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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림동 국밥집 아주머니는 내게 고향 풀숲에 감추어진 넉넉한 호박처럼 든든했다
ⓒ 이종찬
그해 1986년 가을, 추석 연휴를 맞아 탯줄을 묻은 고향 창원으로 내려온 나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불과 몇 달 사이에 내 고향 창원은 주변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야 할 정도로 몰라 보게 변해 있었다. 아니, 내가 바라보고 있는 그 순간에도 불도저와 포클레인의 삽날이 정든 고향의 산천을 하나씩 둘씩 무너뜨리고 있었다.

예전에 동무들과 하하 호호 웃으며 갈빛 도토리를 줍고, 고추 잠자리를 쫓으며 빨갛게 익은 청미래를 따먹던 앞산 가새는 절반이 뚝 잘려 있었다. 해마다 가을이면 해처럼 잘 달구어진 태양초가 손짓을 하던 그 밭, 가을 배추와 가을 무가 입맛을 돋구며 자라던 그 다랑이밭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노을이 아름답게 물들던 마산쪽 하늘 아래 빼곡히 들어선 창원공단은 마침내 쬐끔 남은 내 고향의 마지막 흔적마저도 벌레처럼 사각사각 갉아먹고 있었다. 허수아비가 춤을 추며 참새를 쫓고 있는 우리 마을 황금빛 들판과 내가 자란 동산마을까지도 곧 도시계획구역으로 지정돼 땅값 보상과 동시에 밀려난다고 했다.

서글펐다. 그제서야 수몰마을 사람들의 한숨과 절망을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해 추석 연휴, 나는 자전거를 타고 어릴 적 온갖 기억이 새록새록 숨쉬고 있는 산수골과 마당뫼, 새치골을 자세히 둘러 보았다. 그리고 상남-진해간 철길에 앉아 신작로를 오래 바라보면서 내 고향의 흔적들을 마음 속 깊숙이 새겼다.

"너거는 운제(언제)까지 쉬노?"
"추석 다다음날 올라가면 됩니더."
"인자 이곳 농사도 올개(올해)가 마지막인 거 같다. 그라이 눈에 잘 새겨 두거라. 뭐든지 한번 눈앞에서 사라지모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기다. 그나저나 앞으로 농사도 없이 우째 묵고 살란가 걱정이다."


추석 연휴가 끝나고 서울로 올라가는 날, 어머니께서는 타향으로 떠나는 자식이 못내 아쉽다는 듯 꼭꼭 묶은 보따리가 몇 개나 든 커다란 박스 하나를 내 손에 쥐어 주시며 눈물을 글썽였다. 타지에서는 무엇보다도 건강이 최고라시며, 우리 논과 밭에서 직접 키운 농산물을 싸 주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 같다며.

그렇게 고향을 버려 두고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 달셋방으로 돌아온 나는 그 다음 날 아침 영등포구 신림동에 있는 그 사출공장에 출근하지 않았다. 그날 오후 나는 그 공장 총무부로 찾아가 그동안 일한 품삯을 계산해 달라고 했다. 총무부장은 그만두려면 우선 사직서부터 써야 하며 품삯은 월급날 찾으러 와야 한다고 했다.

"어! 총각이 이 벌건 대낮에 웬 일이야?"
"저어~ 그 공장 그만 뒀어요."
"아니 왜?"
"제 적성에 맞는 다른 일자리를 찾아보려고요."
"하긴, 시를 쓴다는 총각에게 공장이 적성에 맞을 리가 없겠지. 그래. 어떤 일자리를 구하려고?"
"우선 급한대로 학습지라도 돌려 보려구요."


신림동 시장통에 있는 국밥집 아주머니는 마치 어머니처럼 나의 일거수 일투족에 대해서 정말 꼼꼼하게 물어 보았다. 사실, 나 또한 그 아주머니를 어머니처럼 여기며 그동안 나에 대해서 시시콜콜 털어 놓았다. 하지만 나는 그 아주머니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게 없었다. 고향이 부산이며, 큰딸이 내년 2월에 대학 국문과를 졸업한다는 것을 빼고는.

내가 막걸리를 두잔째 쭈욱 비웠을 때 국밥집 아주머니는 "학습지?" 하며 빙그시 웃더니, 갑자기 무언가 좋은 생각이 난다는 듯 무릎을 탁 쳤다. 그 아주머니는 내가 비운 막걸리잔에 허연 막걸리를 반 잔쯤 따르더니 단숨에 꿀꺽 마셨다. 그리고 다시 막걸리잔에 막걸리를 철철 넘칠 정도로 따라 내게 얼른 마시라는 손짓을 했다.

"그래. 참 잘 됐어. 그렇찮아도 오늘 저녁에 총각이 오면 이것 저것 의논 좀 할려고 했었는데."
"무슨 의논요?"
"저어기~ 고추방앗간 하는 사람 있지? 저 사람이 다세대 주택에 살거든. 근데 방이 하나 비었다는 거야. 나더러 참한 사람이 있으면 소개 좀 해 달라고 하던데?"
"방세는요?"
"그 집에 올해 중학교 올라가는 아들이 하나 있거든. 그러니까 보증금이니 달세니 하는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


고마웠다. 그 아주머니는 이미 내 속내를 환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내가 그 사출공장에 오래 다닐 사람이 아니며, 지금쯤 신대방동 달셋방에 걸었던 보증금마저도 달세 대신 야금야금 까먹고 있다는 것까지. 그 아주머니는 그동안 집도 반듯하고 달세 걱정도 없는 그런 방을 알아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근데, 내가 그 공장을 그만 두고 학습지를 돌려볼 생각이라고 하자, 그 아주머니는 옳커니 하고 무릎을 탁 쳤던 것이다. 그렇찮아도 그 아주머니는 시장통에서 고춧방앗간을 하는 그분에게 방 하나를 공짜로 내주는 대신 내가 그 집 아들을 틈틈히 가르쳐 주면 되지 않겠느냐는 그런 제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 그대로 누이 좋고 매부 좋고였다. 게다가 학습지를 시작하기도 전에 학생 접수부터 먼저 받았으니, 나로서는 꿩 먹고 알먹기나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어둠 속에 깊이 가라앉아 있었던 내 앞길이 환하게 트이는 것만 같았다. 아니, 이제서야 블랙 칼라에서 화이트 칼라로 접어들 수 있었다는 것이 더 기뻤는지도 몰랐다.

그날 나는 국밥집 아주머니에게 몇 번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 막걸리를 꽤 많이 마셨다. 그 아주머니도 "오늘은 장사를 접어도 괜찮다"며 나와 마주 앉아 막걸리를 홀짝홀짝 마셨다. 그리고 나를 고춧방앗간에 데리고 가서 소개를 시켜줬다. 그때 나는 마음씨 좋게 보이는 고춧방앗간 아저씨에게 신대방동 달셋방이 빠지는 대로 곧바로 이사를 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나저나 큰일입니다."
"아니, 또 왜?"
"제가 앞으로 이 큰 은혜를 어떻게 다 갚죠?"
"난 또 무슨 말인가 싶어 깜짝 놀랬네. 그런 걱정일랑 애당초 꽉 붙들어매 놓고 그저 열심히 살아갈 생각이나 해."
"그래도?"
"총각! 내 말 잘 들어. 내가 비록 시장통에서 장사를 하며 먹고 살고 있지만 마음까지 장사하는 그런 사람이 아냐. 그러니까 총각도 앞으로 그렇게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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