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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를 등에 업고 무거운 짐을 줄에 달아 늘어뜨리고 아버지는 허공에 솟은 탑, 토템 기둥을 오르고 또 오른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는 아버지의 등에서 아득한 저 아래를 내려다 보면서도 웃는다. 기둥 중간 턱에 앉아 아버지는 숟가락으로 죽을 떠 아기 입에 대주고, 아기는 맛있게 냠냠 받아 먹는다.

아기가 소년이 되고 청년이 되면서, 앞에서 올라가던 아버지와 뒤에서 따르던 아들의 자리가 바뀌어서 아들이 아버지보다 앞서 기둥을 오른다.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밤낮이 계속된다. 수염 허연 할아버지가 된 아버지는 이제 너무 늙고 힘이 빠져 더 이상 기둥을 오를 수 없다.

기둥 중간에 늙은 아버지를 앉혀 둔 채 아들은 나뭇잎으로 동여맨 주먹밥을 내밀지만 아버지는 손사래를 친다. 가지고 올라온 씨앗을 말없이 돌 틈에 뿌리고 마실 물을 전부 붓는다.

아주 오래 전 등에 업혀 기둥을 오르던 아기가 이제 수염 허연 할아버지가 되었다. 오르고 올라 꼭대기에 이르러 보니, 꼭대기는 별다르지 않고 그저 평평할 뿐이다. 줄에 달아 매달고 온 짐은 토템 기둥 꼭대기의 빠진 조각이었다. 할아버지가 된 아기는 그 조각을 맞춰 끼워 넣는다.

기둥을 끝없이 오르고 또 오르는 <인생>의 아버지와 아들을 보면서, <꽃들에게 희망을>에서 위로 위로 올라가는 벌레들을 기억해 냈다. 사람의 한평생 역시 무엇이 있을 것 같아 오르고 오르지만 다 올라 보면 딱히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토템 기둥 조각을 끼워 넣기 위해 생을 바치는 그들의 모습은 바로 우리들의 것이다. 다만 토템 기둥 대신 우리는 돈, 명예, 성공, 자식 같은 것에 대롱대롱 매달려 위태롭게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그 기둥에서 미끄러져 내려 목숨을 잃거나, 맨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기도 한다.

우리들은 만화 영화 속 아득히 솟은 토템 기둥을 보면서 현기증을 느낀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돈과 명예와 성공의 기둥을 올려다 보며 전의를 다지곤 한다.

만화 속 할아버지는 그래도 그 돌 틈에 뿌릴 씨앗을 가지고 올라가 그것을 심는다. 우리들, 악착같은 힘으로 올라가는 우리들은 씨앗은커녕 누가 나보다 먼저 빨리 꼭대기에 오를까 두려워 몸부림친다.

할아버지의 씨앗은 어렵게 자라 열매를 맺을 것이고, 그 열매는 아버지와 아들이 그랬듯이 뒤에 올라오는 누군가의 작지만 귀한 먹을거리가 될 것이다. 속에 품은 씨앗조차 없다면 기둥을 오르고 또 오르는 우리들 인생이 정말 너무 남루하고 초라하다.

<배낭을 멘 노인>의 주인공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 마을을 떠났다가 수염 긴 할아버지가 되어 홀로 돌아온다. 할아버지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만큼 커다란 배낭을 메고 다니는데, 아이들은 '망태 할아버지'라도 만난 듯, 배낭에서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듯 뒷걸음치며 도망간다. 어른들은 뒤에서 수군거린다.

할아버지가 어느 날 숨을 거두고, 배낭을 열어 본 마을 사람들은 깜짝 놀란다. 커다란 돌멩이가 잔뜩 들어있었던 것.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할아버지의 시신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이었다.

구름 위에까지 날아가 누워 웃음 짓던 할아버지 시신을 겨우 붙잡아 내려 관에 넣으니, 이번에는 관이 날아다닌다. 마을 사람들이 할 수 없이 관속에 누운 할아버지 가슴 위에 배낭을 올려 놓자 할아버지는 비로소 땅에 묻힌다.

인생의 무거운 짐….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죽음으로 비로소 삶의 무거운 짐을 다 내려 놓은 할아버지, 얼마나 홀가분했으면 하늘로 날아다닐까. 관속에 들어가서도 말이다.

자기 몸보다 몇 배는 크고 무거운 짐. 돌멩이를 지고 다니는 것처럼 무겁고 힘든 삶의 짐. 만화 영화 속 수염 길게 늘어뜨린 할아버지만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가 '배낭을 멘 사람'이 아닐까. 죽어서 벗어 놓았다 싶은데, 그 또한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짧은 만화가 가르쳐 주고 있다.

2004 한국 단편 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 만난 <인생>과 <배낭을 멘 노인> 두 편의 영화 속에서 노년은 머지 않아 만나게 될 우리들의 얼굴이기도 하며, 또한 지금 우리 삶의 자리를 살펴보게 하는 소중한 존재이다. 짧은 만화 영화 속에서도 노년은 우리 눈을 뜨게 도와 준다.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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