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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조각가 홍용선씨. 만원권에 새겨진 세종대왕 인물 초상을 그가 조각했다.
화폐조각가 홍용선씨. 만원권에 새겨진 세종대왕 인물 초상을 그가 조각했다. ⓒ 권윤영

만원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사람이 있다. 돈에 대한 애정과 집착이야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얘기일 수도 있지만 홍용선(57)씨의 애정은 일반인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만원권 지폐에 새겨진 세종대왕이 바로 지폐조각가인 자신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원짜리 지폐의 탄생에 대해 "기계로 찍어내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기 쉽지만 이는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한국조폐공사 기술연구소 홍용선 디자인조각팀장은 만원권 지폐에 담긴 비밀스런 이야기 보따리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화폐 조각은 세밀한 작업

만원 지폐에 새겨진 세종대왕 초상화 조각을 완성하는데 무려 6개월 정도가 소요됐다면 믿을 수 있을까. 디자인과 인쇄 과정 등 모든 절차를 합치면 화폐가 탄생하기까지 1년여의 시간이 걸린 셈. 그만큼 정교하고 힘든 작업의 연속이다.

먼저 디자인팀에 의해 화폐에 그려질 내용과 구도 등 디자인이 정해지면 이를 조각팀에서 넘겨받아 판화로 새긴다. 화폐 조각가들은 디자인 시안대로 각자의 특기에 따라 담당 부분을 나눠 맡은 뒤 차례차례 그림을 새겨 넣는 것.

다른 분야는 기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이 조각 작업은 여전히 수작업으로 이뤄진다. 때문에 가장 어렵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다. 자칫 어느 누가 실수라도 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고행의 길이기에 실수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 그래서인지 항상 긴장의 연속이고 사무실은 쥐 죽은 듯 정적이 가득하다.

지폐 조각은 실물 크기로 제작되기에 모든 것을 미세한 점과 선으로만 표현해야 한다. 1mm 안에 5, 6개의 선이 들어가고 조그만 점선 하나에도 일곱 차례씩 손이 가야 할 만큼 세밀한 작업을 요한다. 그렇기에 속도는 더디기만 하다.

“화폐 조각이란 게 미술대를 나왔어도 힘든 작업입니다. 디자인은 5년 정도, 조각은 10년 정도 연마를 해야 할 정도니까요. 워낙 정교한 작업이기에 체력과 인내는 필수 조건이죠.”

가, 나 만원권은 외국 기술로, 83년 다 만원권부터는 국내 기술진에 의해 만들어졌다.
가, 나 만원권은 외국 기술로, 83년 다 만원권부터는 국내 기술진에 의해 만들어졌다. ⓒ 권윤영
만원에 세종대왕을 새겨 넣은 주인공, 홍 팀장은 우리 나라 화폐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대를 졸업한 그는 지난 68년 3차례에 걸친 시험 끝에 한국조폐공사에 입사했다. 화폐 디자인 조각은 고도의 기술과 장비를 요하는 일이다. 그가 입사한 당시만 해도 우리 나라의 화폐 제작기술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아 외국 기술진에게 판형을 맡겨 제작한 뒤 인쇄만 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6개월에 걸쳐 완성한 세종대왕

오랜 시간 기술을 연마해오던 기술진들이 선진 지폐 조각을 배우기 위해 다른 나라로 연수를 떠난 것이 지난 80년. 그는 오스트리아에서 1년간 그 나라의 조각 기술기법을 연마했다. 한국에 귀국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 떨어진 특명은 바로 ‘만원권 지폐의 세종대왕 초상화를 조각하라’였다. 인물초상은 지폐에 들어가는 많은 그림 중에서도 가장 고난도의 기술을 필요는 하는 것이기에 가장 숙련된 사람에게 맡겨지는 일이다.

