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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전쟁이 1592년 4월 13일에 발발하자 박홍(朴泓)의 경상 좌수영군은 전혀 저항도 하지 않은 채 붕괴되었다. 일본 수군은 조선 남해안의 여러 섬과 포구를 장악하고 거제도 쪽으로 진출하였다. 일본군은 내륙 지방으로 단숨에 진격해 들어가며 노략질을 일삼았다.

이런 육군을 돕기 위해서 일본 수군의 대 함대는 전라도 남해를 돌아 서해로 나와서 평양에서 일본 육군과 합류하려는 작전이었다.

임진년(1592년) 4월 15일, 전라 좌수사 이순신은 경상 수군절도사 원균(元均)으로부터 일본군 함선 내습의 급보를 알리는 공문을 접했다.

“이달 13일 신시申時(오후 3시에서 6시) 경 왜선 몇 십척인지 대략 보이는 것만도 90여척이 본토(일본)를 나와서 경상좌도의 추이도를 지나 부산포를 향하여 연달아 나온다. 까마득하여 그 척수를 상세히 헤아려 볼 수 없으나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첨사로서는 방략에 의거하여 부산과 다대포의 우요격장(右邀擊將)에게 군사와 전선(戰船)을 정비하여 바다로 나가 사변에 대비하겠다.”

이순신은 왜적의 침략 소식과 부산포가 4월 14일에 함락되었다는 첩보를 접하고 즉시 전선을 정비하고 방어와 전투 태세를 갖추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이어 16일에 경상도 관찰사 김수(金睟)로부터도 공문을 접했다.

“이달 13일 왜선 400여척이 부산포 건너편에 와서 정박하였는데 적의 세력이 벌써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극히 염려스러우니 차례로 통문을 내서 사변에 대처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 무렵 이순신은 불과 24척의 전선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이순신은 분하고 원통한 심정을 담아 조정에 장계를 보냈다. 그리고 각도의 병마절도사에게 빨리 알려 새로운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철저한 임전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는 점점 좋지 못한 전황 소식만 전해지고 있었다.

17일에는 영남 우병사 김성일(金誠一)로부터 공문을 접했다.

“왜적이 부산을 침범한 후, 눌러 머무르면서 물러가지 않는다.”

이어 18일에는 경상 우수사 원균의 공문을 접했다.

“동래가 무너졌고, 양산 및 울산의 두 원도 입성하였다가 모두 패하였다.”

이순신이 <난중일기> 4월 18일 자신의 심정을 남긴 기록이다.

“분통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더욱 더 분통하다.”

지금 당장이라도 경상도를 향하여 출진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심경을 피력하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도 이순신은 영내에 가만히 앉아 있지 않았다. 각 포구를 직접 돌아보면서 무기를 점검하며 방비에 전념하였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임진장초>를 바탕으로 정리해 보자

2월 8일 거북선에 사용할 범포(帆布) 29필을 받는다.
3월 27일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을 시험한다.
4월 12일 거북선에서 지·현자총통 시험 발사한다.
4월 15일 경사우수사 원균에게서 일본군이 침략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4월 17일 적의 정보를 전해 듣고, 잉번(仍番), 상번(上番) 수군들이 속속 도착한다.
4월 18일 군관 나대용(羅大用)을 발포 권관(鉢浦權管) 대리로 정해 보낸다.
4월 19일 신병 700여 명이 본영에 도착한다.
4월 21일 순천 부사가 와서 약속을 정하고 돌아갔다.
4월 22일 배응록, 송일성 등 군관을 보내 정찰 활동을 펼친다.


이순신의 전라 좌수영은 첫 출전 날인 5월 4일 이전까지는 20여일의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병력 모집, 병기 점검, 함대 집결 약속, 정찰 활동 강화 등 긴요한 조처를 취하고 있었다.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은 거제에 머물며 일본 수군의 동태를 살피며 대항하였지만 모두 흩어지고 전선 73척 중 4척만 남는 형편이 되었다. 그리고 옥포 만호 이운룡과 영등포 만호 우치적과 함께 남해현 앞바다에 머물러 있던 경상 우수사 원균은 육지로 피할 예정이었다.

그러자 옥포 만호 이운룡이 만류하며 말했다.

“공으로 하여금 나라의 중임을 임금께서 맡긴 것은 의(儀)를 위하여 마땅히 죽어야 할 때에 수임지에서 죽게 함인 줄로 아뢰오. 이곳은 전라도, 충청도, 양 지방에 이르는 바다 길목의 요지라 만일에 이곳을 잃는다면 곧 양 지방이 위태로울 것이오. 이제 우리 수군의 군사들이 비록 해산하였다 할지라도 아직도 다시 모아 경내를 보위할 수 있사오니 전라 좌수영의 구원을 청하는 것이 옳은 처사오이다.”

비로소 경상 우수사 원균은 이를 옳게 여기고 율포 만호 이영남을 시켜 전라 좌수사 이순신에게 원군을 청하였다.

이순신은 경상 좌수사 원균의 다섯, 여섯번의 구원 요청에도 불구하고 즉시 출동하지 않았다. 일본군이 계속하여 동래, 양산 등 내륙 지방으로 전진해 오고 있다는 통보가 연이어 들어왔다.

이순신은 휘하의 장수를 불러 모아 의견을 물었지만 원군 출전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우리 지역도 지키기 힘든데 다른 도로 원군을 가야 되겠나이까!”

