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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정식 직장 생활 경험이 없으므로 '직장인들의 세계'에서는 어떤 호칭 문화가 있는지 잘 모르며, 따라서 이 글은 나의 대학 생활과 백수 생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미리 밝혀 둔다.

당신이 사적인 자리에서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상대방에게 가장 먼저 묻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첫번째는 이름일 테고, 나이(혹은 학번)와 직업 정도일 것이다. 나 역시 새로 누군가를 만나면 비슷한 질문들을 먼저 주고받는다. 그런데 가끔 사람들이 서로의 나이를 묻고 확인하는 데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진다. 물론 구체적인 숫자를 밝히기 꺼려하며 20대, 30대로 소개하거나 "너보다 많아"라며 질문을 막는 사람들도 종종 있지만.

서로의 나이를 확인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호칭과 존대말 사용 때문인 것 같다. 비슷한 또래일수록 몇 년 생인지를 꼼꼼히 따지기를 좋아한다. 왜? 내가 이 사람을 오빠(형) 혹은 언니(누나)라고 불러야 할지 말지를 결정해야 하니까.

동시에 말을 놔도 좋을지 올려야 할지도 정해야 하니까. 뭐, 워낙에 우리 나라 말이 외국어와 달라 '높임말'이란 까다로운 문법이 있어서 존대말 사용이 중요한 건 사실이다. 그래도 나이가 나보다 많건 적건 처음 보는 이에겐 무조건 존댓말을 써버리면, 이 문제는 별로 어렵지 않게 해결된다. 친해지면 말을 놓을 수도 있고 그거야 알아서 하면 되니까.

그런데 '호칭' 문제, 이게 참 쉽지가 않다. 나도 학교 다닐 때는 남자 선배들은 다 '오빠'(학번 차이가 많이 나면 '선배')였고 여자 선배들은 다 '언니'였다. 아주 당연했고 편했으며, 거부감도 없었다. 아마 함께 생활하며 많은 걸 나누다 보니 친언니·오빠만큼 가깝게 느껴졌기 때문일 거다.

그러다가 졸업을 하고, 사적인 자리에서 나이 많은 남자들을 만날 때가 있었다. 친근한 사이도 아니지만, 공무상으로 만나는 사이도 아니다. 그렇다고 한번 보고 말 사이는 아니지만, 앞으로 친해질지 어떨지는 더더욱 알 수 없는 관계. 그럴 때 대체 이 남자, 뭐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여자들의 경우 별 부담 없이 언니라고 부를 수가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남자들의 경우는 좀 달랐다.

남자들을 오빠라고 부를 때

별로 가깝지 않은 관계의 나이 많은 남자를 부르는 방법. 첫번째는 '00씨'. 직장을 다니지 않아서인지 몰라도 너무 어색하다. 뭔가 막 부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면 '00님'? 인터넷 카페에서 만난 것도 아니고, 이것도 영. 그렇다면 역시 남는 건 '00 오빠'인 것 같은데, 이게 참 문제를 어렵게 한다. 이상하게도 친오빠가 아닌 이상, '오빠'라는 호칭에서는 "(은근한 눈빛으로) 오빠 못 믿어?" 할 때의 느낌이 강하게 묻어나온다(이렇게 생각하는 건 나 뿐?). 그 왜, 젊은 여성들이 무턱대고 '아가씨'로 불리는 것을 싫어하는 것도 아가씨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가 아닌 사회적 의미 때문이 아닌가.

그런데 또 대부분의 남자들은 이 '오빠'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것을 좋아한다. 예전에 어떤 TV 프로그램에서, 소개팅에서 만난 여성의 애교에 대한 남자들의 반응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었다. 그 여성이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오빠, 오빠, 오빠!"하고 '오빠 3연타'를 날리자, 그 남성은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했다. 그리고 그 장면을 본 내 주변의 대부분 남자들, "깜찍하다" "귀여워 죽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 여성의 외모 때문이냐고 물었더니 "나이 어린 여성들이 자신을 '오빠'라고 부를 때 대부분 귀엽고 애교스럽게 느껴진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혹시, 남자들이 '오빠'라는 호칭을 좋아하는 이유는 상대가 나를 오빠라고 부를 나이, 즉 '어린 여자'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니까, 상대방은 어리고 여린 존재이고 자신은 듬직하고 어른스러운 존재가 되는 그런 느낌 말이다. 바로 그 느낌을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서로 동갑인데도 여자에게 '오빠'라는 호칭을 요구하는 연인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남자가 바라는 것이 바로 '오빠'라는 호칭이 주는 그 느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내 주변 남자들만 그런 걸까?

궁금한 것은, 남자들도 낯선 연상의 여인을 '누나'라고 부르는 것이 거북하게 느껴질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들도 호칭 문제로 고민을 하다가 나처럼 최대한 호칭을 생략하거나 정 불러야 할 때는 "저기요"라는 다소 어색한 표현을 사용할까? 오히려 '누나'라는 호칭이 주는 푸근하고 편한 느낌을 좋아하지는 않을까.

