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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추장과 참기름 몇 방울 떨어뜨려 잘 비빈 꽁보리밥
ⓒ 이종찬
지난 토요일 창녕 영산으로 여행을 갔다가 막 점심을 먹고 나오는데, 저만치 '시골 꽁보리밥'이란 간판이 크게 붙은 집이 보였다. 일반 가정집을 식당으로 개조한 그 집 앞마당에는 밥상이 놓인 평상도 몇 개 있었다. 그 평상 위에는 나이가 한 사십대쯤으로 보이는 사람들 서넛이 땀을 뻘뻘 흘리며 무언가를 열심히 먹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서자 그들이 먹고 있는 것은 여러 나물과 고추장을 넣고 잘 비빈 꽁보리밥이었다. 아까 점심 한 끼를 때울 마땅한 식당을 찾아 헤맬 때에는 저 보리밥집이 눈에 띄지 않더니…. 볼이 미어터지게 꽁보리밥을 맛나게 먹는 그 모습을 보자 갑자기 나도 끼어 들어 한 술 떠먹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점심을 배불리 먹고 난 뒤였다.

그날 여행길에서 돌아온 나는 곧바로 집 근처에 있는 슈퍼마켓에 들러 보리쌀을 한 봉지 샀다. 그때부터 나는 어릴 적 어머니께서 보리밥을 하던 그 기억을 차근차근 떠올리며 먼저 보리쌀을 물에 잘 씻어 한번 삶았다. 그리고 김이 풀풀 나는 보리밥을 구멍이 송송 뚫린 바구니에 담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때 어머니께서는 보리쌀을 한번 삶은 뒤 커다란 소쿠리에 담아 바람이 잘 통하는 처마 끝에 걸어놓곤 했다. 끼니 때가 되면 어머니께서는 한번 삶은 그 보리밥을 적당히 퍼내 다시 물에 씻어 밥을 했다. 그리하면 신기하게도 입안에 넣어도 꺼끌거리지 않는 곱슬곱슬한 보리밥이 되었다.

얼마 뒤 나는 바구니에 담긴 보리쌀을 다시 씻어 그 위에 감자 몇 토막을 올린 뒤 보리밥을 했다. 근데 물을 많이 잡은 탓인지 그때 어머니께서 하신 그 보리밥처럼 곱슬곱슬하게 되지가 않고, 죽밥 비슷하게 되고 말았다. 하지만 참기름 몇 방울을 떨어뜨리고 고추장에 쓱쓱 비비자 그때 그 보리밥 맛이 그대로 났다.

▲ 한번 삶은 꽁보리밥
ⓒ 이종찬
"아빠! 이게 무슨 비빔밥이야?"
"이게 아빠가 어릴 때 자주 먹었던 그 꽁보리밥이란다. 빛나 너도 한번 먹어 볼래?"
"안 매워?"
"조금 매워."
"반 숟갈만 줘 봐."
"어때?"
"맛있어. 또 줘."

내가 어릴 적에는 보리밥을 참 많이도 먹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마을사람들 모두 하루 세 끼를 쌀알 서너 개 섞인 보리밥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렇다고 우리 마을사람들이 쌀농사를 짓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어찌나 쌀이 귀했던지, 우리 마을사람들은 누구나 쌀을 아예 금싸라기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 당시 쌀은 우리가 먹을 주식이 아니었다. 수확한 쌀의 절반은 우리 마을 대지주였던 오가네 차지였고, 나머지 절반은 대부분 공판장에서 추곡수매가로 팔려나갔다. 마을어르신들은 그 금싸라기 같은 쌀을 판돈으로 일년 내내 밀렸던 외상값을 갚았고, 우리 마을아이들 공부를 시켰다. 그랬으니 쌀이 귀할 수밖에 없었다.

어릴 때 나의 소원은 하얀 쌀밥을 배 터지도록 먹어보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일년 내내 쌀밥을 한번도 먹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명절이나 제사가 돌아오면 하얀 쌀밥을 배 터지게 먹기도 했다. 하지만 일년 중 그런 날은 며칠 없었다. 특히 여름철에는 제사조차 없었기 때문에 쌀밥을 구경하기란 정말 어려웠다.

