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칼 858의 미스터리'를 연출한 류지열 KBS 피디.
'칼 858의 미스터리'를 연출한 류지열 KBS 피디. ⓒ 오마이뉴스 강이종행

1987년 11월 29일 인도양 상공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KAL 858기는 과연 김현희에 의해 폭파됐을까?

지난달 22일과 23일에 걸쳐 방영된 KBS 다큐멘터리 <칼858의 미스터리>가 방영된 뒤, 의혹만 무성한 채 오랫동안 답보상태에 머물러있던 칼858기 사건이 다시 수면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방송이 나간 뒤, KAL858기 가족회와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시민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가 지난달 27일 열린우리당사 앞에서 이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고, 이어 3일에는 양재 시민의 숲에 위치한 'KAL858기 위령탑' 앞에서 '위령탑 거부선언식'이 대책위에 의해 개최됐다.

또 정치권의 목소리도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송영길 열린우리당 의원은 지난달 27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지금으로선 쉽지 않겠지만 KBS 방송 등을 통해 여론이 조금씩 바뀌어가고 있으니 17대 국회 안에 해결되지 않을까 희망한다"고 말한바 있다.

이처럼 변화의 조짐이 보이는 가운데 <오마이뉴스>는 프로그램을 연출했던 류지열(38) KBS PD와 만나 프로그램 제작과정과 최근 심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폭파 비행기 잔해에서 폭파 흔적 찾을 수 없다니"

ⓒ 오마이뉴스 강이종행
류 PD의 별명은 '칼폐인', '김현희 폐인'이다. 방송 제작을 했던 10개월간 한 아이템에만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작가나 다른 사람들의 도움 없이 혼자 프로그램을 제작해야 했기 때문에 얻었던 별명이다.

"나는 이번 건을 이렇게 비유하고 싶다. 선은 무수한 점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점들이 모두 따로 노는데 어떻게 선이 만들어질 수 있나. 이번 사건을 취재하면서 접한 많은 점들로는 도저히 선을 만들 수 없는 내용뿐이었다."

하지만 류 PD는 신중을 기했다고 한다. 그는 "무수히 많은 의혹 중 증거자료와 증인 2명 이상이 확보 안되면 모두 버렸다"며 "이번 방송은 철저히 '사실'에 근거를 뒀다"고 강조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 새로 밝혀진 내용도 여러가지다.

▲발견 잔해에 폭파 흔적이 없다 ▲구명보트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 ▲김현희는 평양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김현희는 음독하지 않았다 ▲30년 유치원이 공작원 비밀 아지트인가 등이 그것.

우선 '폭파 흔적이 없다는 것'에 대해 방송에서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아래 국과수)의 당시 감정 보고서를 입수, 소개했다. 지금까지 정부에서는 '칼858기는 폭파에 의해 추락했다'고 주장해왔다. 국과수 보고서는 '칼기 잔해라고 발견된 동체 중 김현희가 폭탄을 두었다는 지점에는 '폭발흔적이 없다'고 나와있다. 방송은 당시 감정에 참여했던 연구원의 증언을 통해서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류 PD는 이와 관련해 "여러 번의 설득 끝에 당시 자료를 입수할 수 있었다"며 "국과수에서 폭파 확인이 안됐다고 비행기가 폭파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없다, 하지만 폭파됐다고 하는 건 더 웃기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두번째 구명보트에 대해서도 방송에서는 새로운 문제점을 제시했다. 당시 폭파 지점과 가까이에서 발견된 구명보트가 상처하나 없이 멀쩡했다는 것. 안기부에서는 '미국에서 칼 858기와 같은 기종, 똑같은 폭탄으로 폭파실험' 한 결과, 구명보트가 있던 지점은 상당히 손상을 입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류 PD는 "당시 발견된 구명보트를 확인했는데 긁힘이나 파손된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당시 외상을 입지 않은 구명보트 안에는 파괴된 수동펌프가 있었다. 국정원에서는 이에 대해 '날카로운 파편이 통과하면서 펌프를 깨부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정작 국과수에서는 '수동펌프가 압축에 의해 파손, 변형됐다'고 보고하고 있다.

방송은 "더구나 말아져 있는 구명보트 내부에 있던 수동펌프가 국정원의 주장대로 파편에 의해 파괴됐다면 구명보트를 뚫고 지나간 흔적이 남아있어야 한다"며 국정원 발표의 문제를 지적했다.

"김현희는 평양에서 출발하지도 음독하지도 않았다"

아사히 방송 "김현희는 음독하지 않았다"

KBS의 다큐멘터리가 나가기 전인 지난 3월 23일, 일본 아사히 TV에서는 다큐멘터리 '김현희 17년의 진실'을 방영했다. 대책위가 지난 1일 공개한 이 방송 내용에는 김씨가 음독하지 않았다는 부분과 전 안기부 직원의 증언을 통해 '김씨를 사면시키기 위한 언론플레이' 등 새로운 내용도 포함돼 있다.

