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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꽃을 그저 좋아하기만 할 땐 구절초도 쑥부쟁이도 모두 나에겐 들국화였답니다. 그런데 꽃과 조금씩 교류를 나누면서 그냥 들국화가 아니라 각 자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같은 쑥부쟁이라도 무수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쑥부쟁이만 해도 대략 15종 정도는 된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저를 사로잡은 쑥부쟁이는 제주의 해안가에서 쑥쑥 자라는 갯쑥부쟁이었습니다.

가을부터 피어나기 시작해서 때로는 한 겨울에도 양지바른 곳에서는 계속 피어나는 갯쑥부쟁이의 삶은 내 삶에 찾아온 고난의 그림자 같은 것들을 말끔히 씻어줍니다.

ⓒ 김민수
이름 없는 꽃은 한 송이도 없습니다.

난생 처음 보는 꽃도 식물도감을 찾아보면 어김없이 이름을 가지고 있고, 이런저런 쓰임새나 그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 것을 보면 가끔씩 궁금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맨 처음에 저 이름을 붙여준 이는 누구일까, 그것이 독이 되는지 약이 되는지 어떻게 알았을까 그리고 그 꽃에 관한 이야기들은 어떻게 구전되었고, 꽃말은 누가 어떻게 지어주는 것일까 하는 등등의 궁금증이 그것이죠.

우리가 먹는 채소 하나, 나물 하나도 그 누군가 선각자가 있었을 것이고, 오랜 경험 끝에 이 것은 이렇게 먹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것이 밝혀졌을 것입니다.

ⓒ 김민수
야생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만나면 저마다 꽃을 대하는 마음도 다르고 행동도 다릅니다. 그 중 어떤 분은 열매가 되었던 이파리가 되었든 맛을 보는 분이었는데 그 분을 만나러 간 어느 겨울 날 굉장히 딱딱한 무환자나무의 열매를 서너 개 구했습니다.

열매의 껍질은 비누대용으로도 쓴다고 하더군요. 그 분이 열매를 내놓기가 무섭게 나는 "이게 뭐야?"하더니 입으로 갑니다. 잠시 후 '욱'하는 소리와 함께 ‘뭐가 이리 딱딱하냐’고 물었습니다. 이빨이 깨질 뻔했던 것이죠. 얼마나 딱딱하기에 그런가 하며 집으로 가져온 저는 망치로 씨앗을 깨뜨리면 그 속내를 볼 수 없으니 칼로 씨앗을 잘라보려 하다가 손가락만 베었습니다. ‘아, 이 정도 딱딱하니까 염주를 만들기도 했겠구나’하는 느낌이 옵니다.

이런 시행착오들과 경험들이 하나 둘 쌓여가면서 이름들이 붙여졌겠지요.

ⓒ 김민수
ⓒ 김민수
쑥부쟁이의 꽃말은 옛사랑, 순정, 무병장수랍니다. 꽃에 전해지는 전설과 어울리는 꽃말은 옛사랑 또는 순정이 어울릴 것 같고, 한 겨울에도 피어있는 모습을 보면 '무병장수'라는 꽃말이 어울릴 것 같습니다.

옛날 어느 두메산골에 가난한 대장장이가 살고 있었는데 11남매나 되는 자녀를 두었단다. 그런데 어머니가 아프고 대장간의 일도 많지 않아서 큰 딸은 산과 들로 나가 나물을 뜯어 식구들의 생계를 간신히 이어갔지.

어느 날 나물을 뜯다 사냥꾼에게 쫓기는 노루를 숨겨 주었고, 노루는 반드시 은혜를 갚겠노라고 말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멧돼지를 잡으려고 파놓은 구덩이에 어떤 총각이 빠져있었단다. 그 청년도 구해주었는데 그 청년은 한양에 사는 부잣집 아들이었고, 그도 이 은혜를 꼭 갚으리라고 하고는 가던 길을 갔지.

그런데 대장장이의 딸은 한 눈에 총각을 사랑하게 되었지 뭐야. 그러나 기다리고 가다려도 총각은 오지 않고 그렇게 몇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처녀는 상사병에 걸리고 말았단다. 이제 간신히 동생들이 좋아하는 쑥을 캐러 다닐 뿐이었지.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그녀를 '쑥을 캐러 다니는 불쟁이(대장장이)네 딸"이라는 뜻의 쑥부쟁이라 불렀단다.

어느 날 전에 구해주었던 노루가 나타나 노란 구슬을 세 개를 주면서 이렇게 말했어.

"쑥부쟁이 아가씨, 이 구슬을 입에 물고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뤄진답니다. 그러나 구슬 하나에 한번씩밖에는 소원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큰 딸은 첫 번째로 오래 병을 앓고 있었던 어머니의 병을 고쳐달라고 했겠지. 그랬더니 정말 어머니의 병이 씻은 듯이 나은 거야. 두 번째 소원은 무엇이었을까? 그래, 총각을 만나게 해 달라는 것이었어. 그런데 만나보니 이미 총각은 결혼을 했고, 자식들까지 있는 몸이니 함께 살 수가 없잖아. 마음씨 착한 큰 딸은 마지막 소원을 빌었단다.

"부인과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그이를 보내주세요."

그 후에도 큰 딸은 예전처럼 들과 산으로 나물을 뜯으러 다녔지만 그 마음속에는 늘 그 총각이 남아있었단다. 어느 날 총각을 생각하다 눈물이 앞을 가리면서 그만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숨을 거두었지 뭐야.

이듬해 가을 그 자리에는 노란 구슬을 담은 듯한 연한 보라빛의 꽃이 탐스럽게 피어났단다. 물론 그 이파리들은 나물로 먹을 수 있었지. 동네 사람들은 쑥부쟁이의 혼이 나물을 좋아하는 동생들을 위해서 피어났다고 하며 쑥을 캐러 다니는 불쟁이의 딸이라는 뜻의 '쑥부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함경도에 전해져 내려온다네.


ⓒ 김민수
제주에는 한 겨울에도 양지바른 곳에는 꽃이 피어있습니다. 양지바른 돌담 밑에는 물론이고 해안가 바위에도 해국과 갯쑥부쟁이가 피어있고 수선화와 동백은 한창입니다. 그리고 밭에도 배추며 무가 푸른빛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니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깁니다. 그러나 바람이 많아서 체감온도는 육지 못지않게 춥습니다. 웬만한 추위에는 잘 견디는 편이었는데 제주의 겨울을 보내는 것이 쉽지 않거든요.

지난 겨울 눈이 유난히 많이 내렸습니다. 눈 속에서도 제 빛깔을 잃지 않고 피어있는 갯쑥부쟁이를 보면서 참으로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래, 저렇게만 살아가자 했죠. 그렇게만 살아가면 어떤 시련도 넉넉하게 이겨나갈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 김민수

저 바닷가에 갯쑥부쟁이 피었구나
파도소리 그리워 척박한 그 곳에 피었구나
올망졸망 작은 키에 까치발 들고
그렇게 일렁이는 바다를 바라보는 구나

저 바다 너머에서
사랑하는 님이 배를 타고 오시려나

저 바다에서
조개도 캐고 미역도 따고 톳도 따서
두메산골에서 푸성귀에만 익숙해 있는 동생들에게
바다냄새를 안겨주려고 바다에 피었구나

저 바다 너머에서
사랑하는 님이 두둥실 떠오르면 좋겠다.
<자작시-갯쑥부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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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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