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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잘 영글고 있는 가지
ⓒ 이종찬

그해 여름은 목덜미와 등에 땀띠가 닭살처럼 송송 솟도록 무더웠다. 앞산가새 다랑이밭에서 자라는 고추와 오이, 참깨, 들깨, 고구마, 호박 등의 잎사귀도 바싹바싹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모가 마악 벼꽃을 피우기 위해 대를 올리기 시작하는 논바닥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발바닥처럼 쩍쩍 갈라졌다.

홀랑 벗고 도랑가 둑 끝에 서서 '점바야' 하고 풍덩 뛰어내리며 멱을 감던 우리집 앞 도랑물도 바닥을 드러냈다. 도랑물이 점점 말라가자 가끔 도랑가 납작한 돌 위에 올라와 몸을 말리곤 하던 자라도 보이지 않았다. 얉은 물 속의 돌멩이에는 파란 이끼가 끼기 시작했고, 그 흔한 가재도 잘 보이지 않았다.

바늘처럼 쏟아지는 땡볕이 우리 마을과 들판을 가마솥 삼아 허연 김이 모락모락 나도록 푹푹 찌는 것만 같았다. 신작로에 나가면 진초록빛으로 펼쳐진 들판이 아지랑이 속에 마구 꼬물거리고 있었다. 해가 질 때면 어디선가 떼지어 날아와 시야를 어지럽히던 그 새까만 날파리떼처럼.

"후우! 하늘에 기우제로 지내던지 무슨 수를 내야지, 이래 계속 가다가는 올 농사 몽땅 망치게 생겼구먼."
"아, 작년에는 오데 안 그랬능교? 해마다 여름철만 되모 겪는 일로 가꼬 새삼스레 머슨 걱정을 그리도 해쌓소? 자요! 썬한(시원한) 가지냉국이나 한 그릇 들고 정신 좀 차리소."
"올개(올해)는 더 심한께네 그라지. 어~ 정말 썬하다."


모든 것이 죄다 타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우리집 뒷마당 텃밭에 심어둔 가지밭에서는 까만 자줏빛 가지가 땡볕을 비웃기라도 하듯 주렁주렁 매달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우리집 뒷마당 텃밭에 심어둔 가지밭에는 부모님과 우리 형제들이 물독에 담긴 물을 마실 때마다 바가지에 남은 물을 조금씩 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 연보랏빛 추억처럼 매달린 가지꽃
ⓒ 이종찬

▲ 금방 딴 가지를 삶아 쭉쭉 찢어 가지냉국을 만들어 보자
ⓒ 이종찬

그 당시, 어머니께서는 끼니 때마다 늘 다른 반찬을 올렸다. 열무김치를 빼고는. 아침밥상에는 주로 매운 풋고추와 애호박, 미더덕을 넣은 된장찌개와 감자볶음을 올렸다. 그리고 점심밥상에는 풋고추와 막된장, 오이냉국을, 저녁밥상에는 고구마줄기 볶음과 호박잎 쌈, 가지냉국을 올렸다.

어머니께서는 여러 가지 반찬을 참 잘 만드셨다. 아니, 지혜로웠다. 몇 안 되는 찬거리를 가지고 끼니 때마다 늘 다른 반찬을 골고루 올려 아버지와 우리 형제들 입에 물리지 않게 하셨다. 그중 어머니께서 저녁 때마다 만드는 가지냉국은 정말 시원하면서도 맛이 좋았다.

정말, 어머니의 손은 요술방망이 같았다. 진종일 논과 밭에서 살다시피 하는 어머니께서 부엌에 들어가시기만 하면 금세 맛있는 밥상이 차려졌다. 특히 어머니께서는 그 시원한 가지냉국을 순식간에 만드셨다. '가지냉국 나와라, 뚝딱!'하면 맛있는 그 가지냉국이 어머니의 손끝에서 저절로 나오는 것처럼.

어머니께서 가지냉국을 만드는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우선 뒷마당 텃밭에 가서 싱싱한 가지를 몇 개 따서 흰 솥에 물을 붓고 삶았다. 이어 삶은 가지를 손으로 얇게 죽죽 찢어 소금과 간장, 설탕, 식초, 다진마늘을 넣고 손으로 비볐다. 그리고 시원한 우물물을 부은 뒤 실파를 얹어 간을 보면 그만이었다.

