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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친구들과 들녘에서 놀다가 발길에 채이는 돌을 뒤집었을 때 오랫동안 돌에 눌려 볕을 보지 못했던 풀섶은 허옇게 변해 볕을 쬐면 오히려 말라비틀어질 정도로 약해 보였던 기억이 있다.

오랫동안 돌에 억눌려 볕을 보지 못했던 까닭에 허옇게 변해버린 풀섶 같은 사람, 염씨를 지난 수요일 아침(9월 8일) 구로에 있는 서울외국인노동자의 집/중국동포의 집에서 만났다. 그는 보호일시 해제를 받고 여수외국인보호소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날 구부정한 등에 얼핏 뒤에서 봐도 하얀 피부가 도드라진 그는 임금체불 문제로 상담을 하러온 중국인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조용조용하게 상담을 접수하는 모습은 평소 말수가 적지만, 묵묵히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를 즐겨하던 9개월여 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상담접수를 끝내고 일어서며 반가이 나의 두 손을 덥석 잡은 그의 눈빛을 보는 순간, 말문이 콱 막혔다. 그 역시 말없이 그저 웃는다.

그가 외국인보호소에 있으면서 썼던 기도문을 누군가 내 카페에 올린 것을 읽은 적이 있다고 하자, 그는 “그러셨어요?”라고 그저 짧게 답했다.

작년 11월 ‘강제추방반대와 불법 체류자 전면사면, 중국동포 자유왕래 보장’을 외치며 종로5가에 있는 기독교연합회관에서 농성을 시작할 때부터 같이 농성을 하던 그가 12월말부터 보이지 않았다. 불법체류자 단속을 하던 출입국직원들에게 잡혀 외국인보호소로 들어간 탓이었다.

당시 그는 임금체불과 명예훼손 등의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어서 법적 자문과 도움을 중국동포의 집을 통해 받고 있었다. 마침 중국동포의 집에서 소개해 준 변호사가 내 사촌형이라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느 정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당시 외국인이주노동자 운동 진영에서는 중국동포 문제와 관련해서 노선이 확연히 다른 두 주장이 있었다. 서경석 목사를 중심으로 한 조선족교회는 ‘국적 회복 운동’을 추진하고 있었던 반면, 외노협 소속단체들인 외국인노동자의집 중국동포의 집과 조선족복지선교센터 측은 ‘중국동포 자유왕래 보장’을 주장하며 농성을 하고 있었다.

자유왕래를 주장하던 중국동포의 집 소속이었던 그는 농성 기간 중에 한 기자회견에서, 중국동포들의 비참한 삶을 표현하기 위한 공연 도중 ‘칼’을 찬 모습을 하고 나섰다가 본의 아니게 언론에 많이 노출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칼을 찬 그의 모습이 ‘국적 회복 운동’ 기사와 함께 조선일보와 인터넷 조선일보에 실리면서, 중국에 있는 그의 가족들에게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영문도 모르는 가족들에게 공안들이 찾아 와 그가 한국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묻고 가는 등 분위기가 살벌해졌고, 그는 가족들로부터 계속 문의전화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이 와중에 중국에 돌아갔던 사람들 중에 ‘국적 회복 운동’을 주장하던 사람들이 공안에 잡혀갔다는 소문이 돌면서, 기사에 대한 정정보도가 없으면 중국에 돌아갔을 때,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다는 판단을 한 그는 변호사의 도움을 얻어 거대언론에 정정 보도를 요구하기에 이른다.

그의 항의에 대해 인터넷조선일보는 사진을 곧바로 삭제했지만, 정정보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변호사와 조선일보 간에 몇 차례 질의와 답변이 오가던 중 그는 출입국 직원에게 잡혔던 것이었다.

처음에 그는 화성외국인보호소에 있었지만, 임금체불로 노동부에 진정된 부분과 명예훼손 건으로 변호사가 의견서를 제출한 점 등이 확인되어 즉각적인 강제출국이 이뤄지지 않았고, 그는 결국 여수외국인보호소로 이송되었다.

여수에서의 생활을 말하는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여수는 보호소가 아니라, 감옥이라요. 고개를 겨우 드러낼 정도의 창문만 있고, 아침저녁 볕 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예요. 해뜨는 걸 구경할 수가 없어요. 워낙에 오래되고 낡은 감옥시설이라요.”
“보호소라 해놓고 감옥에 집어넣었으니, 오죽했겠어요. 그곳에서 그 친구도 만났어요. 명동에서 데모하던 네팔 젊은 친구요.”
“샤말 타파요?”
“예, 그 친구 젊은 사람이 의지가 대단해요. 오랫동안 단식하다가 결국 쫓겨났지요.”

보호소라 해놓고 감옥에 집어넣었다는 말이 목에 걸렸다. 일반적으로 여권 미소지자 등 출국요건 구비기간이 일주일 이상 소요될 것으로 판단되는 자들은 화성외국인보호소에 수감되고, 더 오래 걸리는 경우는 여수로 보내기 때문에, 그는 부당하게 9개월여 간이나 감옥 생활을 한 셈인 것이다.

그는 9개월여나 감옥 같은 생활을 하고 나왔지만, 달리 원망이나 불만은 없이 평온한 모습이었다. 아니 막노동으로 늘 검게 그을렸던 그의 얼굴을 대하다가 핏기 없어 보이는 하얀 피부 탓에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9개월여의 생활이 그를 체념할 것은 체념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재중동포! 고국이라 찾아왔지만, 동포로 인정받지도 못하고(재외동포법이 개정되어 법률적으로는 동포이지만, 시행령이 아직 제정되지 않아), 임금을 못 받아도, 억울한 일이 있어도 그저 조용히 지낼 부분은 조용히 지내는 것이 속 편하다는 것을 충분히 체득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런 안타까움에 그와의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헤어질 때까지 앞으로 귀국을 할 것인지 여부조차 묻지 못하고, 아쉬움만 남기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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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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