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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봉사 전경
건봉사 전경 ⓒ 김정봉
재작년 건봉사의 능파교가 보물로 지정되었다는 반가운 소식과 함께 지난 6월, 능파교가 보수작업 중 훼손되었다는 뉴스를 접하고 이제는 꼭 한 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하고 길을 나섰다.

속초에서 건봉사를 가려면 고성 죽왕면을 거쳐야 한다. 죽왕면 일대는 8년 전에 엄청난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곳이다. 이런 규모의 산불이라면 적어도 50년이라는 세월이 걸려야 온전한 생태계를 되찾는다고 한다. 그래도 불에 데인 맨살은 치유가 된 듯 키 작은 잡목이 맨살을 덮고 있다.

청간정, 천학정, 어명기가옥, 왕곡마을을 뒤로 하고 길을 재촉하여 대대리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접어드니 여기는 죽왕면의 풍경과 달랐다.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으나 그 숲이 나무를 삼켜 버리고 있는 형국이다. 이 숲에 빠져들면 영영 헤어나지 못할 것 같다. 강한 빗줄기도 조용히 숨죽이며 떨어지는 낙숫물이 되어버릴 것 같고 강렬히 내려 쬐는 햇빛도 그 빛을 잃고 스러질 것 같다.

그리 높지 않은 고개 하나를 넘으면 비교적 넓은 터가 나온다. 길 왼쪽으로 금세 눈에 뜨일 정도로 넓은 부도밭이 있다. 부도탑과 부도비가 키재기라도 하듯 옹기종기 모여 있다. 나중에 들를 요량으로 부도밭을 지나쳐 흙 길을 밟고 올라서니, 족히 100살은 넘었음직한 기품있는 소나무가 길을 내주고 비켜서 있다. 길 양 옆으로 서 있는 모양이 마치 일주문을 보는 느낌을 준다.

난 보통 안내판을 보지 않는데 여기 안내판은 다른 데하고 달라 눈길을 주었다. 1920년의 건봉사 전경을 담은 사진이 있는데, 한국전쟁 이전의 건봉사의 규모를 짐작케 해준다. 복원 작업이 한창이라 몇 년 후에는 이 사진 속의 모습이 실제의 모습이 될 것이다.

1920년대 건봉사 전경
1920년대 건봉사 전경 ⓒ 김정봉
건봉사의 역사는 1500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이론의 여지는 있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사력에 따르면 신라 법흥왕7년(520)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758년에는 염불만일회를 개최했는데 신도가 1820명 정도 참석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대사가 승병 6000여 명을 이 곳에서 훈련했다고 하니 이 절의 규모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건봉사는 설악산의 신흥사와 백담사, 양양의 낙산사를 말사로 거느렸던 대찰이었다.

고성은 일단 산불이 나면 큰불인가 보다. 죽왕면 산불이 나기 전 100여전 1878년에 이 곳에 큰 산불이 있었다. 이 때 건물 3183칸이 소실되었다 한다. 그 후 앞에 있는 1920년대 건봉사 사진처럼 복원이 되기도 했으나 한국전쟁으로 다시 대부분의 건물들이 소실되었다.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문화재를 남기지 못한 연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절에 극락정토로 향하는 훌륭한 문이 없을 리 없다. 초입의 문을 일주문, 가운데 문을 천왕문, 마지막 문을 해탈문 혹은 불이문이라 하는데 이 절에는 불이문(不二門)이 있다. 1920년에 만든 것인데 한국전쟁의 화를 면한 유일한 건물이다. 네 개의 기둥에 팔작지붕을 얹어 그냥 보아서는 문이라고 하기보다는 집이라 할 만하다.

불이문/한국전쟁 때 불타지 않은 유일한 건물. 돌기둥에 새긴 금강저의 무늬가 이채롭다
불이문/한국전쟁 때 불타지 않은 유일한 건물. 돌기둥에 새긴 금강저의 무늬가 이채롭다 ⓒ 김정봉
불이문 현판은 해강 김규진의 글씨다. 해강은 백양사, 전등사, 가야산해인사, 상왕산개심사 등의 현판을 쓴 분인데 대자를 잘 써서 전국의 명승고적, 사찰 등 그의 필적이 닿지 않은 곳이 드물 정도다.

기둥의 특이한 무늬는 금강저로 손잡이 끝에 예리한 칼날이 달린 방망이 모양의 무기로 천둥을 본뜬 것이라 한다. 천왕문의 사천왕처럼 사악한 것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 것으로 보면 된다.

루드베키아가 심어진 화단을 지나면 왼쪽으로 탁 트인 하늘을 배경으로 돌기둥이 시원스레 서 있다. 사각 돌기둥에는 '南無阿彌陀佛', '나무아미타불', '대방광불화엄경' 등 불경이 적혀 있고 또 '불기2955년 무진 여름'이라고도 쓰여 있어 1928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돌 위에는 새가 앉아 있는데 오리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봉황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냥 오리 같이 생긴 봉황이라고 해두자.