그때 어머니께서는 밥을 지을 때 시커먼 가마솥에 한번 삶은 보리쌀을 푸짐하게 깐 뒤 그 보리쌀 한가운데 마치 달걀 노른자처럼 하얀 쌀을 조금 얹었다. 그리고 솥두껑을 닫은 뒤 아궁이에 불을 때다가 가마솥이 눈물을 줄줄 흘릴 쯤이면 찬거리도 별로 없는 밥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 감자를 넣고 두번 째 삶은 꽁보리밥
ⓒ 이종찬
밥에 뜸이 다 돌고 나면 어머니께서는 솥뚜껑을 열고 가운데 하얀 쌀밥을 따로 떠서 외할아버지 밥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어 순식간에 조금 남은 쌀밥을 보리밥과 골고루 섞어버렸다. 나는 그때마다 쌀밥과 보리밥을 마구 섞고 있는 어머니의 밥주걱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니 오늘따라 밥 묵는 기 와 그렇노?"
"아부지(아버지)하고 옴마(엄마)는 맨날 시커먼 이 꽁보리밥이 질리지도 않나?"
"야가(얘가) 야가! 니가 안주까지(아직까지) 배가 덜 고푼 모양이제?"
"아이다. 배는 억수로 고파 죽겄는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보리쌀알이 입안에 뱅뱅 도는 기 잘 안 넘어간다."
"근데 너거 외할배 방은 와 자꾸 쳐다보노?"

나는 쌀알 몇 개 섞인 보리밥이 그렇게 먹기가 싫었다. 아니, 어쩌면 나뿐만 아니라 우리 형제들은 끼니때마다 일부러 보리밥을 천천히 먹으며 외할아버지 방에서 '으험' 하는 소리가 나기를 기다렸는지도 몰랐다. '으험'하는 소리는 바로 외할아버지께서 식사를 끝냈다는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식사가 끝난 외할아버지의 밥상 위에는 반드시 쌀밥 반 공기와 고기 반 토막이 남아 있었다. 그때 나는 외할아버지께서 으레 식사를 적게 하시는 줄로만 알았다. 근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외할아버지께서는 외손주들을 위해 끼니 때마다 '입맛이 별로 없다' 란 핑계를 대며 일부러 음식을 남긴 것이었다.

우리 형제들은 그것도 모르고 어머니께서 외할아버지 밥상을 들고 부엌으로 나오자마자 우르르 달려들었다. 외할아버지께서 남긴 쌀밥 반 공기와 고기 반 토막을 조금이라도 더 먹기 위해 서로 눈을 흘겨가며 용을 썼다. 그때 한 숟갈 떠먹은 쌀밥은 어찌나 맛이 좋았던지 반찬이 필요가 없었다.

▲ 꽁보리밥 한 그릇과 땡초 다섯 개
ⓒ 이종찬
"입맛이 없을 때는 그저 보리밥을 물에 말아서 땡초를 된장에 푸욱 찍어먹으면 그만 아이가."
"나는 꽁보리밥에 고추장 몇 숟갈 넣고 참기름 몇 방울 톡 톡 떨어뜨려가 쓱쓱 비벼서 먹는 그 맛이 더 끝내주던데."

아버지께서는 점심 때마다 감자 몇 조각과 밀을 넣은 꽁보리밥을 금방 떠낸 우물물에 말아 마치 숭늉처럼 후루룩 후루룩 먹거나 고추장에 쓱쓱 비벼 먹었다. 반찬이라고는 땡초 몇 개와 된장뿐이었다. 아버지께서는 보리밥을 한 숟갈 입에 떠 넣은 뒤 그 매운 땡초를 된장에 푸욱 찍어 정말 맛있게 먹었다. 입에 지독하게 매운 땡초 내음을 풀풀 풍기면서도.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나는 그때 아버지께서 맛있게 드시던 그 꽁보리밥을 볼이 미어터지도록 먹고 싶다. 그 꽁보리밥을 먹으며 내 어릴 적 기억들을 하나 둘 들추고 싶다. 시커먼 꽁보리밥처럼 꺼멓게 살다 가신 부모님과 배가 고파 징징 울던 산수골 그 머스마의 꺼멓게 패인 그 눈빛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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