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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알이 영근 탐스런 대추를 바라보면 나도 몰래 한 웅큼 따고 싶다.
ⓒ 이종찬

제 몸에 불을 지른 대추. 쪼글쪼글 사지가 졸아든다 벼랑 끝에 가부좌 틀고
한 계절 묵언에 든 수행자(修行者). 화두를 쥔 단단한 사리 한 알 중심에 박혀 있다
바람과 천둥이 비껴간 천신만고 나뭇가지, 뜨거운 침묵에 나무가 휜다

설설 끓는 대추. 더듬더듬 말문이 트이고 시름이 녹는다 걸쭉한 눈물이 쏟아진다
뭉근히 달인 대추차 한 잔. 오래 삭힌 말씀이 달다

-마경덕 '대추. 혀가 풀리다' 모두


가을, 하면 저절로 떠오르는 낱말들이 참 많이 있다. 슬쩍 째려보기만 해도 금세 파란 물이 한 바가지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새파란 하늘, "이대로 같이 죽어버리고 싶어, 나는 너만을 사랑할 거야, 영원히" 하며 훌쩍훌쩍 울던 그 가시나의 눈물 속으로 발갛게 지던 그 가을놀, 노오란 은행잎에 또박또박 새겨진 "사랑해"라는 세 글자.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들판에 서서 낮밤 새도록 후여 후여 참새 떼를 쫓는 허수아비, 늘어진 가지마다 금빛 속내를 은근슬쩍 내비치는 석류, 따가운 가을볕을 찌르고 또 찌르다가 이윽고 제 풀에 지쳐 가슴을 몽땅 풀어헤치는 밤송이, 이에 뒤질세라 서녘 하늘로 떨어지는 가을 해를 안쓰러이 물고 발갛게 익어가는 땡감….

가을이 가진 게 어디 그뿐이랴. 어둑한 밤하늘에 휘영청 걸린 호박 같은 누우런 보름달 아래 밤을 새워 울어대는 귀뚜라미, 들판 곳곳을 누비는 여치, 베짱이, 방아깨비, 메뚜기… 가을산 깊숙이 몸을 감춘 채 몰래 익어가는 다래, 어름, 산포도, 머루, 보리수는 어쩌랴. 그 바위 위에 오도카니 앉아 도토리를 먹는 다람쥐는 또 어쩌랴.

▲ 갈빛 점이 콕콕콕 박히고 있는 대추
ⓒ 이종찬
하지만 나는 가을, 하면 그 수많은 가을 이미지 중에서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대추였다.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르겠다. 아마도 내가 어릴 적 우리 집에는 대추나무가 한 그루도 없었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해마다 추석이 다가올 무렵 오가네 텃밭에 주렁주렁 매달린 그 대추가 몹시 먹고 싶었던 기억이 오래 오래 쌓여서 그렇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하여튼 나는 가을만 되면 오가네 텃밭에서 가지가 찢어지도록 매달린 그 대추, 마악 갈빛으로 물들고 있는 그 토실토실한 대추가 자꾸만 떠올랐다.

내가 어렸을 적 살았던 우리 마을에는 대추나무가 꼭 한 그루밖에 없었다. 특히 그 대추나무는 동무들과 함께 학교로 가는 신작로 곁에 있어서 나는 그곳을 지나칠 때마다 갈빛 대추를 한 웅큼씩 따먹는 꿈을 꾸곤 했다.

그런데, 어느 해부턴가 그 대추나무에서 대추가 열리지 않았다. 아니, 대추가 열려도 가뭄에 콩 나듯이 열서너 개 남짓 매달렸다. 그때 마을 어르신들은 그 대추나무가 나이를 하도 많이 먹은 탓에 해걸이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 다음 해 가을이 되어도 그 대추나무에서는 대추가 몇 개 달리지 않았다.

"저 대추나무는 해걸이로 하는 기 아이라카이."
"그라모 니는 뭣 땜에 그렇다꼬 생각하노?"
"아, 저 대추나무도 사람맨치로 시집을 보내줘야 아(아이)로 낳던지 말든지 할 꺼 아이가. 내 말은 나무도 하늘로 봐야 별을 딴다 이 말이다."
"뭐라꼬? 대추나무로 시집을 보내야 한다꼬?"


▲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
ⓒ 이종찬

그때부터 우리 마을 어르신들은 모였다 하면 그 대추나무를 도마에 올렸다. 어떤 어르신은 대추를 딸 때 무조건 장대로 흠씬 두들겨 패면서 따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대추나무가 약이 올라 이듬해 대추를 많이 연다고 했다. 또 어떤 어르신은 대추나무 가지 사이에 굵은 나무막대기 같은 것을 끼워 넣어야 한다고도 했다.

그 해 봄, 오가네에서는 대추나무의 가장 굵은 가지 사이에 큼직한 돌멩이 하나를 끼워 넣었고, 다른 작은 가지 사이에는 참나무 막대기를 여러 개 끼웠다. 그리고 대추나무 밑둥에 세 가지 색, 그러니까 빨강, 파랑, 노랑의 천을 여러 겹 묶어놓았다. 마치 무당이 죽은 사람의 영혼 결혼식을 하는 것처럼.

