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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영화 <소시지 먹기>는 야외 촬영과 세트 촬영으로 나누어서 찍었다. 야외 촬영을 위해서 오클랜드의 서부 지역에서 방 2개짜리 작은 집과 공공 수영장을 빌렸고, 세트 촬영을 위해서는 시내에 있는 한 스튜디오의 작업실을 빌려서 욕실로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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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9일과 30일 이틀 동안은 빌린 집에서 찍고, 3월 30일에는 스튜디오에서, 그리고 하루를 쉰 다음에 4월 2일에는 마지막으로 수영장 촬영을 하는 것으로 일정이 짜여졌다. 나는 수영장 장면에서는 나오지 않으니, 3일만 촬영하면 되었다.

촬영 첫날 예정된 시간보다 30분 정도 먼저 그 집에 도착해서 보니, 벌써 집 앞 길가에 큰 트럭이 두대나 서 있고, 사람들이 조명 반사판을 설치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미 촬영이 시작되었는지, 지아는 '비디오 스플릿'이라고 불리는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앉아 있었다. 옆에 다가가서 서니 그제야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감독 지아가 모니터를 통해 우리의 연기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감독 지아가 모니터를 통해 우리의 연기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 정철용
지아의 소개로 프로듀서 애널리스와 조감독 아나와 인사를 나누고, 이미 만난 적이 있는 의상 및 분장 담당 드날과 소품 등을 담당하는 아트 디렉터 그레이스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촬영감독인 지니는 한참 촬영 중이라 멀리서 손만 흔들어 주었다.

바쁘게 사람들이 움직였다. 15분짜리 이 단편영화에 제작 스태프들이 스무명이 훨씬 넘었다. 그리고 그 스태프들은 조명 및 음향 파트 등의 몇몇 사람들을 빼고는 대부분 여자들이었다. 뒷마당에 한 떼로 몰려 앉아서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엑스트라들까지도 모두 여자들이었다.

영화 속에서도 남자 주인공인 '김'이 나오는 장면보다 여자 주인공인 '수정'이 등장하는 장면이 훨씬 더 많으니, 박수애씨 입장에서는 잘된 일이었다.

의상 및 분장을 맡은 스탭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스탭이 여자들이었다.
의상 및 분장을 맡은 스탭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스탭이 여자들이었다. ⓒ 정철용
혼자 나오는 첫 촬영 신을 한시간에 걸쳐 겨우 마치고서야 잠시 짬이 난 박수애씨와 수다를 떨었다. 아침 11시에 와서 이제 겨우 한장면을 찍었다고 하는데, 그때 시계는 벌써 1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점심 시간이 되었는데도 밥 줄 생각을 않는다. 촬영 일정표를 확인해 보니, 오늘 점심 시간은 오후 4시. 밤 11시에 촬영을 마칠 예정이라 식사 시간을 오후 4시와 밤 9시로 잡아 놓은 것이었다.

배가 고픈 것은 마당 한 구석에 마련되어 있는 과자와 과일 등을 주전부리해서 달랠 수 있었지만, 좀처럼 차례가 돌아오지 않는 촬영 순서를 기다리기란 제법 인내심을 요하는 일이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수정이 혼자 나오는 아침과 대낮의 신들을 몰아 찍는 것으로 촬영 순서가 바뀌어, 나는 밤 8시 30분이 되어서야 카메라 앞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렇게 기다리는 시간이 아주 지루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 전에는 한번도 영화 촬영 현장을 구경해 본 적이 없었기에, 박수애씨 혼자 등장하는 신들을 찍는 모습을 자세히 관찰하는 것이 무척 흥미롭기도 했다.

우리가 영화관에서 볼 때는 하나의 동시적 장면으로 보이는 신들도 사실은 시점이 다른 많은 '쇼트'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음매 없이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 쇼트들의 사이에도 사실은 상당한 물리적 시간의 경과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한 신을 여러 개의 쇼트로 나누어서 찍다 보니 쇼트별로 분명히 자세와 동작이 조금씩 차이가 생기게 된다. 그래도 관객들이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은,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도 조명에 신경을 쓰고 카메라를 손봤기 때문이다.