방송은 김씨가 음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인을 통해 전하고 있다. 증언자는 KBS에서 인터뷰했던 스기나와씨. 그는 "김씨는 당시 일어나서 걷기도 했고 사망한 김승일을 쳐다보기도 했다'고 김씨가 정상이었음을 밝혔다"고 밝히고 있다.

방송을 통해 증언한 전 안기부직원은 "김씨의 존재는 한국여론을 유도해나가는데 있어 가장 큰 카드였기 때문", "사전에 매스컴을 이용해 이 정보를 퍼뜨렸다", "여론이 사면에 긍정적이어야 했기 때문", "김씨도 (이 사실을)물론 알고 있었다"는 등 당시 대통령 선거를 위해 김씨를 활용했다는 사실을 암시했다.
세번째 '김현희가 평양에서 출발하지 않았다'는 주장. 김현희씨는 자필진술서(1987년 12월 28일 작성)와 고백록(1991년 6월 출간)에서 "이르츠크를 경유해 모스크바에 오후 6시에 도착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제작진이 1987년 11월 국제항공시간표를 확인해 본 결과 "모스크바로 가는 비행기는 중간 경유 없이 바로 모스크바로 향했고 도착시간도 오후 6시가 아닌 낮 12시30분이었다"는 것.

네번째, '김현희가 음독하지 않았다'는 부분은 당시 주 바레인 일본 외교관이었던 스나기와씨와 김현희의 치료 의사인 압둘라힘 압둘라씨 등의 증언을 통해 "김현희가 (음독상태가 아닌) 정상"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더구나 류 PD는 독약앰플에 들어있던 청산가리 액화가스는 조금만 깨물어도 가스가 흡입돼 죽을 수밖에 없던 약품이었기 때문에 "김현희가 살 수 있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김씨가 묵었다는 비밀아지트에 대한 부분. 김씨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헝가리에서 비밀 아지트에 은거했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 김씨의 수첩에는 비밀아지트 전화번호가 암호화 돼 적혀있었다. 취재진의 추적 결과, 아지트는 30년 동안 유치원이었던 곳.

류 PD는 "상식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유치원 어디에서 은신을 할 수 있나"며 "이와 함께 수첩에 같이 적혀있던 70년 됐다는 유고 베오그라드의 조르카 회사 관계자는 우리가 찾아갔더니 오히려 왜 왔느냐고 어이없어 했다"고 말했다. 방송에서 이 관계자는 "여기가 북한 공작원의 은신처였다면 '공작원이 잠깐 여기 들러 전화 한번 썼으니 은신처다'라고 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흥분하는 모습을 비쳤다.

"유럽인들, 칼기 사건을 일본의 일로 알고 있었다"

류 피디가 작업한 KBS 신관 편집실에는 아직까지 많은 자료들이 쌓여있었다.
류 피디가 작업한 KBS 신관 편집실에는 아직까지 많은 자료들이 쌓여있었다. ⓒ 오마이뉴스 강이종행
이처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혹들을 뒤쫓으며 살았던 10개월. 키를 쥐고 있는 사람은 김현희씨였다. 당시 사건은 모두 김씨의 증언으로만 짜맞춰진 채 종결됐다. 김씨가 나와 속시원히 사실을 말해준다면 단번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

류 PD는 꿈에서조차 김씨를 만나 얘기를 나눌 정도로 사건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직접 김씨를 찾는 것은 포기했다.

"물론 흥행을 위해서는 김씨를 찾아 인터뷰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만나도 제대로 증언도 안했을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정부 발표가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증거'를 통해 이를 밝혀내는 것이 먼저라고 판단해 포기했다."

류 PD는 유럽 취재를 할 때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을 수차례 경험했다고 한다. 그는 "유럽의 사람들이 '왜 일본 사건을 한국인이 취재를 오나'고 질문해왔다, 자초지종을 말해주니 고개를 끄덕이더라"며 "그들은 지금까지 일본기자들만 취재를 왔기 때문에 일본사건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가 마지막 2달 동안 작업을 했던 KBS 신관 지하 편집실에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A4지 1만여장 정도의 자료들과 300여개의 방송용 테이프가 쌓여 있었다. 류 PD는 자료들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를 누구에게 인정받거나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언론에서 침묵하고 있는데 '임금님 귀는 당나귀귀'처럼 조금만 관심을 보이면 커질 수 있을 텐데…. 정부는 국민들을 상대로 '트루먼 쇼'이기를 강요해왔다. 이제 문을 열고 진짜 세계로 가야 할 것 아닌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11년 동안 한국과 미국서 기자생활을 한 뒤 지금은 제주에서 새 삶을 펼치고 있습니다. 어두움이 아닌 밝음이 세상을 살리는 유일한 길임을 실천하고 나누기 위해 하루 하루를 지내고 있답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