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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기 등에서 교미를 끝낸 파리 한 마리가 깨온 한 듯 가볍게 날아오르더니 매조 난초 팔공 등이 뒤섞여 있는 화투짝 위를 쪼르르 기더니 눈치 보듯 앞발을 비비고 있었다.

한 쌍의 앞날개와 관상의 주둥이를 가진 파리는 또 다른 더러운 곳을 찾아가려고 잠시 후 자신의 목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높이 날아올랐다.

순간 부인은 날아오르는 파리를 잽싸게 낚아챘다. 오른 손은 포물선을 그리며 바람을 일으켰고 5형제는 파리를 포획했다. 그 때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수화기를 잡자마자 귓가로 가져갔다.

“아주 끼고 살아라.”

남편은 여러 번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살판났구려, 허구 헌 날 화투짝이니….”
“반나절이나 전화질이야! 여편네들은 앉았다 하면 입이 근질근질 하는 모양이지.”

“언제 들어오세요?”
“가는 중이야.”

남편은 5분 후에 집에 도착했다. 차려준 밥을 뚝딱 해치우더니 ‘당신 가진 것 좀 있어?’ 의외로 부드러웠다. 미풍에 살랑거리는 나뭇잎을 연상케 했다.

“고스톱은 가정 파괴범이라는 사실을 몰라요. 밥이 나와요 죽이 나와요?”
“한 번만이야.”

“장롱 속의 각서를 묶으면 책이 한 권 될 텐데.”
“또 시작이다.”

사립문을 나서는 남편의 뒷모습은 무엇에 홀린 듯 처량했다. 희망사항이지만 가장으로서 오순도순 사는데 올인을 했더라면…. 중3인 아들과 중1 짜리 딸을 생각하면 좋은 부모가 돼주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걱정이다.

남편은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굴지의 S회사를 다녔는데 스스로 직장을 버렸다. 아니 잃어버렸다는 표현이 낫겠다.

일과 중에 회사 근처 호텔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도박을 한 죄책감으로 사표를 냈다. 그 뒤 생활은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졌고 스스로 무덤을 판 남편은 새 직장을 구하기 위해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다. 벌써 백수로 지낸 지가 1년여가 되어 간다.

친한파 외국인들이 한국을 걱정하는 것 중의 하나는 대한민국의 성인남녀는 ‘고스톱’을 꽤 즐기는 편이라는 것이다. 그 말이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한국인들은 둘 이상이 모였다 하면 고스톱이다.

어느 고명하신 의사의 말을 잠깐 빌리자면 독서에 약한 한국인들은 고스톱이 있기에, 말과 동작이 느리고 정신 작용이 불안전한 치매를 예방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얘기한다.

“그것이 있으니까 다행이죠. 특히 50대에 나타내는 여성 우울증 예방에는 약간의 알코올과 고스톱이 특효약일 수도 있습니다.”

농담반 진담반이겠지만 어느 의사는 미소를 띄면서 말했다.

남편이 나간 지 3시간쯤 됐을 때 전화가 또르르 울었다.

“이제는 없네요!”

"…빠르긴, 누가 있느냐고 물었나?”

목소리에 조금 윤기가 돌고 있었다.

부인은 고소한 생각이 들었다.

“또, 다 털렸…지!”
“마-지-막…한 번 만이야~.”

그런데 이상하게도 남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여유가 있었으며 유머가 베어 있었다. 낌새가 이상했다. 조금 전 잃은 돈을 찾기 위해 돈을 구하러 올적에는 맥이 풀려 풀이 죽어 있었는데 이상스럽게도 목소리에 생기가 돌았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당신의 후원 덕분에 판을 평정했지. 에, 본인이 전화 숫자 판을 내려다보며 꼭꼭 찍은 목적은, 에,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사서 선물하고파서….”
“오늘 아침 분명히, 해가 동쪽에서 떠었지.”

