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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4년부터 86년까지 2년간 보안사에 강제근무한 재일교포 김병진씨.
ⓒ 구영식
'80년대의 기억'은 그를 분노와 고통으로 몰고 간다. 간첩혐의로 연행돼 보안사 서빙고분실에 끌려가 고문당했던 기억은 정말 잊고 싶었다. 하지만 김포공항에 내리면 군인들이 쫓아오는 악몽을 꾸는 날이면 어김없이 그날들이 떠올라 몸은 자꾸 욱신거렸다. 특히 2년간의 보안사 강제근무는 그의 상처를 더욱 깊게 만들었다.

"보안사 근무, 사람목숨을 파리목숨으로 생각하는 시대에 불가피한 선택"

재일교포 김병진(50)씨. 김씨는 1984년 1월부터 86년 1월까지 보안사에 강제근무하다 일본에 돌아와 88년 보안사의 실체를 폭로한 <보안사>(소나무출판사)를 썼다. <보안사>는 당시 <아사히신문> 논픽션 수상작이기도 했다.

하지만 김씨가 <보안사>를 저술한 대가는 너무 혹독했다. 출판사는 압수수색을 받았고 책 8000부가 압수당했다. 또 출판사 사장은 지명수배되었고 직원 2명도 연행되었다. 게다가 그는 '군사기밀보호법 위반'으로 기소중지당해 국내 입국조차 금지되었다. 김대중 정부에 이르러서야 행정제재가 풀려 2000년 5월 15년 만에 다시 고국을 방문할 수 있었다.

지난 달 28일 오후 6시 의문사진상위 사무실에서 만난 김씨는 당시 입국금지시킨 이유와 관련 "겉으론 <보안사> 출판 때문이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며 "88년 5공청문회 증인으로 서는 걸 방해하기 위해 기소중지시킨 것"이라고 밝혔다.

김씨는 이어 "당시 저는 구속시켜 달라고 했지만 처자식을 인질로 삼은 보안사의 요구를 거역할 수 없어 보안사에 강제로 근무하게 되었다"며 "사람 죽이는 것을 파리목숨으로 생각하는 보안사가 실세인 시대에선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술회했다.

김씨는 당시 보안사령부 벽에 걸려 있던 '국민들이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라'는 전두환 대통령의 연두교시를 떠올린 뒤 "보안사의 역사는 너무 저주스럽다"고 전율하면서 "거듭태어나지 못한 보안사의 후신인 기무사는 해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특히 "당시 박사 위에 육사, 육사 위에 보안사, 보안사 위에 여사(이순자 여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보안사는 5공 실세였다"며 "80년대 과거사를 청산하기 위해선 보안사를 해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김씨는 "민주화가 됐다고 하지만 인권유린했던 사람들을 이제는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보호해야 하는 현실이 너무 답답하다"며 "국정원이나 기무사 같은 권력기관과 타협해서 진실을 파헤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김씨는 "한나라당과 타협한 탓인지 여권의 과거사청산 관련법이 점점 후퇴하고 있다"며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선 법적 구속으로까지 연결될 수 있는 강력한 조사권이 있어야 한다"고 '강력한 과거사청산법 제정'을 주장했다.

김씨는 현재 일본에서 한국어 강사로 일하면서 번역(통역)과 출판 일을 겸하고 있다. 그는 인터뷰 내내 과거의 기억들 때문에 울먹이며 괴로워하고 또 분노했다. 80년대에도, 민주화정부가 들어선 지금도 그는 그 저주스러운 '80년대의 기억'을 완전히 떨쳐 내지 못한 듯 했다. 제대로 된 과거사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그의 고통은 계속될지 모른다.

"88년 5공청문회 증인 못 서게 하려고 기소중지시켜""

다음은 김병진씨와의 인터뷰 전문.

▲ 김병진씨가 보안사 근무를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 88년 출간한 <보안사>.
ⓒ 구영식
- 86년 일본으로 도피했다가 2000년에서야 고국땅을 밟은 것으로 아는데.
"그전까지 기소중지상태였다. 행정제재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여권을 발급받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저는 오사카 생협에서 한국어 강사로 일하면서 한국 시민단체들과 교류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그래서 신뢰감이 생겼는데 제가 그런 딱한 처지에 있다는 걸 알고 생협 조합원들과 한국어 강좌를 듣는 사람들이 서명운동이 벌이고 당시 김대중 대통령에게 탄원서도 제출했다. 그해 3월 15일 오사카 총영사관로부터 행정제재를 해제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여권발급이 가능해져 5월에 귀국했다. 15년 만이었다."