이순신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다가 녹도 만호 정운과 군관 송희립이 눈물을 글썽이며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적을 치는 데 우리 도요, 남의 도요 하며 따지는 것은 있을 수 없사옵니다. 적의 예봉을 꺽는다면 우리 도도 보전하게 될 것이옵니다.”

이순신은 출전 결심하고 있던 차에 정운과 송희립의 말에 힘을 얻어 결단을 내렸다. 이순신은 감정에 사로잡힌 군사 행동은 반드시 실패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있었다. 또 자신의 지위가 수사이며, 수사는 단독으로 작전 행동을 하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출전을 알리는 계장을 조정에 4월 27일에 올린다.

“신하된 자로서 누구나 마음과 힘을 다하여 나라의 수치를 씻기를 원하지 아니할 사람이 없을 것이므로 ‘같이 출전하라’는 조정의 명령을 엎드려 기다리오며, 소속 수군과 각 관포에 ‘전선을 정비하여 주장(主將)의 명령을 기다리라’고 급히 공문을 돌리고 본도의 감사나 병사와도 아울러 상의하였습니다.”

우선 이순신은 전황을 조정에 보고하면서 전세를 면밀하게 살피면서 출정의 대책을 세웠다.

4월 27일 인시(寅時) 경에 조선 조정의 좌부승지(左副承旨) 민준(閔濬)이 23일 작성한 서장을 선전관 조명이 가져왔다.

“우수사 원균의 계본을 본 즉 ‘각 포구의 수군을 거느리고 출전하여 바다로 나가 군사의 위세를 뽐내어 적을 엄습할 계획을 세웠다’하니 불가불 그 뒤를 따라 나가야 할 것이다. 그대는 각 포구의 병선을 거느리고 출전하여 기회를 잃지 말도록 하라. 그러나 천리 밖이라 혹시 뜻밖의 일이 있을 것 같으면 그대의 판단대로 하고 반드시 구애받지 말라.”

이 조정의 분부를 받은 전라 우수사 이순신은 소속된 수군과 각 관포의 여러 장수들에게 ‘출전할 때 지나게 되는 바닷길인 본영 앞 바다에 일제히 도착하라’고 급히 통고하였다.

또 그는 경상 우수사 원균에게도 ‘물길의 형편과 두 도의 수군이 모이기로 약속할 곳과 적선의 많고 적음과 머물고 있는 곳과 그 밖의 대책에 응할 여러 가지 기밀을 아울러 긴급히 회답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4월 29일 자시(子時)에 전라 좌수사 이순신은 경상 우수사 원균이 보낸 공문을 받았다.

“적선 500여척이 부산, 김해, 양산, 명지도(양산군 명지면) 등지에 머물면서 제멋대로 상륙하여 연해변의 각 관포와 병영 및 수영을 거의 다 점령하였다. 봉화도 끊어졌으니 매우 통분합니다.

본도의 수군을 뽑아내어 적선을 추격하여 10척을 분멸했으나, 날마다 병사를 끌어들인 적세는 더욱 성해져서 적은 많은데다 우리는 적기 때문에 적을 상대할 수 없어서 경상 우수영도 이미 점령되었다.

두 도가 합세하여 적선을 공격하면 상륙한 왜적들이 후방을 염려하여 사기가 떨어질 것이니, 전라좌도의 군사와 전선을 남김없이 뽑아내어 당포 앞바다로 급히 나와야 합니다.”


이순신 지휘하의 전 함대는 4월 29일 수영 앞 바다에 총집결하였다.
중위장에 방답 첨사 이순신(李純信), 좌부장 낙안 군수 신호(申浩), 전부장 흥양 현감 배흥립(裵興立), 중부장 광양 현감 어영담(魚泳潭), 유군장 발포 가장이며 영군관인 훈련부사 나대용(羅大用), 우부장에 보성 군수 김득광(金得光), 후부장에 녹도 만호 정운(鄭運), 좌척후장에 여도권관 김인영(金仁英), 우척후장 사도 첨사 김완(金浣), 한후장 영군관 급제 최대성(崔大成), 참퇴장에 영군관 급제 배응록(裵應祿), 돌격장에 영군관 이언량(李彦良)으로 부서를 나누었다.

전라 좌수영은 우후 이몽구(李夢龜)를 유진장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방답, 사도, 여사 녹도 발포 등의 5개 포구에는 전라 좌수영의 군관 중에서 담력 있는 이를 가장(假將)으로 임명하여 엄중히 훈계해서 보냈다. 또한 관내의 현령, 첨사, 만호 등에게 물길 안내할 사람을 찾아 대기시키도록 전달했다.

선봉장은 경상 우수사 원균과 약속할 때 경상도의 변장으로서 다시 정 할 계획이었다. 전라 좌수사 이순신은 전라 좌수영의 지휘권을 나누고 직속 부하들에게 명확히 하달하였다. 그리고 전라 좌수영 여수 앞바다에서 기동 연습을 실행하였다.

이때 임금의 행차가 4월 30일 서울을 떠나 피난길에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순신은 눈물을 머금고 전 함대에 귀환 명령을 내렸다. 전라 좌수영으로 돌아가는 배 위에 홀로 칼을 집고 서서 임금이 있는 북녘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순신의 얼굴에는 두 줄기의 뜨거운 눈물이 흥건히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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