“일반인이 보기엔 쉬워보일지 몰라도 세종대왕 조각은 정말 어렵게 탄생했어요. 조각을 해야 하긴 하는데 가진 자료라고는 한국화로 그려진 초상화뿐이었지요. 게다가 입체적인 묘사가 생략된 채 윤곽만 그려져 있어, 어떻게 살을 붙여 그 느낌을 살려내느냐가 숙제였죠.”

그는 사극 마니아가 될 정도로 극중 인물의 수염과 옷차림을 살폈고, 박물관까지 가서 촬영해 온 사진을 보면서 실제 느낌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휴일이면 세종대왕 이목구비를 닮은 사람을 찾고자 사람들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다 오해까지 받았을 정도. 만원권 세종대왕의 귀는 “장모님을 모델로 완성될 수 있었다”고 그는 귀띔했다.

자칫 작은 실수라도 저지르면 공들여 왔던 조각품을 버려야 되니 그 날의 컨디션은 아주 중요하다. 컨디션이 나쁘면 차라리 작업을 안 하기도 하고, 작업이 잘 된다 싶으면 밤을 지새우면서 조각에 몰입하기도 했던 시간들.

세종대왕 인물 조각을 하는 데만 6개월 정도를 보내고, 그렇게 1년여를 거쳐 지난 83년, 처음으로 국내 기술진에 의해 자가 제조된 지폐가 세상에 선보였다.

“만들고 나서 자신감, 성취감도 있었지만 한편으로 조마조마했어요. 반응이 어떨까. 전에 쓰던 외국 제품보다 반응이 안 좋으면 어쩌나 걱정하던 시기였죠. 다행히 반응이 좋았습니다.”

화폐 조각은 고도의 기술을 요구한다.
화폐 조각은 고도의 기술을 요구한다. ⓒ 권윤영
많은 사람들이 “지폐는 한 번 만들었으니 이제 할 일이 없는 것 아니냐”고 묻는다. 이에 그는 “만원권 지폐를 잘 들여다보라”고 응수한다.

지폐 중간에 실선으로 표시된 은색 노출선의 위치나 두께, 왼쪽 아래의 동그라미 세 개의 크기와 색 등이 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점점 치밀해 지는 화폐 위조 범죄를 막기 위해서 수시로 지폐 곳곳을 보강하고 바꾸는 작업을 해 온 것이다.

화폐조각가, 직업에 대한 사명감

지난 83년 자가 제조 지폐가 국내에서 첫 선을 보인 후 94년, 2000년 지폐를 새롭게 보강해서 인쇄하기도 했다. 여기에다 평소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연습을 하지 않으면 어렵게 연마한 실력이 무디어지는 법이다. 홍 팀장은 꾸준히 연구용으로 조각 작품을 만든다.

지난 2002년에는 각국의 주화제작기술을 겨루는 세계 주화 경연대회에서 대상을 거머쥐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그동안 쌓아왔던 노하우를 바탕으로 월드컵 기념주화를 만들어 우리나라 제작기술을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쾌거였다.

“10배 확대경을 바라보며 오랜 시간 세심한 작업을 해오다보니 성격 역시 세심해진 것 같아요. 액자의 작은 흐트러짐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거든요. 작업할 때 얼마나 많은 집중력과 섬세함을 요구하는지 제 머리가 괜히 빠진 게 아니라니까요. 하하.”

요즘 젊은이들이 쉬운 것만 추구하는 세태 때문인지 화폐조각가는 점점 특수 업종, 희귀 직업이 돼가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는 화폐조각가라는 직업에 대한 사명감이 대단하다. 20여 년 동안 국민 모두가 사용해온 만원권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은 가슴 속에 깊이 새겨두었다.

“이제 내년이면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줘야 합니다. 고액권이나 새로운 지폐가 발행되면 좀 더 신선하고 밝아질 것입니다. 제가 만든 만원권은 퇴장해서 역사의 한 장으로 사라지겠죠. 아쉬운 마음도 있지만 퇴직 후에는 순수회화 분야로 저의 작품 활동은 계속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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