- 이번에 다시 귀국한 이유는.
"먼저 민주화운동 보상을 신청할 수 있는지 알아보고 민주화정신계승국민연대의 과거사 청산활동에 협조하기 위해서 잠시 귀국했다."

- 2000년 15년 만에 귀국할 때 기무사로부터 압력은 받지 않았나.
"당시 오사카 총영사관으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었다. 제 문제로 법무부와 외교부, 기무사 등 3자가 회의를 열었는데 기무사가 저에 대해 손을 대지 않겠다고 약속을 해서 행정제재가 풀렸다고 한다. 좀 찝찝하더라. 기무사가 저에게 자신의 잘못을 사과해야 하는데 저에게 무슨 은덕을 베푸는 것처럼 하는 것 같아서….

작년에 제가 의문사진상규명위에 진술을 하기 위해 귀국했을 때 보안사에 함께 근무했던 사람한테 전화가 왔다. 아마 상부의 지시로 전화를 한 것 같았다. 제가 의문사위에 진술한 내용이 언론에 보도된 이후 퇴직한 수사관이 노발대발하며 자기를 찾아왔다며 '그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당신 아들도 서울에 있으니까 조심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더라. 사실상 압력이었다.

- 2000년에 처음 귀국했을 땐 어땠나.
"여전히 80년대에 사로잡혀 있었다. 친구들과 맥주 한잔 먹는데 제가 '야 왜 보안사에서 잡으러 안오지'라고 얘기했을 정도다."

- 지난 88년 <보안사>를 저술한 이유는.
"먼저 간첩으로 조작된 게 억울해서 썼다. 그리고 2년간 보안사에 강제로 근무하면서 통역으로서 사람들을 취조하는 현장에 호출돼 고문하는 장면들을 목격했다. 저는 통역만 했지만 고문을 당하는 사람에겐 그곳은 생지옥이었다. 그런 경험이 쌓이면서 보안사를 해체시켜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그것이 국내에서는 불가능했다. 가족이 위험해지는 일이어서 일본으로 탈출한 것이다. 일본으로 간 직후부터 책을 쓰기 시작했다."

- <보안사> 책을 냈을 때 당국의 압력은 없었나.
"8000부를 압수해버렸다. 또 출판사 사장은 지명수배됐고 직원 2명이 연행되기도 했다. 한 심사위원으로부터 <보안사>가 <아사히신문> 논픽션 대상감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데 한국쪽에서 논픽션 수상작을 공표하면 88올림픽 취재를 못하겠다고 압력을 넣었던 모양이다. 나중에 들었는데 <아사히신문> 간부들이 올림픽 취재를 위해 제 작품을 대상에서 우수상으로 강등시키고 수상작도 공개하지 않았다고 하더라."

- <보안사> 출판 이후 군사기밀보호법 위반으로 기소중지돼 2000년 전까지 귀국이 금지되지 않았나.
"형식적인 이유는 책을 출판한 것이었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책이 나왔던 88년 가을 저는 5공청문회에 증인으로 설 예정이었다. 그걸 방해하려고 기소중지시킨 것이다."

"처자식이 인질로 잡혀 보안사 강제근무 거역 못해...5공은 그런 시대였다"

ⓒ 구영식
- 어떻게 간첩혐의를 받아 구속된 것인가.
"당시 당국은 재일교포 사이에 망원을 심어놓았다. 그래서 반정부 발언을 한 것만으로도 간첩으로 엮을 수 있었다. 사실 저는 뭣 때문에 잡혀 갔는지 모르겠다. 4일 동안 잠 안재우고 몽둥이로 구타하고 전기코일을 손가락에 달고 물을 먹이고…. 그런 고문을 받다 보면 아프고 무섭고…. 접촉을 거절했던 북한공작원의 영향을 받아 공작활동을 하기 위해 고국에 왔다는 식으로 조서는 꾸며졌다."

