙니까?"

류 소장은 내일도 역시 집회에 나가 정부에 최소한의 생계비 인상을 촉구할 것이다. 정부 예산에 맞춘 최저 생계비 인상폭을 이미 예상한 탓인지 그의 얼굴에는 실망의 빛이 역력했다. 그는 최근 자신이 수도요금을 5000원 감면받은 사건으로 얘기를 시작했다.

"제가 단수단전에 반대해서 수도요금을 석 달간 안 냈거든요. 그랬더니 이번에 5000원을 감면해 준다고 하네요. 나 원 참."

전기요금과 수도요금을 연체했다는 이유로 전국의 80만 가구에 대해 단전과 단수 조치를 해버린 정부에 항의하고자 했지만 결과가 우습게 돼버린 것이다.

"정부의 빈곤 실태에 대한 모니터링이 안 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사회복지사를 파견해서 직접 상담을 해보면 단전단수를 그렇게 쉽게 할 수 없을 겁니다. 대상에 맞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누누이 주장하는데…. 해결방안이란 게 일괄적 감면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빈곤은 생존에 관한 문제

그는 요즘 공공기관의 화두가 비용절감인데, 인건비를 줄이려고 모든 일을 전산처리하고 마니 이런 일이 생기는 거라고 설명을 덧붙인다.

"빈곤은 사람의 생존에 관한 문제이거든요. 아무리 작은 정부를 내세우고 효율적인 운영도 좋지만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할 데가 있는 겁니다. 요즘 가난한 사람은 세금도 못 내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요. 시스템이 그래요. 자동납부도 은행 잔고가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창구에서는 받아 주지도 않고 무슨 기계로 내라고 하니. 가난한 이들은 정보인지 능력도, 정보해석 능력도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자신을 대변할 능력이 미약한 이들을 위해 일하는 게 우리의 몫이지요."

류 소장이 빈곤상담연구소 활동을 시작한 것은 지난 2000년 10월이다. 그전에는 참여연대의 기초생활보장법 제정운동에 참여했다. 전국을 다니며 각 단체들이 운동에 동참하기를 촉구하고 빈민지역에 제도의 존재를 알리는 일이 주 임무였다. 제도가 시행되면서 그는 할 일을 마쳤다고 생각했지만 그때부터 사실 그의 일이 시작되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에게 전화 문의가 쇄도했다. 자신은 해당이 되느냐, 얼마만큼의 혜택을 받게 되는지 알고 싶다, 등등 빈곤한 사람들의 궁금증이 그를 집에 가만있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등 떠밀려 시작한 거지요, 하하하. 향린교회 사무실에서 책상 하나를 얻어 시작해서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고, 지금은 강남 평화의집 옆에 살고 있습니다. 아직 우리 힘으로 임대료를 부담할 정도가 못 됩니다."

빈곤문제연구소에서 지난 석 달간 상담한 건수만 해도 200여 건에 달한다. 외환위기 때보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의 골이 더 깊은 요즘의 형편을 류 소장은 실감한다.

"전에는 최하층 빈민들이 상담을 많이 해왔지요. 복지의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이지요. 구제건수 비율이 높을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요새는 차상위 계층 사람들의 상담이 많아요. 알고 보면 제도가 꽤 있습니다. 모자가장기금, 경로연금, 여성가장 고용촉진기금 등등. 사람들은 자기가 해당되는 줄도 모르고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몰라서 아예 도움을 구하지 않아요. 또 당당하게 자기권리를 주장하려 하지도 않고요. 자격지심이나 낙인 효과 때문인 것 같아요."

류 소장이 '강성'인 이유

연구소 활동이란 것이 여러 단체와 연대하여 일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수밖에 없는데 류 소장은 자주 자신이 가장 강성의 목소리를 내는 것에 대해 스스로 놀란다고 고백한다.

"누군가 제게 '빈민은 하도 가난해서 중산층에게 대표자 자리를 빼앗겨 당신 같은 이가 대표자인 양 나서느냐' 그래요. 진짜 맞는 얘기예요. 빈민운동일수록 당사자 운동이 돼야 하거든요. 이번 최저생계비 결정문제도 빈민 당사자가 나서서 그 처지를 설득력 있게 얘기해야 하는데, 그런 여건이 안 되고 있지요. 당사자 그룹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하고 그런 역할을 비정부기구가 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이거든요. 그러다 보니 목소리가 제일 높아지는 것 같아요."