돌솟대/기둥위의 새가 오리인지,봉황인지? 그냥 오리 같이 생긴 봉황이라 하자
돌솟대/기둥위의 새가 오리인지,봉황인지? 그냥 오리 같이 생긴 봉황이라 하자 ⓒ 김정봉
이 돌기둥이 산신각처럼 불교와 민간신앙의 융합을 꾀한 상징물이라면 솟대로 여겨서 오리가 맞을 것 같기도 하지만, 이 절이 봉황과 관련이 깊은 절임을 감안하면 봉황이라 생각해도 될 것 같다.

절 이름이 건봉사(乾鳳寺)이고 대웅전 앞에 봉서루(鳳捿樓)가 있으니 이 돌기둥을 조각하는 사람은 봉황이라 생각하고 조각했을 것이다. 오리 든 봉황이든, 아무튼 다른 곳에서는 구경하기 어려운 모습이라 좋은 구경거리가 될 만하다.

적멸보궁을 향하여 가다 보면 오른편에 '금강산건봉사' 현판이 걸린 봉서루가 있다. '금강산 건봉사' 현판이 이채로운데 금강산 줄기가 이 곳에까지 이어져 건봉산을 만들고 건봉사는 이 건봉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어 이렇게 불린다.

봉서루/'금강산건봉사' 현판이 이채롭다
봉서루/'금강산건봉사' 현판이 이채롭다 ⓒ 김정봉
산은 아름만 다를 뿐 하나로 이어지고 물은 흘러 이 곳까지 이르며 큰 구름이 금강과 향로봉을 하나로 덮으니 '건봉산건봉사'를 '금강산건봉사'로 부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대웅전을 가려면 이 봉서루 밑을 통과하여 가야 되는데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이 곳과 봉서루를 잇는 능파교가 사라져 버렸다. 얼마 전 보수작업 중 무너져버린 것이다. 홍예를 이루는 '30여 구의 시체'가 양지바른 언덕 위에 하얀 천으로 덮인 채 마치 관 속에 들어간 시체처럼 가지런히 누워 있다.

능파교의 무지개를 이루는 30여개의 돌이 관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다
능파교의 무지개를 이루는 30여개의 돌이 관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다 ⓒ 김정봉
안타까움과 서운함에 앞서 약간은 분노가 이는 마음을 달래며 발걸음을 적멸고궁을 향해갔다. 적멸보궁 가는 길은 능파교에서 상한 마음을 달래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산 아래 고즈넉하게 홀로 서 있는 산신각과 석단, 연지를 맴도는 사람 손을 타지 않은 잠자리…. 어느덧 발은 부처님의 치아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에 닿는다.

좁은 공간에 멋진 담으로 둘러 쌓여 있어 고즈넉함을 더하는데 하늘을 사이에 두고 처마에 매달려 있는 풍경과 진신사리탑 머리가 한눈에 들어와 멋진 장면이 연출된다. 적멸보궁에서 살짝 터진 문을 통해 보이는 건봉사의 전경은 압권이다.

적멸보궁에서 바라본 건봉사터
적멸보궁에서 바라본 건봉사터 ⓒ 김정봉
비록 새로 지은 건물이라도 대웅전을 빼놓고 갈 수 없다. 건물은 새로운 것이나 주춧돌은 예전 것 그대로이니 품위는 살아 있다. 대웅전 앞에는 올 봄에 완공된 봉서루가 있다. 봉황이 깃든 누각이라 하여 봉서루라 하는데 봉서루 처마에는 봉황이 깃들기 전에 제비가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현재의 건봉사의 사세(寺勢)를 감안하면 봉황 대신 제비가 더 어울릴 듯도 하다.

봉황이 깃들기 전에 제비가 먼저 자리를 차지하였다
봉황이 깃들기 전에 제비가 먼저 자리를 차지하였다 ⓒ 김정봉
여행의 마무리는 절 초입에 있는 부도밭에서 하는 것이 좋다. 50여 기가 넘는 부도와 12기의 비가 흩어져 있는 듯하나 질서 있게 모여 있어 여러 가지 작물을 심어 놓은 밭을 보는 것 같다. 그야말로 부도밭이라 할 수 있다. 이 부도밭을 보고 있으면 옛날의 건봉사가 어떠했는지 상상해볼 수 있다.

건봉사 부도밭
건봉사 부도밭 ⓒ 김정봉
잘 생긴 부도 밑에 몸통은 어디가 버리고 부도비의 머리만 덩그렇게 남아 있다. 한국전쟁의 상흔인지 그 예전의 전란 탓인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에 주인을 잃고 녹슬어가는 철모를 보는 것 같다.

부도비의 일부, 주인 잃은 철모가 연상되는 것은 왜일까?
부도비의 일부, 주인 잃은 철모가 연상되는 것은 왜일까?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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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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