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나무에 달린 감꽃. 그냥 나무에 붙어 있으면서 갈색으로 변하면 고놈은 나중에 실한 열매가 열립니다.
나무에 달린 감꽃. 그냥 나무에 붙어 있으면서 갈색으로 변하면 고놈은 나중에 실한 열매가 열립니다. ⓒ 김규환

감나무를 우린 ‘감낭구’라 했다. 배, 사과, 복숭아를 쉽게 맛볼 수 없던 곳에 살았던 나는 지금도 누가 감 이야기하면 사족을 못 쓴다. 홍시가 그립다. 떫은 감 버리지 않고 우려먹었다. 장아찌도 맛있다. 감떡은 또 얼마나 달짝지근하던가. 곶감 빼먹던 그 시절은 나에게 더 없는 때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1학년 봄 어른들은 감(?)을 제대로 따볼 생각이었는지 겨울철 산에 가실 때마다 다닥다닥 붙어 있던 쪼글쪼글 말라비틀어진 ‘고욤’을 닷 되나 따서 씨를 받아 잘 말려두셨다. ‘씨앗에 침이 묻으면 잘 발아하지 않는다’며 그 달콤한 고욤을 못 먹게 하셨다.

이른 봄이 되자 모래에 묻어둔 고욤 씨를 파서 파종을 서두르셨다. 땅을 골라 배게 씨를 오복이 모를 붓고 산자락에 있는 낙엽을 몇 줌 모아 훌훌 덮어줬다. 미리 노천매장을 해서인지 곧 싹이 돋아 올랐다. 야들야들한 '싸가지'가 움을 틔웠는데 어찌나 잘 났던지 마치 나물이 난 듯 했다.

6월 상순쯤부터 어머니는 밭일 가신 김에 한번 솎기를 시작하더니 겨를 있을 때마다 뽑아 버리기를 거듭했다. 처음엔 셀 수 없을 지경으로 많던 것이 다음해 가을이 되었을 때는 300여 그루만 남았다. 우린 그 고욤나무를 이틀간이나 밭 가장자리와 산자락에 드문드문 옮겨 심는 고된 노동을 했다.

감 홍시 맛있게 먹는 방법은 그릇에다 확 풀어서 으깨 먹으면 훨씬 맛있답니다.
감 홍시 맛있게 먹는 방법은 그릇에다 확 풀어서 으깨 먹으면 훨씬 맛있답니다. ⓒ 김규환

뿌리박음을 한 나무에서 잎이 아직 싹을 틔우기 직전 어느 흐린 날 아버지께선 여러 이웃집에 부탁을 해두셨는지 좋은 종자인 대봉시와 파시 가지를 반 짐 가량 아침 일찍 잘라 오셨다. 그날은 감나무 접붙이는 날이었다. 나는 비닐을 떼어 내 작은 지게에 지고 왕복 십리 길을 따라 나섰다.

고욤나무는 감나무 대목(臺木)으로 즐겨 썼는데 먼저 웃자란 어린아이 키보다 더 큰 나무를 밑둥 언저리까지 죄다 잘라낸다. 굵기는 어른 엄지손가락만큼이 적당하다. 잘 든 칼을 대목 잘린 부분에 1:2 비율로 정교하게 맞추고 나무망치로 ‘툭툭’ 쳐서 둘로 쪼갰다.

한 뼘이 안 되게 짧게 잘라 물통에 담아둔 감나무 가지 아래 접합할 부분 목질부를 새(鳥) 혓바닥 모양으로 납작하고 날카롭게 자르고 껍질 쪽은 두껍게 남겼다. 그 자그마한 걸 두 나무 사이에 끼워 넣으신다. 부름켜끼리 닿게 맞접을 하고 튜브 조각을 당겨 둘둘 돌려 묶고 양초에 불을 붙여 촛농을 떨어뜨렸다.

이랬다고 일이 다 끝난 게 아니다. 이윽고 잘라서 상처가 있는 나무 끝을 수분이 증발하는 걸 막기 위해 불로 한 번 그을려준다.

“아야 비닐.”
“여깄어라우.”

건네 드린 비닐로 대목과 감나무를 한 몸이 되게 단단히 처매주고서야 한 개가 끝났다. 그렇게 그날그날 일 양에 맞춰 나무를 잘라가서 아버지는 사흘이나 산 속 밭엘 가셨다.

일주일쯤 지나서 가봤다. 살아 있는 것은 날씨가 따뜻해지면 뿌리에서 물기를 쏙쏙 용솟음치듯 올려 보내 잎눈에서 꽤 큰 싹이 돋아 있었다. 어떤 것은 고라니 오소리 멧돼지가 지나며 발로 툭 건드리는 통에 꺾여서 죽어 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꽤 죽고 나무뿌리 옆에서 고욤나무 싹이 나오기도 했다.