남편은 지금 귀가 중이며 차 안이라고 했다. 금의환향이란 단어 좀 얼른 찾아보라는 말까지 있지 않았다.

남편은 유머와 해학을 즐기는 좀 세련된 서구식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서양남자들은 유머를 모르면 미인들로부터 외면 당하고 기피인물로 낙인찍혀 결혼을 아예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돈이냐? 유머냐? 선택을 하라면 후자를 택한다고 했다.

부인은 꿈도 야무지게 소녀시절 유머와 해학을 모르는 남자하고는 절대로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었다. 그래서 결혼상대자를 물색하는 데 2, 3년 걸릴 걸로 생각하고 ‘결혼 작전 3개년 계획’을 세우고 착실히 추진했다. 첫째 조건이 유머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줄 아는 남자를 이상형으로 삼았다.

무뚝뚝하고 유머도 모르는 사람하고 일생을 같이 한다는 것 자체가 치욕이라고 생각했다. 또 그러한 무의미하게 일생을 산다는 것은 상상해 볼 수 없었다.

결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외모만 보고 남자를 사귀게 되었는데 두 남자와의 교제에서 얻은 결론은 이거 안 되겠다 싶어서였다.

무드도 없고 대화도 안통하고. 유머가 없으면 도로 물릴 수도 없고 얼마나 갈증 나는 일인가.

부인은 사귀다가도 비장한 각오로 단호히 말했다.

“성격이 좋은 것 갖고 성실함이 돋보여 마음에 들지만, 저랑은 어울리지 않은 분 같네요.”

차분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말했다.

“여자의 변심은 무죄라고 들었습니다만 좀더 만나보고….”
“……”

남자를 선택하는 데는 좀 뻔뻔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습이 필요 없고 여러 번 가는 것도 아니고 일생에 단 한 번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는 건데 가다듬고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세 번째 만난 남자가 마음에 쏙 들었다. 마음에 아름다운 폭풍이 일었다. 부인은 내 남자로 만들기 위해 다른 곳으로의 시선을 차단하고 한눈을 못 팔게 하기 위해 무진장 공을 들였다. 그런데도 이상하게도 도망갈 궁리만 하는 것이었다. 남자답고 유머러스한 남자를 만났는데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고 비참했다.

독서량이 어마어마한데다가 약간의 재력도 있고 잘생긴 외모에다가 유머감각도 뛰어났다. 주관이 뚜렷하고 자기 주장을 관철시킬 줄 안다는 것은 그만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사귄 지 한 달쯤 지날 무렵, 둘은 오솔길을 걷고 있었다.

둘이서 나란히 데이트 하다가 뚱딴지같은 말에 부인은 넋을 잃었다.

"동우 씨, 사는 목적이 뭐예요?"
"철학적인 질문이시네요."
"……."

"사는 목적이라. 여자를 괴롭히기 위해서 산다고나 할까."
"괴롭힘을 당한 여인은 얼마나 고통스럽겠어요."

임기웅변이 능숙해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아하, 그게 아니라, 여자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사는 겁니다."

차라리 이 얘기가 옳을 것 같다며 금방 정정했다.

하하하, 호호호…….

처음으로 고개를 뒤로 젖히며 파안대소하며 웃었다. 그 것은 곧 의기투합으로 이어졌다.

단단히 울타리를 쳐놓은 덕에 결국 그 남자와의 결혼에 '꼴인'했지만 부인은 순간의 선택을 잘 한 것 같았다.

“평생을 좌우도 한다니까.”

차고로 들어서는 남편의 차 소리가 가랑가랑 날아왔다.

“어쩐 일이야 끼고 있을 줄 알았는데.”

부인은 맨날 전화만 하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아직은 청각이 이상무예요. 굴러오는 바퀴소리를 듣고 잽싸게 내려 놨지.”

시치미 뚝 떼고 거짓말을 했다.

