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옥수수밭으로 변한 고산자 신흥무관학교 옛 터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이항증 선생
옥수수밭으로 변한 고산자 신흥무관학교 옛 터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이항증 선생 ⓒ 박도
사람이 살아가면서 누구를 만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만나는 사람에 따라 인생길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필자는 몇 해 전, 한 모임에서 독립운동가 후손을 만났다. 그분은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선생의 증손 이항증 선생이었다.

그 얼마 후, 한 문헌에서 그분 집안이 삼대가 독립운동을 한 항일명문가임을 알았다. 그분을 만남으로 필자는 중국대륙에 흩어진 항일유적지를 답사할 수 있었고, <민족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라는 책도 펴낼 수 있었다.

일찍이 다산 정약용 선생은 “의원이 삼대를 계속해 오지 않았으면, 그가 지어주는 약을 먹지 않는다(醫不三世 不服其藥)”고 한 바 있다. 무슨 일이든 삼대는 해야 마음 놓고 믿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동안 나라 안팎으로 가짜 애국자들이 진짜 애국자인 양 마구 날뛰어 몹시 역겨웠던 터에 진짜 애국자 집안을 만나 무척 기뻤다. 이런 집안의 내력을 통하여 우리나라가 그 동안 수많은 외침 속에서도 꿋꿋이 반만년 역사를 이어온 까닭을 알았고, 앞으로도 국난을 당하면 숨은 애국자가 나타나리라는 기대도 할 수 있었다.

옛 글에 “집이 가난해지면 어진 아내를 생각하고,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어진 재상을 생각한다(家貧則思良妻, 國亂則思良相)”고 한즉, 국난을 당하여 유림의 가문으로 항일 독립 전선에 삼대가 몸 바쳐 끝까지 일제와 맞서 싸우면서 고난의 길을 걸어온 석주 선생 일가의 투쟁사를 보면서 그 거룩함에 고개가 숙여졌다.

또 사돈 집안도 일제 때 의병 활동으로 쟁쟁한 왕산(旺山) 허위(許蔿) 선생 가문이요, 항일 민족시인 이육사(李陸史) 또한 인척이었다.

임청각 전경, 일제는 임청각의 맥을 끊고자 바로 앞에 중앙선을 놓았다. 지붕이 온통 쇳가루로 뒤덮였다.
임청각 전경, 일제는 임청각의 맥을 끊고자 바로 앞에 중앙선을 놓았다. 지붕이 온통 쇳가루로 뒤덮였다. ⓒ 안동문화방송국
석주 이상룡 선생은 1858년 경북 안동군 법흥동 임청각에서 태어났다. 필자가 중국에 산재한 항일유적지 답사에 앞서 안동의 임청각에 가본즉 90간이나 되는 고색창연한 전통 한옥이었다.

이 임청각은 현재 보물 182호로 지정되어 있는 바, 조선 중종 때 지은 집으로, 앞은 낙동강이 흐르고 뒤는 영남산이 임청각을 껴안고 있었다.

이런 명문에서 자라나 평생 부귀를 누릴 수 있는 석주 선생이 조국과 종갓집, 조상 산소와 수많은 전답을 남겨둔 채 삭풍이 휘몰아치는 정월에 만주 땅으로 떠났으니, 그 감회는 창자를 자르는 아픔이었으리라.

그날 답사 후 늦은 밤, 서울로 돌아오면서 역지사지로 필자가 그때 그 처지였다면 어떻게 처신했을까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솔직히 청년이면 몰라도 황혼 길에 접어든 쉰이 넘은 나이에 고향집과 전답을 다 버린 채, 가족 친지를 이끌고 낯선 머나 먼 만주 땅으로 망명길을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임청각 주인은 끝내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임청각 주인은 끝내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 박도
역사가 망하는 게 더 안타깝다

마침 지난 6월, 안동문화방송국에서 8·15 특집프로로 항일유적답사 취재 길에 이항증 선생과 함께 열흘 남짓 한 방에서 묵으면서 많은 말씀을 나눴다.

- 올해가 광복 60년이 되는 해입니다. 소감은?
"광복 당시의 감격은 다 사라져 버리고, 친일파 청산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역사적으로 해결된 게 거의 없습니다."

- 광복 당시를 얘기해 주십시오.
"그때 제 나이 일곱 살이었습니다. 그날 동네사람들이 모두 우리 집으로 몰려와서 해방이 되었다고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때는 영문을 몰랐는데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 선조 삼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요?
"증조부(이상룡)께서는 1932년 만주 길림성 서란현에서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 독립운동가를 빗질 토벌하여 동지들이 모두 체포 처형되자 그 울분에 상심하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조부님(이준형)은 1942년 일제의 동남아 침공에 분노, 일제하에서는 하루라도 목숨을 연명하는 게 치욕이라는 유서를 남긴 후 동맥을 절단 자결하시고, 아버님(이병화)은 1952년 충남 아산 피난지에서 동족젊은이들끼리 서로 총질하고 죽창으로 찌르는 현실에 곡기를 끊고 상심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 임청각의 후손으로 만석꾼 집안이었지만 선대가 독립운동을 한 탓으로 고아원에서 학교를 다니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때는 모두가 어려울 때였습니다. 저보다 고생한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저희 후손은 그래도 행복한 축에 듭니다. 조상들이 이름이라도 남겼지만 만주 벌판에 이름도 흔적도 없이 돌아가신 분이 얼마나 많습니까?"

- 임청각을 국가에 헌납하는 절차를 밟고 있는 줄 아는데 아쉬운 점은 없습니까?
"임청각은 국난에 석주 어른을 배출해 역사적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집으로 의미가 없고요. 문화재로서 국가가 관리하는 게 당연합니다. 솔직히 제가 관리할 능력도 없습니다."

윤기를 잃은 임청각 안채
윤기를 잃은 임청각 안채 ⓒ 박도
- 어머니 허은 여사께서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라는 회고록을 펴내셨는데 그 얘기 좀 들려주십시오.
"어머니는 왕산 집안에서 시집오셨습니다. 왕산 석주 두 집안의 항일 역사를 소상히 아시는 분이었지요. 살아 계셨더라면 모시고 다니면서 그때의 일들을 남김없이 들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많습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한중 수교가 되지 않아서 모실 여건이 못 되었습니다."

- 조상의 유적지를 답사하는 심정은 어떠하십니까?
"나라가 망한 후 저항세력이 있었다면 그 나라를 되찾으면 마땅히 나라에서 그 유적을 기념하고 보존해야 할 텐데, 이렇게 개인이 와서 조상에게 부끄럽습니다. 제대로 된 나라라면 유적지를 이렇게 방치할 수 있겠습니까? 단재 선생이 하신 말씀 '나라가 망하는 것보다 역사가 망하는 게 더 안타깝다'는 말로 대신하겠습니다."

- 마무리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어제를 잊어버리는 사람은 오늘 내일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백성들은 역사를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바로 잡지 않은 역사는 다시 되풀이된다'는데 지난 역사를 거울삼아서 시행착오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게 현명한 백성입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