그때부터 나는 그 대추나무 곁을 지나가기가 왠지 께름칙했다. 그 대추나무에 무슨 귀신이 붙어 있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간혹 바람이 불면 그 대추나무에 묶어놓은 빨강, 파랑, 노랑의 천들이 무당처럼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에 맞추어 그 대추나무도 몸을 파르르 떨며 이상한 소리를 내곤 했다.

"참! 희한한 일이제? 대추나무 저기 우째서 올 봄에 지로(자기를) 시집 보낸 거로 알고 저리도 많은 아(아이)로 낳을 수 있노. 참말로 희한한 일인 기라."
"뜬끔없이 와 또 대추나무 타령이고? 가랑이가 다 찢어지도록 주렁주렁 매달린 저 대추로 본께네 갑자기 마누라 생각이 나나?"
"그 년 그 것도 그때 지(제) 뱃속에 든 아(아이)로 지우고 도망만 가지 않았으모 저 대추 겉은(대추 같은) 아(아이)로 주렁주렁 낳았을 낀데…."


▲ 그때 그 대추나무는 시집을 보낸 뒤부터 해걸이를 하지 않았다.
ⓒ 이종찬

그랬다. 그해 가을 그 대추나무에서는 정말 신기하게도 대추가 주렁주렁 매달렸다. 어찌나 대추가 많이 열렸던지 대추나무 잎사귀보다 대추가 훨씬 더 많아 보였다. 게다가 지난 봄 대추나무 작은 가지 사이에 끼워놓았던 참나무 막대기 서너 개가 텃밭 위에 도깨비 방망이처럼 떨어져 있기도 했다.

추석이 가까워 올 무렵 오가네에서는 대추를 따기 시작했다. 그것도 긴 장대로 대추나무를 사정없이 마구 후려쳤다. 그러자 갈색 반점이 콕콕콕 박힌 탐스러운 대추가 우박처럼 두두두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나와 동무들은 그 대추나무가 있는 신작로 곁에 서서 울타리 밖으로 툭툭 튕겨 나오는 대추를 주워 먹었다.

▲ 내 기억 속의 그 대추나무에서는 지금도 대추가 알알이 영글고 있다.
ⓒ 이종찬

"어허! 쟈(쟤)들이. 인자 고마 줏어 묵어라. 애들이 대추를 너무 많이 먹으모 몸에 탈이 난다카이."
"와 예?"
"아, 대가리 소똥도 안 벗겨진 너거들이 벌시로(벌써) 장개로 갈 것도 아이고. 그라고 쇠똥가리(쇳토막)로 묵어도(먹어도) 소화 시킬 그 나이에 몸이 아푼 것은 더더욱 아일끼고."
"쪼매마(조금만) 더 줏어 묵고예. 그라고 이때가 아이모(아니면) 운제(어제) 대추로 마음껏 묵어볼 낍니꺼?"


그래. 나는 해마다 추석이 가까워오면 어릴 적 내가 살던 마을 신작로 곁에 수호신처럼 머리를 길게 풀어헤치고 서 있던 오래 된 그 대추나무가 떠오른다. 그리고 긴 장대로 대추나무를 후려 칠 때마다 울타리 밖으로 툭툭 튀어나오던 그 갈빛 대추, 그 토실토실한 대추를 주워먹고 싶다. 그때처럼 신작로에 떨어진 그 갈빛 대추를 입김으로 한번 훅, 분 뒤 입에 쏘옥 넣어 아작아작 씹고 싶다.

▲ 그때 우리 마을에서는 대추를 딸 때 장대로 마구 두들겨 팼다 .
ⓒ 이종찬

하지만 지금은 그때 그 시절이 아무리 그리워도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다. 아니, 그때 그 대추나무의 희미한 흔적조차도 사라지고 없다. 왜냐하면 나의 어린 시절 온갖 추억이 흑백 필름처럼 헤엄치고 있는 내 고향은 이미 오래 전 창원공단 조성으로 깡그리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다.

"아나!"
"이기 뭐꼬? 대추 아이가?"
"니 요새 앉았다 일어서모 자꾸 어지럽다며?"
"니가 그걸로 우째 아노?"
"이거 묵으모 금방 낫는다 카더라."


비록 내 고향은 창원공단 조성으로 모조리 사라지고 없지만 내 기억 속의 그 대추나무는 지금도 그때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 그리고 해마다 가을이 되면 내 기억 속의 그 대추나무에서는 갈빛 콕콕콕 박힌 대추가 주렁주렁 매달려 나를 끝없이 기다리고 서 있다.

그래. 그때 어지럼증이 무척 많았던 그 가시나, 내가 마음 속으로 참 좋아했던 탱나무집 그 가시나도 지금쯤 그때 내가 건네주던 그 갈빛 대추를 떠올리며 픽, 웃고 있을까. 양 볼에 예쁜 볼우물을 만들며.

▲ 가을 햇살을 물고 단맛을 온몸에 콕콕콕 심고 있는 대추.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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