남편은 전화기를 보듬고 앉더니 체온이 남아 있지 않은 데, 너스레를 떨었다. 뒷 포켓에서 지갑을 꺼낸 남편은 파란 거 한 다발을 부인에게 받기 좋게 던지더니 ‘빌려간 것까지 두 배야!'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겨우 두 배?”

남편은 더 줄 수도 있다면서 ‘난센스 퀴즈’를 내서 정답이 당신 뚫린 입에서 나오면 10배를 쳐서 더 줄 수도 있고 만약 맞추지 못하면 준 돈을 도로 돌려 받아야겠다고 큰 소리 쳤다.

“싫어, 그건!”
“그럼, 돌려 받는 것은 취소하고, 지금부터 문제를 내겠어요?”
“아내의 녹슨 머리도 생각해서 될 수 있으면 머리 안 굴리고 쉽게 답할 수 있는 걸로 내주는 것도 아내 사랑일 수도 있어요.”

“알겠습니다. 마마, 그러면 차분히 풀어 보세요…. 방안에 파리가 윙윙거리면서 날고 있는데, 암컷과 수컷을 가려내라고. 지금 방안의 파리 중에서 어느 놈이 암컷이고 어느 놈이 수컷이~야?”
“그걸 어떻게 알아요?”

“머리만 잘 굴리면 금방 풀리는 실타래처럼 살며시 정답이 찾아온다고.”
"……."

“정답은 서서히 나오는 것이 아니고 난센스이니까 필이 금방 오게 돼 있어요.”

끈끈이 덫에 최후를 마친 파리들은 비상을 중지하고 늘어져 있었다. 몇 마리 파리들은 화투근처에서 교미를 하며 이리로 쪼르르 저리로 쪼르르하며 왔다 갔다 발 빠르게 먹이감을 구하기 위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또 대여섯 마리는 전화기 숫자 판에서 노닐고 있었고 서너 마리는 주위에서 맴돌고 있었다.

“당신, 힌트 좀 주면 안돼?”
“돈 벌기가 그렇게 쉬운 줄 알아?”

부인은 파리 한 마리를 잽싸게 잡아채더니 잡은 파리 한 마리를 뒤집어 확인해 보았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살펴봐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다른 문제를 내 줘?”
“그건 안돼.”

“그러면 좋아, 침실에서 보자~구요!”
“좋아, 나도 요즘 몸이 허약하던 참인데 잘 됐지 뭐….”

남편은 끝내 다른 문제로 대체해 주지 않았다.

“이 난센스 퀴즈에 대해서 힌트만 하나 줄께.”

부인은 귀가 번쩍 열렸다.

“사람들처럼 파리들도 끼리끼리 다닐 수는 있어.”

부인은 전화기와 화투짝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맞출 듯 맞출 듯 하면서도 한 단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준다던 10배의 돈은 남편의 지갑에서 꽁꽁 묶여 있었다.

“정답이 없을 경우, 당신 약속대로 내놓는 거야!”

약이 오른 부인은 협박(?) 비슷하게 윽박질렀다.

남편은 정견 발표하는 정객처럼 의젓하게 폼을 잡더니 입을 열었다.

“요즘 패거리 문화가 형성되는 기류잖아, 코드도 맞아야 하고…. 정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남자들은 화투를 좋아하기 때문에 수컷은 항상….”

순간 부인에게 필이 왔다.

부인은 남편의 다음 이어질 말을 중단시키고 큰소리로 '스톱!'을 걸었다.

“아유 깜짝이야. 금방 화통을 잡수셨나.”

“과녁이 보여요. 순간 내 뇌리에 날개를 접었어요. 짝짝 짝짝짝!”

신이 난 부인의 시위를 떠난 화살은 난센스 퀴즈의 과녁을 경쾌하게 뚫었다.

“매조 난초 팔공 위를 기어다니는 애들은 보나마나 수컷이고, 아시다시피 전화기 주위를 맴도는 애들은 분명히 암컷…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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