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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
위의 역설을 자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아킬레스가 거북이보다 10배 빠르고 거북이 100m 뒤에서 출발해 거북이를 따라 잡는 것으로 가정한다. 아킬레스가 100m를 달려가서 거북이가 있던 자리에 오게 되면 그동안 거북이는 100m의 10분의 1지점인 10m 만큼 앞서 있게 된다.

아킬레스가 또 10m를 달려가서 거북이가 있던 자리에 오게 되면 그 사이에 거북이는 10m의 10분의 1인 1m 만큼 전진해 있다. 이렇게 계속하면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기는 하지만 거북이는 아킬레스보다 언제나 조금 앞에 있다.

따라서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추월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제논의 패러독스는 나아가 시간과 공간이 무한히 분할될 수 있다는 그 시대의 공간과 시간에 대한 이해와 가정으로는 아예 운동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추론하였다.

따라서 공간과 시간을 분할된 영역의 총화로 이해하고, 움직임은 불연속의 조합이라고 믿었던 당시의 수학과는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사회는 이를 궤변으로 치부했다. 동시대의 대표적 사상가인 아리스토텔레스도 제논의 논증을 궤변으로 낙인찍어 버렸다.

제논
제논
제논은 그 사회의 이단아로 치부됐고, 그의 치열하고도 위대한 사유는 무시되고 조롱받았다. 제논의 역설을 이해하고 해결하는 데는 무려 2500년이 필요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궤변으로 낙인찍은 후로 진드기처럼 각 시대 수학자들의 무의식과 의식을 괴롭혀오던 제논의 역설은 코시와 칸토의 수렴이론과 무한론에 의해 논리에 결함이 있다는 것이 증명됐다.

당시 사람들은 제논의 역설이 분명히 틀렸음을 알면서도 이를 논리적으로 반박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무한급수에 대한 수렴 이론의 발달과 무한에 대한 칸토의 연구가 이 역설이 지닌 논리적 결함을 분명히 제시했다.

여기 등장한 수렴이란 개념은 양의 정수의 무한 합은 무한히 발산 할 것이라는 전 시대의 예측과 상식의 틀을 깨고 위의 역설과 같이 비율로 변하는 무한급수의 합은 유한하다는 것이다. 이는 전시대의 수학 통념을 깨는 통렬한 쾌거였다.

위의 역설의 경우에는 거북이는 처음 10m, 다음 1m, 그 다음 1/10m, 그 다음 1/100m…. 이렇게 무한이 간다 해도 이 무한 급수의 합은 유한하며 그 합은 100/9m가 된다. 그러므로 아킬레스는 100/9m를 달리게 되면 거북이를 따라 잡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제논의 역설은 무한급수의 수렴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그 긴 세월 어둠의 미로에서 빛을 찾게 된 것이다.

위대한 철학자며 사상가이며 치열한 논리의 사내인 고대 그리스 엘레아의 제논(Zenon 490-429 BC)은 위의 예 외에도 당시 반박하기 어려운 여러 역설을 제안해 동시대의 상식에 도전했으며 많은 사람을 당혹하게 하였다.

이러한 역설이 얼마나 당혹스러웠던지 왕에게까지 미움을 받아 무참히 처형되었다고 한다. 처형 당시 그는 형장에서 마지막으로 왕에게 전해야 할 중대한 비밀이 있는 것처럼 해 왕에게 접근해서 왕의 귀를 물어뜯었는데, 호위 병사가 그의 목을 자른 뒤에도 그의 목이 왕의 귀를 물고 있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이 있다.

제논이 사형 언도를 받자 왕에게 책을 주면서 책 속에 중요한 비밀이 담겨 있으니 왕이 직접 읽어 보라고 했다. 왕은 책을 받아 책장을 넘겼으나 책장이 밀착되어 있어 한 장씩 잘 넘길 수가 없었다. 흔히 우리가 책을 넘길 때처럼 손가락에 침을 묻혀 책장을 다 넘겨도 거기엔 아무 내용도 없었다.

이 때 사형장에서 왕을 지켜보고 있던 제논은 왕에게 "나를 처형하는 왕! 당신도 그 책장마다 묻은 은독이 곧 몸에 퍼져 죽게 될 것이다"고 저주하며 죽어갔다고도 한다.

칸토
칸토
무한론을 정립한 칸토는 상식으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자연수와 유리수의 무한의 크기는 같다는 것을 '유리수의 가부번성에 대한 대각화 증명'이라는 단순하고도 명증한 방법으로 증명했다.

나아가서 자연수와 유리수의 무한과 실수의 무한의 크기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즉, 실수가 자연수보다 훨씬 큰 무한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연속체 가설을 제안하여 무한에는 여러 단계가 있으며 이를 알레프의 기수라 이름 하고 알레프 간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가설을 증명하고자 헌신하였다.

그러나 이 가설은 자신을 속박하는 굴레가 되었으며 또 다른 역설과 모순의 씨앗으로 남게 되었다. 제논의 역설을 궤변의 수준에서 무한론으로 극복하였던 칸토(Georg Cantor 1845-1918)는 무한의 차원(알레프의 기수)이란 늪에서 헤매다 독일의 산업도시 할레의 정신병원에서 1918 년 1월 6일 정신병을 치료하던 중 사망했다.

지금 할레에는 무덤도 유골도 없이 한 위대한 수학자의 묘비만 외로이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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