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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시도가 실패로 끝난, 당시 베를린사령부가 있던 벤들러블록(Bendlerblock).
ⓒ 강구섭
지난 7월 20일은 2차 대전 당시 독일군내 일부세력이 시도한 히틀러 암살기도가 실패로 끝나고 핵심인물들이 사형을 당한 1944년 7월 20일 사건이 60주년을 맞이하는 날이었다. 1933년 이후 지속된 히틀러 독재 저항역사의 중요한 전기로 평가되고 있는 이 사건이 발생한지 60주년이 되는 올해에 독일에서는 7월 20일을 전후로 이 사건을 다시 돌아보고 그것의 역사적 의미를 평가하는 여러가지 행사가 활발하게 진행됐다.

학계에서는 이 사건과 관련된 학술행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TV, 신문 등 언론 매체에서는 당시 기록을 바탕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비롯해 사건과 관련된 다양한 내용이 지속적으로 다루어졌다. 한 매체에는 지금은 60대가 된, 한 희생자의 아들이 출연해 사건에 직접 가담했던 아버지가 사형을 당한 이후 어머니와 형은 감옥에 수형되고 당시 젖먹이던 자신은 고아원에 맡겨졌던 상황을 소개하기도 했다.

1944년 7월 20일, 볼프샨쩨의 동프로이센사령부(현재 폴란드 지역)에서 히틀러와 그의 참모 2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전황보고를 하게 된 베를린 사령부 소속 장교(Oberst) 스타우펜베르그는 히틀러에 근접한 자리에서 보고를 마친 후 시한폭탄이 설치된 가방을 놔둔 채 오후 12시 40분경 그곳을 떠난다.

잠시 후 200M 가량 떨어진 자리에서 굉음을 동반한 폭발을 확인한 스타우펜베르그는 히틀러가 죽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다음 단계의 행동을 실행하기 위해 항공편을 통해 베를린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당시 폭발로 현장에 있던 히틀러 수뇌부의 다수가 부상을 당하고 4명이 죽었으나 히틀러는 가벼운 부상만 당하는 데 그친다.

암살시도 가담자였던 볼프샨쩨 사령부 통신국 책임자 펠기벨(General)은 오후 1시 무렵 먼 발치에서 히틀러가 이동하는 것을 확인하고 베를린 사령부에 있는 다른 가담자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연락을 시도했다. 또한 펠기벨은 베를린에 있는 가담자들에게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기 위해 폭발 사건 후 히틀러 수뇌부와 다른 주요 작전사령부를 잇는 통신망을 두 시간 가량 차단한다. 그러나 스타우펜베르그는 베를린으로 이동하는 두 시간 가량 연락이 단절됨으로 인해 정확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

한편 베를린 사령부에 있던 다른 가담자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General), 프리츠 틸레(Generalleutnant) 등은 암살시도의 성공여부를 확인하지 못해 다음 작전의 실행 여부를 고심하다가 식사를 하러 가면서 자리를 비움으로 인해 암살시도가 실패했다는 연락을 접하지 못하게 된다.

이후 오후 4시 경 베를린 사령부에 있던 올브리히트는 암살시도가 성공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다음 계획(Walkuere 작전)을 실행하기로 결정한 후, 베를린에 주둔해 있는 예비병력의 책임자였던 프롬(Generaloberst)에게 히틀러가 죽었음을 주장하며 베를린 사령부 및 전체 상황을 장악하기 위해 예비병력을 동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사건 발생 이후 볼프샨쩨와의 교신을 통해 히틀러가 살아 있음을 직접 확인한 프롬은 병력 동원을 거부한다. (프롬도 암살기도에 관여했는데 나중에 이것이 밝혀지면서 그 또한 사형을 당했다) 오후 4시 30분 경 베를린 사령부로 돌아온 스타우펜베르그는 히틀러가 죽었음을 주장하며 예비병력을 동원할 것을 촉구했으나 프롬이 계속 거부하자 프롬을 감금하고 비상사태를 선포, 사령부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분투한다.

