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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비음산 다랑이논에 우뚝 서있는 허수아비
ⓒ 이종찬
나는 나는 외로운 지푸라기 허수아비
너는 너는 슬픔도 모르는 노란 참새
들판에 곡식이 익을 때면
날 찾아 날아온 널
보내야만 해야 할 슬픈 나의 운명
훠이 훠이 가거라 산 너머 멀리멀리
보내는 나의 심정 내 님은 아시겠지
석양에 노을이 물들고
들판에 곡식이 익을 때면
노오란 참새는 날 찾아와 주겠지

훠이 훠이 가거라 산 너머 멀리멀리
보내는 나의 심정 내 님은 아시겠지
내 님은 아시겠지

-임지훈 작사, 박철 작곡 '참새와 허수아비' 모두


▲ 벼가 누렇게 익어가고 있는 논배미
ⓒ 이종찬

▲ 열렸네, 금싸라기 열렸네
ⓒ 이종찬
추석이 가까워지면서 들판이 온통 황금빛으로 노랗게 물들고 있다. 드문드문 지난 태풍 때 맥없이 자빠졌다 이제서야 몸을 추스리며 엉거주춤 일어서고 있는 벼들도 더러 보인다. 지난 모내기 때 논배미에 심었던 논두렁 콩들도 어느새 알찬 꼬투리를 주렁주렁 매단 채 노랗게 물들고 있는 잎사귀를 파르르 떨고 있다.

문득 저만치 논둑에서 파아란 담배연기가 한숨처럼 포옥 피어오른다. 풍년 앞에서 누가 내쉬는 슬픈 한숨일까. 쌀개방으로 인한 추곡 수매가 걱정 때문일까. 아니면 '죽었으면 죽었지 애물단지 같은 농사는 더 이상 못 짓겠다'며 도회로 떠난 뒤 소식조차 끊겨버린 자식에 대한 애타는 그리움 때문일까.

내가 어릴 적, 우리 마을 어르신들도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논배미에 앉아 파아란 담배연기를 한숨처럼 포옥 내쉬곤 했다. 그때 나는 소풀을 열심히 베면서도 마을 어르신들이 왜 토실토실한 벼 알갱이를 만지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내쉬는 지 그 이유를 잘 몰랐다. 그저 쌀농사가 지난 해보다 조금 잘못되어서 그러는 줄로만 알았다.

▲ 요즈음 이런 허수아비를 보기도 쉽지 않다
ⓒ 이종찬

▲ 참새를 막기 위해 아예 그물을 쳐놓은 들판
ⓒ 이종찬
"이 놈의 농사가 정말 애물단지라카이. 아, 잘 되모 추곡 수매가 때문에 걱정, 못 되모 굶어죽을까 봐 걱정 아이더나."
"그렇다꼬 우짤끼고. 죽으나 사나 송충이는 고마 솔잎만 묵고 살아야제. 최산 아들내미(아들놈) 좀 봐라. 공장에 댕긴다꼬 까불어쌓더마는 고마 높은 곳에서 떨어지가꼬 죽었뿟다 아이가."


근데, 그게 아니었다. 내가 소풀을 베다가 가만이 어르신들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어보면 그 한숨은 다름 아닌 추곡 수매가 걱정 때문이었다. 아둥바둥거리며 뼈 빠지게 농사를 지어봐야 자식들 학비도 되지 않는 갈라먹기 농사 때문이었다. 게다가 농사를 버리고 도시로 나가서 공장에 취직을 해봤자 막일을 하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거였다.

그 당시 새치골 가는 도랑가 옆에 살며 갈라먹기 농사를 지었던 그 아저씨도 돈을 벌어오겠다며 우리 마을을 떠났다. 그리고 얼마 뒤 대구인가 포항인가에 있다는 어느 공장에 취직이 되었다며, 매달 부모님에게 돈까지 꼬박꼬박 부쳐온다며, 온 마을이 떠들썩했다. 근데, 그 해 추석이 다가올 무렵 그 아저씨가 그만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슬픈 소식이 들려왔었다.

"후여후여~ 올개(올해)는 웬 놈의 메뚜기하고 참새가 이리도 많은지 모르것네. 허새비로 몇 개 만들어 꽂아놓든지 해야지 원. 후여후여~"
"그래봤자 별 소용이 없다카이. 요새는 참새떼들도 어찌나 영리한지 아예 허새비 머리꼭대기에 앉아서 짹짹거리고 있다카이."
"깡통을 달아보까?"
"고마 놔주뿌라. 지깐 기(제깐 게) 나락을 까묵으모 울매나 까묵을끼라꼬."