류 소장은 전형적인 활동가 타입이 아니다. 그저 고운 마음씨로 이웃의 얘기를 편안하게 들어줄 넉넉한 인상의 사람이다. 그가 왜 빈곤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일을 시작한 것일까. 그의 마음 속에 남아 있는 가난에 대한 체험은 남다르다.

"신혼 초에 아주 가난했어요. 중랑교 다리 옆 하천부지에 살았어요. 물지게로 물을 져 날랐는데, 정작 부엌바닥에는 늘 물이 고여 있어 바가지로 물을 퍼내야 했지요. 연탄 아궁이 아래서 물이 끓고 있을 정도였어요."

옛날을 떠올리는 그의 눈가에 언뜻 물기가 비치는 듯했다. 개발 과정에서 기회가 생기는 법이라 그 자신의 고생은 그리 길게 가지는 않았단다. 하지만 이후 두고 온 이웃에 대한 미안함이 늘 가슴에 남아 있었다. 언제고 그들을 위해 일하리라 그는 다짐했다. 그렇게 해야 사람값을 하는 거다 싶어서다. 그런데 요즘엔 자신의 '내공'이 점점 떨어지는 것 같다고 한다.

"전에는 종일 노숙인 상담을 하고, 지하철역에서 전망이 근사하다고 자랑하는 아파트 광고를 보잖아요. 그럼 울컥 감정이 치솟는 거지요. 그래 너희들은 잘났구나 하는. 노숙인의 감정이입이 되는 나 자신을 느꼈는데, 현장에서 어려운 사람들과 접해 보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마음이지요. 그런데 요즘엔 그런 게 덜해요."

5년간, 최저생계비가 오히려 줄었다

사실 류 소장은 고등학교 시절 동아리 활동을 통해 도산 안창호 선생의 정신을 접하고 사회개혁과 사회문제에 대한 인식을 키웠다. 그는 이야기하면서 자주 도표를 그리고 정확한 수치를 내세우며 설명하였다. 그의 강의를 따라잡기가 역부족인 탓에 나는 자주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막힘없이 경제학 강의를 해나가는 데는 그의 교육적인 배경이 있었다. 결혼 후에 지사 근무를 하는 남편을 따라 뉴욕에 갔다. 그는 '간 김에' 회계사 공부를 했고, 훗날 공부를 더 해 소비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실 제가 두루 공부한 것에 대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지 분야만 파고 있으면 보지 못할 것들을 볼 수 있는 것 같아서요."

류 소장이 연구소 창립 총회 때 한 유명한 말이 있다.

"기초생활비 수급자도 오페라를 즐길 수 있을 정도의 사회 만들기가 내 활동목표다."

대단한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 나올 수 있는 말이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의 경제규모와 비교해서 사회복지 수준이 턱없이 낮은 것이 사실입니다. 현재 수준에서 세 배 이상으로 올리는 게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사회복지에 관한 우리의 의식이 어느 정도까지 올라가느냐 하는 것이지요."

이제 한국빈곤문제연구소가 설립 5년을 맞이하였다. 그동안의 성과에 대한 해석은 냉정하다.

"총체적으로는 보람이 없다고 할 수 있지요. 최저생계비가 오히려 줄어들었으니까요. 1989년에는 소비지출의 58.4%를 차지했는데 지금은 48%로 줄어들었어요. 빈민 측이 정부 측에 진 것이지요. 성적표가 아주 나빠요. 기초생활비 수급자만 해도 2000년 10월에 154만 명이었는데 140만 명으로 줄었지요."

그와 헤어져 오는 길에 연구소 옆 동네의 타워팰리스가 눈에 들어왔다. 부자들이 모여 산다는 그 높은 건물의 은은하고 부드러운 불빛이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인간다운 품위를 지키며 살 수 있게 보장해 주는 어느 나라의 제도가 부러울 뿐이었다. 이 땅에도 언젠가 그런 날이 오겠지, 그날을 위해 류 소장은 하루하루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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