누나와 오빠의 차이

또 재미있는 것은 연인 관계에서의 호칭이다. 이 '연인'이란 관계에는 뭔가 특별한 것(아마도 사랑이라는)이 있어서, 정말 다양한 호칭이 가능하다. 이름도 나이도 상관없는 '자기'나 '깜찍이' '돼지' 등 다른 동물이나 기타 다양한 명사형이 모두 활용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유분방하고 창의적인 호칭들 말고 그냥 일반적인 경우를 살펴보면, 연인 관계에서조차 '오빠'와 '누나'는 좀 다르다. 연하남은 나이 많은 연인을 '누나'라고 부르기보다 '00야'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물론 "(다정하게) 누나"라고 부르는 커플도 있기야 하겠지만, 많은 경우 그냥 이름을 부르는 걸로 알고 있다(역시 내 주변의 커플들만 그런가?). 반면에 여성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나이 많은 연인을 오빠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역시, '당신' 혹은 '너'라고 부르는 커플을 간혹 보긴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누나'라고 부르는 남성들뿐 아니라 여성들 스스로 연인에게 '누나'라고 불릴 때의 (자신이 연상임을 확인시켜 주는) 느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아마도 남녀 관계에서 여성의 나이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 때문이 아닐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4살 차이는 궁합도 안 본다"는 말에서 4살 어린 쪽은 너무나 당연하게 여성을 뜻하지 않았나. 요즘이야 어느 쪽이건 상관없이 4살 차이만 나면 된다는 농담이 아무렇지 않게 들리지만. 상대적으로 나이 많은 연인을 오빠라고 부르는 것은 별로 이상하게 느껴질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런 문화를 '가부장 문화'로 설명하거나 이해하려 하는 것이 진부해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자는 상대방을 제압하려 한다'라거나 '여자는 상대에게 복종하려 한다'는 식의 무슨 본능 이론 따위보다는 훨씬 설득력이 있을 것 같다.

오래도록 여성들은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듬직하거나 책임감 강한 역할보다는 '편하고' '친근감 있는' 역할을 강요받거나 주로 맡아 왔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느끼는 감정의 종류가 조금 다르듯, 여성과 남성에 대한 감정적 기대도 다른 것이다. '누나'라는 호칭을 통해 보통 어머니에게서 느낄 수 있는 따스함이나 자애로움 따위를 느낄 수도 있겠지만, 이는 결국 '누나'라는 호칭이 '여성성'을 약화시킨다는 뜻도 된다.

우리가 떠올리는 이성으로서의 여성은 푸근하고 이해심 많은 '누나'보다는 '오빠'라고 귀엽게 부르는 나이 어린 여성의 이미지 쪽으로 기우는 것이다. 그러니 연인 사이에서 '누나'라는 호칭은 어색하게 느껴질 수밖에.

이름을 불러도 될까요?

남녀 간의 호칭 문제에 대해 이런 문제를 제기하면,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러냐는 반응이 많다. 그러나 분명 공감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대부분 여성들이다. 가끔 자신의 나이 많은 연인에게 그냥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는 얘기들을 한다. 나 역시 그런 경험이 있다. 그런데 너무 어색해서 몇 번 부르다가 만 기억이다.

당신이 만나는 연인, 혹은 주변 사람들과 무조건 '00야'하며 호칭을 통일시키라는 말을 하는 건 아니다. '오빠'라고 부르면 순종적이고, '00씨'라고 부르면 능동적이라던가, '오빠'라는 말을 좋아하면 마초고 '당신'이란 말을 좋아하면 평등주의자라는 말도 아니다. 단지 당신의 연인이, 혹은 주변 사람이 호칭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다면, 왜 불편하게 느끼는지, 그렇다면 어떻게 부르는 게 좋을지, 한번 함께 얘기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누군가에게 계속해서 "저기요"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예전에 대학가에서 여자 후배들이 남자 선배들을 '형'이라고 부르는 문화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이미 내가 대학 다닐 때만해도 거의 사라졌을 뿐더러, 취지는 공감하면서도 굳이 '형'이라는 호칭을 선택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도 '오빠'가 거북하다고 해서 '형'이라고 부르는 것은 내키지 않는다. 그래도 '오빠'를 대신할 다른 무언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 다른 것보다, 그냥 '이름'을 부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름이 어색하다면 별명도 좋고, 인터넷 아이디도 좋고, 다른 무엇도 좋다. 남자, 여자, 연하, 연상과 관계없이 서로를 부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 '00씨'로 시작해서 '00야'가 되어도 좋을 것 같다. 당신이 나보다 연상이라면 좀 어색하겠지만, 묻고 싶다. 내가 '오빠'가 아니라 당신의 이름을 불러도 좋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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