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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과 밭의 경계가 되는 빨간부표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논과 밭의 경계가 되는 빨간부표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 서정일
바다에도 논과 밭이 있다. 그리고 논둑도 있고 농로도 있다. 다름 아닌 해상측량을 통해 호롱(말뚝)을 뻘 깊숙이 박고 부표를 달아 구역을 표시하는 일, 김 농사를 짓기 위함이다. 그러면 논이 만들어 지고 논둑(해상보호구역)도 농로도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어민들에게 있어 해상 측량하는 날은 그들의 논과 밭이 바다에 생기는 날이다. 바다를 일구며 사는 어부들에겐 이날만큼 기쁜 날이 없다. 돼지도 잡고 막걸리를 받아다가 동네잔치를 벌이는 1년 중 몇 안 되는 날이다.

22일 장흥군 회진면 신상리 앞바다는 마을사람들로 온통 울긋불긋 물들었다. 바다에 띄울 빨간 부표, 하얀 부표를 싣고 모두 숨 가쁘게 바다로 달려 나왔기 때문이다. 해상측량 후 부표 작업하는 건 개인작업이 아닌 어민 공동작업이다.

바다는 살아 움직인다. 물위에 떠있는 부표들이 물 따라 흘러 다닐 거라는 건 상식. 흘러 다니는 바닷물에 부표가 쓸려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선박의 닻과 같은 역할을 해 줄 3미터 정도의 통나무를 먼저 뻘에 박아야 한다. 이 통나무를 호롱이라 부른다.

인공위성(GPS) 해상측량이 신기한 듯 유심히 쳐다 보고 있다.
인공위성(GPS) 해상측량이 신기한 듯 유심히 쳐다 보고 있다. ⓒ 서정일
호롱을 뻘에 박는 일은 일반 선박으로는 무리다. 어민들 사이에서 호롱배라 불리는 특수한 배를 사용해야 하는데 인근에 3대밖에 없는 조금 특별한 선박이다. 농촌으로 얘기하면 콤바인 정도랄까? 이렇듯 호롱배는 바다의 농사철이 되면 이리저리 불려 다니기 일쑤다.

작업 시작은 도면에 해상측량사가 지점을 정해주면 그 지점에 호롱을 박고 줄을 매달아 빨간 부표를 바다에 띄우는 것이다. 말로 표현하면 아주 간단하지만 실제 해상에서 하는 작업은 위험도 따르고 반나절 꼬박 걸리는 작업이다.

이렇듯 바다에 논과 밭을 만드는 가장 핵심은 뭐니 뭐니 해도 해상측량. 망망대해에서 위치를 잡는 건 그리 녹록치 만은 않은 일이지만 요즘은 인공위성 (GPS) 해상 측량 시스템을 이용하기에 예전보다 훨씬 수월해졌다. 하지만 모든 건 사람이 하는 일. 경험이 풍부하고 기술력이 있는 측량사를 만나야 작업이 수월하고 빠른 시간 내에 일을 끝낼 수 있다.

'쿵 쿠웅' 통나무가 하나 둘 뻘에 박히는 소리가 늘어날수록 호롱배는 육지와 점점 더 멀어져 갔다. 작업이 중간 정도 진행될 즈음엔 마을의 선착장도 까마득하게 보였다. 이제 다시 돌아가는 시간. 돌아가면서 다시 경계를 만들면 논 밭 만드는 일은 끝이다. 엔진소리가 커지고 바닷물이 뱃전으로 물보라를 일으키며 다가왔다.

뱃머리에서 호롱 박는 작업은 숙련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뱃머리에서 호롱 박는 작업은 숙련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 서정일
호롱배 뱃머리에서 호롱 박는 작업을 한 사람에겐 조금 여유가 있는 시간. 담배를 피워 문 그의 얼굴에 약간의 여유가 보인다. 사실 오늘 작업 중 가장 위험한 작업이다. 자칫 실수라도 하면 호롱과 함께 바다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갈 수도 있다. 그만큼 많은 경험과 힘이 필요한 작업이 뱃머리에서 호롱을 박고 부표를 묶어 주는 작업이다.

"예나 지금이나 측량하는 날은 잔칫날이죠. 바다에 금을 긋고 땅을 만드는 일인데 왜 기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아시다시피 요즘은 예전만 못합니다. 안팎으로 여러 여건들이 어민들을 많이 힘들게 합니다."

작업을 끝내고 어민들에게 경계구역을 설명하는 김호규 어촌계장
작업을 끝내고 어민들에게 경계구역을 설명하는 김호규 어촌계장 ⓒ 서정일
논과 밭의 경계가 되는 빨간 부표를 바라보면서 김호규(49) 어촌계장은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편안할 수 있도록 여건이 많이 나아지길 희망했다.

새참을 먹고 그들은 다시 바다로 나갈 것이다. 빨간 부표는 그들의 논과 밭이지만 아직 고랑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발을 내리기 위해선 다시 하얀 부표를 띄워야 하는데 그 작업이 남은 것이다. 아마도 늦은 시간까지 그들은 바다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바다에 논과 밭을 만들고 고랑을 만드는 작업, 오늘은 그들이 바다를 일구는 날이었다.

이제 남은 건 밭고랑을 만드는 일
이제 남은 건 밭고랑을 만드는 일 ⓒ 서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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