6할 이상이 살아있으니 활착률은 그만하면 만족할 만 했다. 살아 있으면 이제 그곳에 지주목을 대서 들짐승이나 바람에 날리지 않게 보호하는 작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공을 들여 3년이 지나면 감꽃이 피어 첫해엔 예닐곱 개 열렸다가 그 다음부터 성목으로 자라 한 접, 두 접을 따고 많게 열릴 땐 한 나무에서 10접인 1000개까지 딸 수 있으니 어린 나에겐 감나무가 어떤 존재였겠나.

말이 밭이지 개울을 여섯 번 건너고 오르막 투성이인 그 곳은 산을 화전으로 일군 곳이라 평소에 가기엔 쉽지 않다. 내 고향 마을엔 지금은 노거수(老巨樹)가 되어 어른들보다 더 오래 살아남아 출향자를 반긴다. 멀리서 감나무를 보면 고향 왔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감꽃 두개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요? 어른들은 감꽃만 봐도 그해 수확량을 알았습니다. 해거리를 하니까요.
감꽃 두개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요? 어른들은 감꽃만 봐도 그해 수확량을 알았습니다. 해거리를 하니까요. ⓒ 김규환

우리 집에도 앵두나무, 배나무, 대추나무 한 그루씩에 감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나중에 산에서 캐다 심은 납작감과 똘감나무(떫은 감인 돌감을 이르는 사투리) 한 그루가 새 식구가 되었다. 아마 그 때가 손위 형제 셋이 초등학교만 마친 채 돈 벌로 서울로 올라갔을 무렵이다.

집집마다 감나무요, 밭엔 감나무가 꼭 심어져 있었다. 동네 자체가 감나무골이었다. 감나무골 아이들에게 들녘 보리와 밀밭이 누렇게 익을 때는 한 가지 먹을거리와 추억거리가 추가되었는데 바로 감꽃 감똘개(꽃과 함께 떨어진 어린 감을 표준어로 ‘감또개’라고 줄여서 ‘감똑’이라고 하는데 우린 감꽃 자체를 ‘감똘개’라 불렀다)다.

야들야들 보드랍게 핀 감잎이 앙상했던 나무를 뒤덮으면 봄비 맞고 자라 감꽃이 핀다. 잎에 가려 밑에서 쳐다보지 않으면 감꽃이 쉬 보일 리 없지만 감나무 아래를 지나치면 분꽃 씨나 수류탄 같은 제법 큰 꽃이 톡 떨어져 정수리를 맞히곤 한다.

땅바닥엔 감똘개가 좌악 깔려 지천이었다. 발에 밟히는 게 감꽃이다. 떨어지자마자 처음엔 우윳빛이었다가 차차 햇볕에 그을리면 쪼그라들면서 잘 구운 건빵 갈색으로 변한다.

땅에 떨어진 밥알도 대수롭지 않게 주워 먹던 아이들에게 감꽃이 흙과 범벅이 된들 대순가. 하지만 심술부리는 아이가 특별히 없던 때인지라 지나가는 개미도 구경나와 함께 했다. 하나 주워 먹고 손에 담고, 손에 주워 담았다가 심심하면 또 하나 입으로 가져간다.

손에 담으며 상큼하면서도 물기를 제법 물고 있는 꽃을 주워 살짝 깨물면 사각사각 좋은 느낌이 온다. 떫은맛은 없다. 오히려 단물이 술술 빠져 나오지만 달보드레하고 부드럽다. 은근히 내게로 다가와 안겼다.

개미도 감꽃이 달다고 몰립니다. 그걸 물고 가는 놈들도 있는데요 여기 나온 감꽃은 종자가 자잘한 것이고 개미만 크네요.
개미도 감꽃이 달다고 몰립니다. 그걸 물고 가는 놈들도 있는데요 여기 나온 감꽃은 종자가 자잘한 것이고 개미만 크네요. ⓒ 김규환

이렇게 노닥거리고 있다간 누구라도 오면 낭패다 싶었다. 마침 가장 큰 골목에 살았던 나는 병용이 담장 끝 마을 앞 개울가 근처에 있는 감나무 밑에서 몇 개 줍다가 생각을 고쳐먹었다.

‘안 돼. 이러다 애들이 몰려오면 다 주워갈 거여.’ 집으로 달려가 그릇을 가져올 시간도 없었다.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막 떨어진 거나 떨어진 지 오랜 것을 가리지 않고 닭이 모이를 쪼듯 톡톡톡 집어 주워 담았다.