▲ 잘 익어가고 있는 벼
ⓒ 이종찬

▲ 풍년은 들었으나 정부의 쌀수입개방정책으로 농민들의 마음에는 한숨만 늘어난다
ⓒ 이종찬
1972년,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그해 가을은 메뚜기떼뿐만 아니라 참새떼도 유난히 많았다. 그래서 마을 어르신들은 벼논마다 짚으로 허수아비를 서너 개 만들어 세우고, 그 허수아비를 중심으로 반짝거리는 줄에 딸랑거리는 깡통까지 줄줄이 매달았다. 하지만 참새들은 매우 영리했다. 아마도 사람과 허수아비를 분명하게 구분할 줄 아는 것만 같았다.

진종일 사람이 논둑에 서서 지키고 있지 않으면 눈에 쥐가 나도록 반짝거리는 줄도 참새들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간혹 바람이 불어와 반짝거리는 줄에 매달린 깡통이 꽤 요란스럽게 소리를 내도 참새들은 '어머! 깜짝이야' 하는 것처럼 포로롱 날아오르다가 이내 벼알갱이에 붙어 찰진 벼를 낱낱히 쪼아먹었다.

나 또한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우리 논 주변으로 나가 소풀을 베면서 참새떼를 쫓아야만 했다. 그때 우리 마을 가을 들판은 여기서 후여후여~ 저기서 후여후여~ 하는 소리로 가득했다. 마치 들에 나갔다 집으로 돌아오신 아버지께서 황토마당에 지게를 내려 놓으시면서 후유, 하고 내쉬는 한숨소리처럼.

하지만 참새떼들은 쉬이 포기하지 않았다. 잠시라도 논둑에 서서 줄을 흔들지 않으면 어느새 포로롱 하고 날아와 살찐 벼알갱이를 순식간에 죽정이로 만들어 버렸다. 혹시나 싶어 허수아비 얼굴을 붉은 매직으로 흡혈귀처럼 무섭게 그려놓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보다 못한 마을 어르신들은 떨어진 모기장으로 벼논을 덮기도 했다.

"이래가꼬는 도저히 안 되것다. 그물을 치든지 해야지. 아마도 저놈의 참새떼들이 나락 한 가마니 정도는 빨아먹었을 끼야."
"우짜다가(어쩌다) 농사가 쪼매 잘됐다 싶으모 저놈의 참새들이 난리로 피우니, 원. 그라이 너거들은 우쨌거나 공부로 열심히 해라."


▲ 황금빛 들판을 바라보면 절로 배가 부르다
ⓒ 이종찬

▲ 어디선가 후여후여 하고 참새를 쫓는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 이종찬
지금 내가 서 있는 비음산 다랑이논에도 그때 그 기억을 되살려주기라도 하듯이 허수아비 하나가 우뚝 서 있다. 그리고 그 허수아비를 비웃으며 참새떼가 포로롱 포로롱 날아다니고 있다. 하지만 '이 놈의 농사는 아무리 뼈 빠지게 지어봤자 겨우 입에 풀칠밖에 하지 못한다'던 어머니의 말씀은 어디에도 들리지 않는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의 인생이 송두리째 담긴 그 기름진 들판은 이미 오래 전에 창원공단 조성으로 사라지고 없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도 그 고통스런 나날들에 피땀을 쏟으시다가 오남매만 남겨둔 채 한많은 이 세상을 훌쩍 떠나가 버렸다. 그나마 비음산 자락에 흔적처럼 조금 남은 이 다랑이논이 그때 그 기억을 희미하게 되새겨 줄 뿐이다.

해마다 이맘 때가 되면 나는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들판 한가운데 내 옷을 입고 참새에게 희롱을 당하던 그 허수아비가 생각난다. 그래. 어쩌면 지금의 나도 그때 그 허수아비처럼 이 세상 사람들에게 희롱을 당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붉은 머리띠를 주름살처럼 이마에 매고 쌀개방 반대를 외치는 농민들의 안쓰러운 함성처럼.

▲ 후여후여~ 쌀개방귀신 썩 물렀거라
ⓒ 이종찬
후여후여~
물렀거라 물렀거라
농산물수입귀신 썩 물렀거라
후여후여~
물렀거라 물렀거라
쌀개방귀신 썩 물렀거라
후여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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