그러나 이미 상황을 파악한 히틀러 수뇌부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히틀러가 생존해 있음을 알린 후 암살시도 가담자를 색출하고 상황을 수습하기 위한 조치를 취한다.

실패한 작전

▲ 히틀러 암살을 계획한 주요인물들이 총살당한 지점에 새겨져 있는 안내 동판.
ⓒ 강구섭
결국 그날 저녁 스타우펜베르그, 올브리히트, 크빈하임, 헤프텐 등 히틀러 암살을 계획했던 주요 인물들은 베를린 사령부에서 총살을 당하게 되고 히틀러 암살기도는 실패로 끝나게 된다. 이후 이 사건에 연루된 수천 명의 관련자가 체포되었고 200여 명이 국민재판에 회부 즉결 처형을 당하거나 강제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해인 1933년에서 1945년 사이 총 2900여 명이 히틀러에 체제에 저항하다 목숨을 잃었다.

사건 발생 60주년이 되는 올해, 이들의 히틀러 암살시도는 인간존엄이라는 고귀한 가치가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행위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주요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7월 20일 열린 공식기념행사에서 연방수상 슈레더 또한 "이들의 히틀러에 대한 저항을 독일 역사에 있어서 커다란 유산"이라고 격찬했다.

그렇지만 히틀러를 암살하고 체제를 전복하려고 했던 이들의 시도가 정말 양심에 입각한 저항이었는가에 대한 논란 또한 일부 현대사가 등을 통해 계속 제기되고 있다.

히틀러 암살기도의 진의에 회의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 일부 현대사가들은 7월 20일 사건의 대표적 인물로 인식되고 있는 스타우펜베르그가 1933년 히틀러의 정권장악을 적극 환영했으며, 다른 가담자들 또한 히틀러 집권초반부터 이미 그의 의도를 파악했고 히틀러의 전쟁에 적극 참여했던 사실을 지적한다.

이후 히틀러의 대량살상 전쟁과 폭력적 국가사회주의체제에 반감을 품게 된 그들이 1944년 이후 히틀러의 패색이 짙어지자 암살을 모의했다는 것이 일부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와 함께 이들은 히틀러 암살 이후의 계획으로 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새로운 독일이 아닌 법치국가에 입각한 히틀러 이전의 독일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이들의 행위를 현재의 독일 민주주의 정신과 연결짓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그렇지만 히틀러의 폭력적 국가사회주의체제를 전복하고 전쟁을 조속히 종결짓기 위해 목숨을 걸고 감행했던 그들의 히틀러 암살시도가 시민적 용기, 양심에 입각한 행동이었다는 것에는 대체로 이론이 없다.

그들이 갖고 있던 히틀러 암살 이후의 일련의 계획들이 비록 민주주의 정신에 입각한 것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추구했던 생각에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기본적 가치가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이다.

▲ 사건의 대표적 인물 스타우펜베르그. 당시 36세였던 그는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오른쪽 눈과 팔, 왼손의 손가락 두개를 잃는 큰 부상을 당한 후 베를린 참모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 http://www.wk-2.de
이로 인해 이들의 용기있는 행동은 독일 연방군에서 양심의 자유, 인간의 존엄과 관련된 군인상의 모델로 인식되고 있다.

"지금은 무엇인가 행해져야 할 시기다. 지금 우리의 행동은 미래의 독일역사에서 반역으로 기록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지금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양심에 반하는 것이다."(스타우펜베르그)

암살시도가 실패로 끝난 후 히틀러는 적극적인 선동정책을 통해 그들의 행위를 국가사회주의체제, 독일민족에 대한 반역행위라고 규정했다. 사건 이후 1944년 7월부터 1945년 5월 독일이 패전을 선언하기까지 9개월 동안 이어진 전쟁에서 400여만 명의 독일인, 150여만 명 이상의 연합군이 목숨을 잃었으며 알려진대로 히틀러 또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오늘날의 역사는 60년전에 있었던 히틀러 암살을 시도했던 그들의 행위를 독일인, 독일을 위한 용기있는 행동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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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독일에서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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