티끌도 꽤 들어가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급해진 나는 모자를 내려놓고 두 손을 펴서 한 곳으로 쓸어 담기를 열 번 가량 더 했다. 가득 담긴 감꽃을 보고 나는 흐뭇했다. 이제 집으로 가서 내 할 일을 또 해야 한다.

종종 걸음으로 집으로 가던 중 고샅에서 병문이를 만났다.

“야 규환아 너 그거 뭐냐?”
“응 이거? 감똘개.”
“어디서 글케 많이 주섰다냐? 허벌나구만….”
“얼마 안돼야. 쩌그 병용이 감나무에서 줏었어.”
“병용이가 줏지 말라글든디.”
“야색꺄 지기 마당치도 아닌디 어쩧다냐? 골목에 떨어진 것도 지꺼면 우리집 연갈(연기)도 그 집으로 날라가면 그 집이 우리꺼겠다.”
“하여튼지 간에 난 몰러. 근디 그 많은 것 다 뭐할라고?”
“연순이 목걸이 맹그라줄라고. 늬도 가봐봐.”

모자를 두 손으로 받치고 꽤 긴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토방 위로 폴짝 뛰어 마룻바닥에 모자를 내려놓고 캄캄한 방으로 들어갔다. 벽장 안 반짇고리에 든 명주실꾸러미를 꺼내 따가운 햇살이 들이 쬐는 마루로 다시 나와 실을 길게 풀어 이불 꿰매는 바늘에 뀌어 두 줄로 했다.

손에 올린 감꽃 이런 수수한 꽃 보셨습니까? 제 스스로 갯수 조절까지 하니 자연은 이 얼마나 대단한가.
손에 올린 감꽃 이런 수수한 꽃 보셨습니까? 제 스스로 갯수 조절까지 하니 자연은 이 얼마나 대단한가. ⓒ 김규환

걸터앉아 한 손에 한 줌 쥐고 연속으로 두세 개를 같은 방향으로 밀어 넣는다. 상태를 보지 않고 밀어 넣어도 다 꿰어 놓고 보면 색색이 부조화 속에 화음을 이룬다. 절반을 넘길 때 쯤 눈이 침침해져 오던 때 어머니 따라 밭에 간 동생이 돌아왔다.

“옵빠 뭐해?”
“응, 거시기 만들어.”
“감똘개네?”
“째까만 지달려봐. 오빠가 멋진 목걸이 맹그라줄텡께.”
“야~ 신난다. 엄마! 옵빠가 내꺼 목걸이 만들어 준다그래.”

그 많던 것이 꼭지 따고 몇 개 주워 먹는 바람에 약간 부족했다. 얼른 마당으로 내려가 마저 꿰고 양쪽을 홀쳐서 쫘악 늘어뜨리니 어깨 넓이나 되었다.

“연순아 얼렁 와봐.”
“다 했어?”
“이쁘지?”
“잉. 참말 잘 만들었구만.”
“자자 이리 와. 니 모가지 좀 이리 대 봐봐.”

치렁치렁 늘어지도록 길게 매주었다. 동생은 감똘개 목걸이를 차고 밖으로 앙감질로 폴짝폴짝 뛰며 나갔다. 동무들에게 자랑하러 나간 것이다. 얼마 안 되어 다시 돌아온 일곱 살 동생 눈엔 눈물이 글썽였다.

“왜 그려?”
“옵빠 미선이가….”
“그래 차근차근 말해봐, 미선이가 어쨌다고?”
“그 가시내가 내꺼 잡아댕겨부렀어.”

해질 무렵까지 동생 목걸이를 만들어 주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 하루였다. 동생은 그 뒤로 학교에서 건빵을 주지 않는다고 1학년을 3년 동안 다녔다. 시골 마을엔 벌써 감꽃, 감똘개가 져서 누구도 찾지 않아 허전하게 나뒹굴겠다.

풋감이라기 보다 새끼 감이라고 하는 게 더 맞겠습니다.
풋감이라기 보다 새끼 감이라고 하는 게 더 맞겠습니다. ⓒ 김규환

아무도 찾지 않는 감나무 아래 감꽃이 며칠전 온 비에 운명을 다하여 떨어져 썩어갈 모양입니다. 참 맛있는데...
아무도 찾지 않는 감나무 아래 감꽃이 며칠전 온 비에 운명을 다하여 떨어져 썩어갈 모양입니다. 참 맛있는데... ⓒ 김규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이 기자의 최신기사역시, 가을엔 추어탕이지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