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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읍 조금 못미처 '태식 이발관'이라는 변두리 이발소에 머리를 맡기고 깊은 잠이 들었다. 꿈도 꾸었다. 이발사 아저씨는 코를 골고 침까지 흘리며 자는 나를 깨워 가며 간신히 머리를 깎아 보통 사람 깎는 것보다 두 배는 시간이 더 걸렸다고 한다.

머리를 깎고 나서 내친 김에 그 동안 시간이 없어 미뤄 두었던 고무신을 사야겠다고 승합차를 읍내 시장을 향해 돌렸다. 처서가 지나자 하늘은 높고 살랑살랑 선선한 바람이 분다.

▲ 내 고무신.
ⓒ 박철
그러나 신발가게마다 내 발에 맞는 고무신은 없었다. 네 번째 신발가게에서 드디어 내 발 크기에 맞는 고무신을 찾았다. 소풍 가서 보물이라도 찾은 것 같다. 참 기뻤다. 주인 아저씨에게 같은 크기의 신발이 몇 켤레가 있냐고 물으니 4켤레가 있다고 한다.

"그러면, 그거 몽땅 주시오!"하고 값을 물으니 한 켤레에 3천원 도합 1만2000원이란다. 와! 싸다. 내가 "고맙다"고 몇 번이고 인사를 하자 주인아저씨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니, 물건을 판 사람이 인사를 해야지, 어떻게 물건을 사는 사람이 인사를 합니까? 내가 20년 동안 여기서 신발가게를 했지만, 똑같은 문수로 두 켤레를 사 간 사람은 있어도 아저씨처럼 4켤레를 사간 사람은 처음 보겠시다."

나는 다시 창후리 배터로 자동차 운전대를 돌렸다. 거기서 우리 교회 김사규 장로님 내외분을 만났다. 형님 같으신 분이다. 이 분을 만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운 좋게 얼마 기다리지 않아 배를 탈 수 있었다. 김 장로님은 날씨도 더운데 점심으로 냉면을 사 주시겠다고 한다. 김 장로님 내외와 나까지 세 사람이 대룡리 ○○식당에서 냉면을 먹는데 나는 단숨에 먹었고 조금 양이 적은 듯하여 국물까지 다 마셨다. 속까지 시원해진다. 부러울 게 없다.

대룡리에서 지석리까지 달려오는 길에는 너른 들판이 펼쳐진다. 벌써 고개를 숙인 벼이삭도 있다. 잠자리들이 무리를 지어 낮게 비행하고 있다. 해바라기 꽃도 노랗게 활짝 피었고 코스모스도 가을 인사를 한다. 하늘은 높고 맑다.

불현듯 나는 깊은 행복감에 휩싸였다. 산뜻하게 머리도 깎았고, 적어도 이태 동안은 신발 걱정 안 해도 될 것이고, 김 장로님을 만나 냉면까지 얻어 먹고 황금 들판을 달려 오는데 명치 끝에서부터 감사가 밀려 오는 것이었다.

행복이라는 게 무엇인가? 많이 소유해야 행복할 것 같지만 적게 소유하면서 만족하는 것이 더 큰 행복이다. 많이 소유하면 더 많이 만족해야 하는데 사실은 많이 소유할수록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것을 바라게 마련이다.

소유는 또 다른 소유를, 욕심은 또 다른 욕심을, 집착은 또 다른 집착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단출하고 간소하게 살며 작은 것에서 만족하고 살면 이 세상 그 무엇도 나를 괴롭힐 수 없다. 가난하라는 것이 아니라 소박하게 적은 것에도 충분히 만족하며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가을의 길목. 하늘은 높고 수수가 익어간다.
ⓒ 박철
부자는 재산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다. 재산이 많아서 부자가 아니라 욕심이 없어야 부자이고, 그것으로 충분할 때 부자이며, 마음이 충만할 때 부자가 아니겠는가.

많이 가지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에너지를 쏟아야 하고 가진 것이 없어질 때 괴로움을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적게 가지면 아무런 걸림도 없이 자유로울 수 있다. 적게 가졌을 때, 욕심을 다 놓아 버렸을 때, 지금 이 자리에서 만족할 수 있을 때, 그 때 비로소 행복은 시작된다.

가지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많이 가지더라도 갖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많은 것을 소유하고서도 소유물에 대한 집착을 놓아 버림으로써 다 가지고도 다 가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무엇이든 자기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내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괴로울 일이 많은 사람이다. 내 것이면서도 내 것이 아닌 줄 알아야 한다. 대상에 집착하는 마음을 놓아 버리고 순수하고 맑은 마음으로 모든 것을 소유함 없이 소유해야 한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

행복이란 집착이나 욕망에서 나오지 않는다. 만약 행복이 집착과 욕망에서 얻어지는 것이라면, 이 세상은 저마다의 욕망을 채우려는 사람들로 인해 걷잡을 수 없이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사람들이 불행한 이유는 단 한가지뿐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행복하다는 사실을 잊어 버리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주는 고마움을 그것을 잃어 버리기 전까지는 느끼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잃고 난 후에야 그 소중함을 깨닫지만 이미 때는 늦어 버린 뒤이다.

▲ 가을 햇살에 사과가 튼실하게 익어 가고 있다.
ⓒ 박철
눈을 들어 세상을 보면 우리는 열 손가락으로는 다 헤아릴 수 없는 행복에 둘러싸여 있다. 우리가 불행을 헤아리는 데만 손가락을 사용하기 때문에 그 많은 행복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눈을 들어 주위를 다시 한번 살펴 보라. 그리고 찬찬히 내 주위에 있는 행복을 손가락 하나하나 꼽아 가며 헤아려 보라. 이미 내가 가진 것으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지 않겠는가?

행복이란 기쁨과 슬픔의, 인생 전체를 통해 알게 되는 나에 대한 신뢰와 만족이고 나를 아름답게 자라게 하는 기쁨이다. 내가 나를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빛이다.

가을은 점점 깊어져 가고 있다. 행복이라는 파랑새는 이미 내 마음 안에 있음을 기억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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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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