- 간첩혐의를 인정했나.
"안했다. 반국가단체를 구성하거나 거기에 포섭돼 활동해야 간첩혐의가 성립된다. 하지만 저의 경우 수사관이 창작한 것이다. 고베 어느 공원에서 대남공작원인 한 선배에게 충성발언을 했다는 식으로 말이다."

- 보안사는 왜 당신을 특별채용한 것인가.
"제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교포 유학생치곤 아주 똑똑하게 굴었고 재일한국청년동맹에서 활동해 일본 사정에 훤하고, 통역관으로도 유능하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 특별채용의 조건은 없었나.
"저는 보안사 근무에 반대했다. 부인도 보안사에 근무하면 이혼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그 사람들에게 먹혀 들어갈 수 있나. 저는 그들에게 저를 구속시키라고 요구했다."

- 구속시키라고 할 정도로 강경하게 보안사 근무를 반대했는데 왜 근무할 수밖에 없었나.
"처자식이 인질이다. 보안사는 사람 죽이는 것을 파리목숨으로 생각하는 곳이다. 거역할 수 없었다. 5공은 그런 시대였다. 가끔 왜 보안사에 근무했냐는 질문을 받는데 그때마다 이렇게 대답한다. 보안사에 근무하지 않았으면 우리 가족은 동반자살 했을 것이다. 보안사에 근무하거나 동반자살하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당신은 어떻게 할 거냐."

- 당시 재일동포 유학생이 간첩용의자로 많이 연행된 이유는.
"수사관의 표현을 빌리자면 간첩으로 만들기 가장 쉬운 사람이 재일교포 유학생이다. 같은 동네에 조총련 사람이 산다. 그 사람한테 김일성을 찬양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게 얘기하는 순간부터 고문은 시작된다. 찬동했다는 얘기가 나올 때까지."

- 당시 보안사에서는 어떤 임무를 맡았나.
"정보분석이 기본임무였다. 예하부대에서 올라는 대공첩보를 분석해서 첩보가치를 판단하는 일이었다. 유학생을 간첩으로 만들 경우 저를 통역으로 써먹었다."

- 당시 안기부와 보안사의 관계는 어땠나.
"40대 교포가 간첩용의자로 잡혀왔다. 그런데 그와 친한 사람이 안기부의 한 간부를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안기부 사람을 (대공)분실로 보냈는데 보안사에서는 상대도 안하더라. 안기부쪽에서 풀어주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 당시 안기부조차 보안사의 권세에 눌렸던 것인가.
"그렇다. 보안사는 5공의 실세다. 80년대 과거사를 청산하려면 보안사를 해부해야 한다. 84년엔가 보안사 사령부에 갔는데 벽에 전두환 대통령의 연두교시가 걸려 있었다. 그중 '국민들이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라'는 내용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 그것을 보면서 무엇을 느꼈나.
"독재, 파시즘…. 한마디로 공포로 정치를 이끌어 가는 것이다. 당시 이런 우스개소리가 나돌았다. '학사 위에 석사, 석사 위에 박사, 박사 위에 육사, 육사 위에 보안사, 보안사 위에 여사(이순자 여사)'. 보안사가 유일하게 못하는 것은 남자를 여자로 바꾸는 일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보안사의 역사가 너무 저주스럽다...거듭 태어나지 못한 기무사 해체해야"

ⓒ 구영식
- 직접 개입한 공작이 있나.
"공작은 담당관이 따로 있다. 일본어로 된 증거물을 번역하거나 감청·도청한 테이프를 번역하는 일을 했다."

- 평화공작은 녹화사업과 별개로 진행됐다고 했는데.
"평화공작의 창시자는 서의남이다. 그는 보안교육대 교육관으로 있을 때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녹화사업 브리핑을 했다. 평화공작은 대통령 관심사항이고 공작금은 걱정하지말라고 얘기한 것도 들었다. 평화공작은 보안사와 치안본부, 안기부의 합동공작이다. 물론 중심은 보안사였다. 제일교회사건도 평화공작의 과정에서 발행한 것이다.

평화공작이나 녹화사업이나 모두 정권 안보를 위해 반정부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실시한 것이다. 녹화사업은 학생들을, 평화공작은 종교계 반정부세력을 억누르기 위한 것이다."