"또 가지냉국이가?"
"가지 이기 사람 몸에 울매나 좋은 줄 아나. 특히 요즈음처럼 땀을 많이 흘리고 나모 몸이 허약해지고 빈혈이 생기기 쉽다 아이가. 그런 때 가지 이거로 묵으모 금방 괜찮아지는 기라."
"생가지 이거로 썰어가꼬 땀띠나 티눈 난 데 발라보라모. 그라고 딸네미들 주근깨 난 데도 울매나 좋다꼬."


▲ 가지는 빈혈과 고혈압에도 아주 좋다
ⓒ 이종찬

▲ 가지를 송송 썰어 말려놓았다가 나물을 해먹어도 그만이다
ⓒ 이종찬

하지만 나는 가지냉국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가지냉국을 한 그릇 먹었을 때에는 시원하고 기분까지도 좋아졌지만 욕심을 내서 두어 그릇 먹고 나면 이상하게 온몸이 가려웠다. 그리고 자고 일어나면 입 주변에 물집이 생겼다. 그렇게 한번 물집이 생기면 일주일 정도 나를 몹시 괴롭혔다.

"얼레꼴레리~ 얼레꼴레리~"
"나는 봤다~ 나는 다 봤다~"
"에이~ 하필이모 입수구리(입술주변)에 이런 기 날 끼 뭐꼬? 날라카모 어디 안 보이는 데 나던지. 하여튼 그놈의 가지냉국 때문에…."


나는 그럴 때마다 욕심을 부린 나를 탓하지 않고 애매한 가지냉국만 원망했다. 동무들도 그런 나를 보고 우스워 죽겠다는 듯 몹시 놀려댔다. 동무들은 내 입술 주변에 생긴 흉악한(?) 물집이 가지냉국을 먹어서 그런 게 아니라 탱자나무집 그 가시나와 남몰래 뽀뽀를 하다가 생긴 상처라고 우겨댔다.

그 때문에 한동안 그 가시나가 멀찌감치서 나를 피하기도 했다. 아니, 내가 먼저 피한 것인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입술 주변에 물집이 징그럽게 숭숭 솟은 내 모습을 그 가시나에게 보여주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나는 입술 주변에 보기 흉하게 솟아난 그 물집이 사라질 때까지 동무들의 놀림감이 되었고, 늘 손으로 입술을 가린 채 고개를 푹 수그리고 다녀야만 했다. 그 무더운 여름철에 말이다. 또한 그 때문에 한동안 그 가시나와의 사이도 몹시 서먹해졌고, 나중에는 괜한 오해까지 사기도 했다.

▲ 가지를 송송 썰어 땀띠 난 곳이나 티눈, 주근깨가 난 곳에 문지르면 땀띠와 티눈, 주근깨가 깨끗히 사라진다
ⓒ 이종찬

▲ 가지는 찬 음식이므로 몸이 찬 사람이나 기침을 하는 사람에게는 좋지 않다
ⓒ 이종찬

"가지 이기 찬 음식 아이가. 그라이 열이 많은 사람한테도 아주 좋다카더라."
"그라모 가지 이기 여름철에는 억수로 좋은 음식이네."
"몸이 찬 사람이나 기침하는 사람한테는 안 좋다 카더라."


가지는 빈혈과 주근깨 예방뿐만 아니라 땀띠나 티눈이 난 곳에도 아주 좋다고 한다. 참고로 주근깨가 많은 사람은 가지의 생가지를 잘라서 얼굴에 자주 문지르면 주근깨가 사라지고, 빈혈이 심한 사람은 마른 가지 잎을 갈아서 따뜻한 술이나 소금물에 타서 마시면 빈혈을 치료할 수도 있다고 한다.

가지는 체력이 약한 사람이나 나이가 많이 드신 분, 고혈압 증세가 있는 사람에게도 아주 좋다. 이런 분들은 가지를 삶은 물을 자주 마시거나 가지로 만든 요리를 자주 먹는 게 좋다. 최근 외국의 한 농작물학회에서는 가지에 발암성을 억제하는 물질인 폴리페놀이 들어있다 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그래. 유난히 무더운 올여름에는 구하기도 쉽고 값도 싼 가지 서너 개 사다가 가지냉국을 만들자. 땀을 많이 흘려 입맛조차 없을 때 얼음 서너 개 동동 띄운 가지냉국에 식은 밥을 말아 후루룩 마시다 보면 어느새 더위가 저만치 물러가리라. 그리고 남은 가지는 부엌칼로 송송 썰어 땀띠나 티눈 난 곳에 슬슬 문질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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