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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햅쌀을 받아든 나는 고향의 들판이 너무 그리웠다. 그 들판에서 참새떼를 쫓는 어머니의 얼굴과 나락을 베는 아버지의 얼굴이 몹시 그리웠다
ⓒ 이종찬
"총각! 촌에서 소포가 왔어."
"무슨 소포요?"
"총각은 그래도 제법 반듯한 집안에서 자란 모양이야. 촌에서 자나깨나 걱정해 주는 부모님도 계시고."
"자식 걱정 안 하는 부모가 어디 있겠어요?"
"그런 말 마. 요즈음 툭 하면 이혼이다, 재산 싸움이다 해서 콩가루가 되는 집안이 얼마나 많은데."
"등 따시고 배 부른 사람들이나 하는 짓거리겠지요. 그리고 저는 감나무 밑에 입 벌리고 드러누워서 감홍시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그런 사람들이 제일 얄미워요."


제법 목덜미가 선들선들한 초가을 아침 6시, 아침밥을 짓기 위해 수돗가에서 쌀을 씻고 있는데 달셋방 주인 아주머니가 고향에서 온 소포를 건네줬다. 나는 쌀을 대충 씻어 야외용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 놓은 뒤 서둘러 소포를 풀었다. 그 소포 속에는 갓 찧은 햅쌀과 여러가지 밑반찬이 들어 있었다.

햅쌀을 바라 보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그 햅쌀은 해마다 추석상에 올릴 멧밥에 쓰기 위해 아버지께서 미리 수확한 햅쌀임이 분명했다. 갑자기 누우런 벼가 찰지게 익어가는 고향의 정겨운 들판이 떠올랐다. 그 들판에서 '날 잡아 봐라'하며 벼 포기 사이를 투둑투둑 날아다니는 살찐 메뚜기도 어른거렸다.

어머니 아버지가 못 견디게 보고 싶었다. 아마 오늘도 어머니께서는 머리에 흰 수건을 쓴 채 논두렁에 서서 "후여후여" 쉰 목소리를 내며 참새 떼를 쫓고 계실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머리에 낡은 흑백 필름이 둘러 쳐진 보릿대 모자를 쓰고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나락을 베고 계실 것이다.

"이게 무슨 냄새야? 밥 타는 냄새 아냐?"
"이크!"
"촌에서 무얼 그리 많이 보냈길레 밥 타는 줄도 모르고 있었어? 자! 이거 좀 먹어 봐. 요즈음 날씨도 선들선들하고 해서 북어국을 한번 끓여 봤어. 총각 입맛에 맞을랑가 모르겠어."


달셋방 주인 아주머니의 말에 언뜻 정신을 차린 나는 서둘러 일회용 가스레인지의 불을 껐다. 그리고 뜸이 들기를 잠시 기다렸다가 냄비뚜껑을 열었다. 말 그대로 삼층밥이었다. 위에는 설 익었고 중간에는 죽이었으며 바닥은 새까맣게 타 있었다. 하지만 삼층밥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이미 시각은 7시를 넘기고 있었다.

북어국에 삼층밥을 말아 서둘러 아침을 먹은 나는 설거지를 뒤로 미루고 신림동에 있는 사출공장으로 향했다. 그때 나는 아침 8시 출근시간에 꼭 맞추어 가는 것보다 2~30분 먼저 공장에 도착하고 싶었다. 그리고 간단한 청소를 한 뒤 작업을 할 준비를 갖추고 있는 것이 나보다 먼저 입사한 노동자들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다.

1986년 9월, 영등포구 신림동에 있는 조그만 사출공장에 출근한 나는 키가 짤딱만한 작업반장으로부터 아예 신입사원 취급을 받았다. 나이가 삼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던 그 작업반장은 내게 사출기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그 공장에서 생산하는 제품의 종류와 특성에 대해서도 가르쳐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며칠 동안 사출기에서 생산된 제품을 박스에 담아 나르거나, 사출기에서 제품을 생산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잔심부름을 했다. 담배를 사오라고 하면 내 돈으로 담배를 사다 주고, 커피를 뽑아오라고 하면 내 돈으로 커피를 뽑아 주고, 청소를 하라고 하면 공장 구석구석까지 깨끗하게 청소를 했다.