- 보안사에 근무하는 동안 잊혀지지 않는 게 있다면.
"먼저 제가 고문당한 일. 그리고 남이 고문당하는 것을 본 것. 또 우리 가족에게 고통준 것."

- 보안사는 현재 기무사로 이어져 건재하다.
"거듭 태어났다고 볼 수 없다. 거듭 태어나려면 과거의 잘못을 고백하고 사과해야 한다. 여전히 발뺌하고 과거를 덮어두려고 하는 것 같다. 이런 자세로 국민의 이해를 구할 수 없다.기무사는 해체해야 한다. 그 역사가 너무 저주스럽다."

- 80년대 '보안사 기억' 때문에 현재 힘든 점은 무엇인가.
"많다. 항상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보안사>를 쓰는 동안 몸에 칼을 지니고 다녔다. 제 자식을 건드리지 않을까 가장 두려웠다. 문득 막 불안해질 때가 있다. 악몽도 꾸었다. 제가 김포공항에 내리는데 군인들이 총을 들고 쫓아왔다. 도망치기 위해 김포공항을 돌아다니는 이런 악몽에 시달렸다."

- 최근 공안문제연구소의 '사상감정'이 도마 위에 올랐는데.
"사상을 감정하는 것은 인권유린이다."

- 이런 일이 민주화정부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데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과거 청산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형식적으론 민주화가 이루어졌지만 수구세력은 여전히 건재하다."

- 현재 과거사 청산 흐름을 어떻게 평가하나.
"법적으로 많은 한계가 있는 것 같다. 과거에 그런 일을 저지른 사람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고백하는 게 최선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렵다면 어느 정도 강제력을 가지고 조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서의남씨(전 보안사 간부)는 과태료 1000만원 내고 끝났다. 이는 1000만원으로 진실을 묻어버린 것이다."

- 3기 동안의 의문사위 활동에서 드러났지만 국정원과 기무사 등 핵심 권력기관이 조사에 비협조하고 있어 어려움이 있었다.
"국민들의 바람에 호응하지 못하고 여전히 구태의연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제일 아쉽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나. 아품을 안고 사는 사람이 수없이 많은데 그것을 그대로 나두고 미래로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 국정원이 민관 합동으로 조사위원회를 구성할 예정인데.
"구체적인 무언가를 보여줄 때까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국정원이 속시원하게 해명한 게 없지 않나. 사실이 드러날 때까지 믿을 수가 없다."

- 민간부문이 참여하는 것에 대해 그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있다.
"국정원이나 기무사 같은 권력기관과 타협해서 진실을 파헤칠 수 있을까. 그들 기관의 체질로 봐서 어렵다고 본다."

"법적 구속으로 이어질 수 있는 강력한 조사권이 있어야"

- 그동안 한국사회의 변화를 어떻게 평가하나.
"노태우 대통령은 보안사출신이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는 기대를 걸고 청원서를 쓰기도 했다. 결국 김대중 정부 때 행정제재가 풀렸다. 김대중 정부에 이르러서야 한국이 민주화됐음을 느꼈다. 겉으론 많이 변했지만 아직도 속에는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다. 억울한 사람이 아직도 억울한 채 살고 있지 않나. 의문사의 진상도 규명되지 않고."

-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고 보나.
"민주화가 돼 절차를 밟아야 하다 보니 답답하다. 인권유린했던 사람들을 이제는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보호해야 하는 아이러니란…. 철저하게 진상을 규명할 수 있는 법을 제정해야 한다."

- 과거사 청산 관련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여권의 노력을 어떻게 평가하나.
"처음 과거사진상규명법을 들고 나왔을 때에 비해 점점 후퇴하고 있다. 한나라당과 타협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법적 구속으로까지 연결될 수 있는 강력한 조사권이 있어야 한다."

- 재일교포사회에 대한 개혁의 목소리가 높은데.
"재일교포사회가 찢어지고 있다. 1년에 1만명 꼴로 일본에 귀화하고 있다. 조국에 대한 귀속감이 없다. 속아서 북한에 간 사람들이나 남한에 공부하러 갔다가 간첩으로 몰린 사람들에게 조국이 설 자리가 있겠나. 정말 조국분단이 (재일교포사회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 29일 오전 10시 과거 반민특위 터에서 '해방이후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모여 국가폭력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합동기자회견을 열었다.
ⓒ 구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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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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