촬영에 앞서 항상 줄자로 피사체와의 거리를 재서 포커스를 맞추어야 한다.
촬영에 앞서 항상 줄자로 피사체와의 거리를 재서 포커스를 맞추어야 한다. ⓒ 정철용
또한 영화 촬영이 꼭 시나리오에 쓰여진 순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흥미로웠다. 연극은 일단 무대에 올려지면 희곡에 쓰여진 순서대로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흘러가지만, 영화는 한 장소에서 같은 시간대에 찍을 수 있는 것은 앞뒤 순서를 가리지 않고 몰아서 찍는다. 그리고 나중에 다 찍은 그 필름들을 시나리오대로 편집해서 순서를 맞춘다. 그래야 시간과 돈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화 <소시지 먹기>의 경우에도 집을 이틀 동안 빌렸기 때문에, 거실과 침실 그리고 부엌 등 집의 내부가 나오는 장면은 낮 장면과 밤 장면을 구분해서 공간별로 몰아서 이틀 안에 다 찍어야만 했다. 영화의 연기가 자연스런 감정의 흐름보다는 순간적 집중에 의한 몰입을 더 요구한다는 것이 이해가 갔다.

7개월간이나 감독 지아와 함께 연기 연습을 한 탓인지, 박수애씨와 나는 초보 연기자인데도 쉽게 촬영에 임할 수 있었다. 바로 눈앞에서 카메라가 돌아가고 눈부신 조명이 비추고 대여섯명의 사람들이 우리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데도 전혀 떨리지가 않았다.

클래퍼 보드로 마크를 하고 조감독의 '액션' 외침으로 본격 촬영이 시작된다.
클래퍼 보드로 마크를 하고 조감독의 '액션' 외침으로 본격 촬영이 시작된다. ⓒ 정철용
다만 우리를 떨리게 하는 것은 모니터를 통하여 우리의 연기를 주시하고 있는 감독 지아가 외치는 "컷(cut)" 소리였다. 그 소리가 경쾌하면 문제가 없었지만 조금 불만이 섞여 있다 싶으면 여지없이 다시 똑같은 장면을 연기해야 했으니 말이다.

더 좋은 영상을 얻어내기 위하여 욕심을 내다 보니 예정했던 촬영 스케줄이 조금씩 뒤로 밀렸다. 첫날에는 예정보다 30분 정도 늦은 밤 11시 30분에 끝났지만, 이튿날에는 자정을 훨씬 넘겨 새벽 3시까지 강행군을 해야 했다.

그렇게 늦은 시각까지 촬영을 했지만 누구 하나 이에 대해 불평을 하거나 짜증을 내는 사람은 없었다. 영화판에서는 이런 일이 아주 흔한 일이라는 듯, 그들은 기꺼이 그들의 수면 시간을 우리의 영화 <소시지 먹기>에 내주었다.

어린아이를 돌보야 하기 때문에 조금 일찍 자리를 뜬 그레이스를 빼놓고는 지아도 애널리스도 아나도 지니도 드날도 촬영이 끝나는 시간까지 모두 자리를 지켰다. 알음알음으로 불러 모은 팀 치고는 너무나도 마음과 손발이 잘 맞는 한 팀이었다.

박수애씨와 나는, 우리도 그 팀의 일원이라는 것이 가슴 뿌듯했다. 겨우 1분도 안 되는 장면을 찍기 위하여 카메라와 조명 설치까지 한 시간을 기다리고, 그리고 나서도 대여섯번 이상 똑같은 연기를 해야만 했는데도 전혀 짜증스럽지 않았다.

영화 촬영이라는 것이 인내심을 시험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우리의 인내심은 단 한번도 짜증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그것은 돈 한푼 받지 않았지만 이 일은 우리가 좋아서 하는 일이었고, 한 팀을 이룬 이 사람들 역시 한 편의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내준 사람들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으리라.

두번째 날, 예정보다 3시간이나 늦은 새벽 3시에 촬영이 끝났는데도, 짐을 챙기는 제작진들의 입에서는 한숨 대신 휘파람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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