그 공장의 모든 노동자들은 제품 생산에 쫓겨 12시간 1, 2부제(1부 아침8시~저녁 8시, 2부 저녁8시~아침 8시)를 하고 있었지만 작업반장은 내게 작업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작업반장은 아마도 내가 사출기의 오랜 경력자라는 것을 알고 미리 경계를 하는 것 같았다. 아니, 나로 인해서 자신의 허술한 기능이 들통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한동안 나는 그저 작업반장이 시키는 대로 묵묵히 따라 했다. 그리고 최대한 그 공장 노동자들과 가까워지려고 애썼다. 쉬는 시간이면 내가 먼저 나서서 담배를 한 개비씩 돌렸다. 그리고 하루 일이 끝나면 그들을 신림동 시장통에 있는 그 아주머니집에 우루루 데리고 가서 국밥과 막걸리도 샀다.

"그 놈의 반장놈 때문에 정말 못해 먹겠네."
"나는 그 새끼 생각만 하면 속에서 이런 게 올라온다니깐."
"그냥 모른 척 하세요. 실력이 있든 없든 그 사람도 밥줄 끊기지 않으려고 아둥바둥거리고 있는 모습이 불쌍하지 않습니까."
"하긴, 나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이러고 있는 거지. 그거 아니면 그 새끼 그거 벌써 절단을 냈지."


그랬다. 그 사출공장에 다니는 노동자들 대부분은 삼십대에서 사십대 초반으로 봉천동과 신림동 일대의 판자촌에 살면서 어렵사리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그리고 뼈 빠지게 일을 해도 돈이 되지 않는 농삿일이 싫어서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정말 순박한 시골 사람들이었다. 목포에서, 청도에서, 공주에서, 원주 등등에서.

그들은 그동안 서울에서 뿌리를 내리기 위해 막노동뿐만 아니라 전집 세일즈맨, 보따리 장사, 포장마차 등등 온갖 일을 닥치는 대로 다 해 본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자신들이 다니고 있는 사출공장보다 조금 더 나은 일자리가 보이면 언제든지 미련없이 툭툭 털고 떠나갈 사람들이었다.

나 또한 그랬다. 그 사출공장에서 내게 과장이 아니라 부장을 맡긴다 하더라도 그 곳에 오래 머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사실, 나는 공장 생활을 다시 하려고 서울에 올라온 것이 아니었다. 아니, 평생 기름밥을 먹고 살려고 생각했다면 창원공단을 그렇게 쉬이 떠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미치고 팔짝 뛰겠네, 정말. 아, 지가 금형을 잘못 세팅해 가지고 불량품이 나온 거를 왜 멀쩡한 우리한테 마구 뒤집어 씌우느냐 이 말이야."
"쉬이! 듣겠습니다."
"들을 테면 들어보라지. 어디 지가 내한테 월급을 주나."


그때 나는 작업반장의 실력을 훤하게 꿰뚫고 있었다. 그는 제품 도면도 제대로 볼 줄 몰랐고, 사출금형을 세팅하는 방법도 몹시 서툴렀다. 게다가 사출기의 독특한 기능과 구조를 너무도 몰랐다. 간혹 사출기나 사출금형에 이상이 생기면 화부터 먼저 냈다. 그리고 결국 관리과장이 와야만 해결이 되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하루에 몇 번씩 그런 일이 생기다 보니 노동자들 사이에 불만이 터져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시치미를 뚝 잡아 떼고 아예 모른 척했다. 왜냐하면 작업반장이 쩔쩔 매는 그 문제점을 내가 나서서 쉬이 해결을 하게 된다면 그때부터 작업반장의 입장이 어찌 되겠는가.

게다가 추석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추석을 앞두고 나로 인해서 작업반장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나 또한 말썽을 일으키지 않고 추석 연휴 때까지 잘 버텨내야만 했다. 그래야만이 그동안 일한 나날을 계산해 가불이라도 해서 그리운 고향으로 내려갈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추석 연휴때 고향에 내려가야죠?"
"고향? 스스로 고향을 떠난 사람에게 고향이 어디 있어. 나는 갈라먹기 논밭 내던지고 서울로 올라올 때부터 마음 속에 고향이라는 말을 싹 지워 버렸어."
"그래도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는 추석인데 조상님께 차례는 지내야지요?"
"차례는 무슨 차례. 그냥 고향 쪽으로 냉수 한 그릇 떠놓고 절 두 번 하면 그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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