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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출연한 영화 <소시지 먹기(Eating Sausage)>는 고작 15분짜리 단편영화이다. 그래도 배우들에 의해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영화이니, 연기 연습이 없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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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차례에 걸친 오디션을 통해서 선택되긴 했지만 영화의 남녀 주인공들로 뽑힌 우리는 둘 다 지금껏 연기하고는 손톱만큼의 인연도 갖고 있지 않은 완전 초보 연기자들이어서 집중적인 연기 훈련이 필요했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아내 ‘수정’ 역을 맡은 박수애씨와 남편 ‘김’의 역을 맡은 나는 1주일에 한 번씩 주말부부 만나듯이 만나야만 했다.

접선 장소는 오클랜드의 시내에 있는, 이 영화의 감독인 지아(Zia)의 집. 지아의 집이 동쪽 오클랜드에 사는 나와 북쪽 오클랜드에 사는 박수애씨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지난해 8월 24일부터 1주일에 한 번씩 지아의 집에서 만나서 지아의 지도를 받으며 영화 속의 부부가 되어 연기 연습을 했다.

첫 모임에서 지아가 우리에게 준 시나리오를 집에서 읽으면서 나는 지아가 직접 쓴 이 영화의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겼다.

뉴질랜드로 갓 이민 온 중년의 한국인 부부가 낯선 환경과 문화의 충격으로부터 겪게 되는 말 못할 갈등과 쉽지 않은 화해의 이야기를 두 나라의 음식에 기대어 아주 효과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단편영화 <소시지 먹기>의 줄거리

한국에서 뉴질랜드로 막 이민 온 중년의 부부 ‘김’과 ‘수정’은 오클랜드의 서부 지역에 정착한다. 남편 김은 직장에 다니지만 영어를 거의 하지 못하는 수정은 하루 종일 집에서 소일한다.

그러던 어느 날 옆집 키위 아줌마 글래디스를 알게 되어 그녀의 권유로 함께 수영을 배우러 다니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단조롭고 외로운 생활에 활력이 생긴다.

다소 보수적인 남편 김은 아내가 수영장을 다녀오느라 저녁때 집에 늦게 들어오는 날이 종종 생기고, 또 어떤 날은 그가 입에도 대지 않는 뉴질랜드의 음식인 구운 쏘시지를 저녁상에 내놓자 몹시 당황스러워 한다.

마침내 그는 수정이 낮에 외출을 하지 못하도록 집의 창문과 문에 잠금장치를 해서 수정을 집에 가둔다.

그 다음날 자신이 집에 갇혔다는 사실을 깨달은 수정은 이에 굴하지 않고 목욕탕의 수돗물을 한껏 틀어놓은 채 욕조가 마치 수영장이라도 되는 듯 그 안에서 헤엄을 치기 시작한다. 물속에서 헤엄치며 위를 바라다보는 수정의 눈에 환한 빛이 비춘다. / 정철용
즉, 뉴질랜드에 이민 와서도 김치를 비롯한 한국 음식만을 고집하는 남편 ‘김’과 이웃집의 여자들과 함께 수영장을 다니게 되면서 이곳 뉴질랜드에서 가장 흔한 음식인 소시지 구이를 맛보게 되는 아내 ‘수정’의 선명한 대비를 통해서 이민이라는 것이 단순히 새로운 장소로의 이동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의 이동까지도 뜻하는 것임을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었다.

아, 그래서 영화 제목이 <소시지 먹기>로구나. 시나리오를 다 읽고 나서야, 다소 이색적인 영화의 제목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이러한 주제는 이민자로서의 경험이 없으면 풀어내기가 결코 만만치 않은 주제이다. 그런데도 지아가 반복되면서도 조금씩 변화가 있는 가운데 점차 고조되는 극적인 이야기 구조 속에 이러한 주제를 효과적으로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은, 그녀 역시 8년 전에 가족들과 함께 인도에서 이곳 뉴질랜드로 이민 온 이민자였기에 가능한 것이었으리라.

비록 지아의 모국은 우리와는 다른 인도이지만 지아 역시 우리처럼 이민자라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나이와 국적을 넘어서는 이민자로서의 연대감을 가질 수 있었다. 그 연대감은 영화의 이야기와 단단히 결부되어서 연습에 임하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었다.

지아는 초보 연기자인 우리에게 현실 속의‘나’가 아니라 영화 속 인물로서의‘나’를 연기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래서 나는 마치 영화 속의‘김’이 나 자신인 것처럼 생각하면서‘김’이었다면 이런 장면에서는 어떻게 자신을 드러냈을까를 생각하면서 연기 연습을 했다.

박수애씨 역시 연기 연습을 할 때는 씩씩하고 수다스러운 평소의 모습이 아니라 억눌린 속에서도 어떻게든 현실을 헤쳐 나가려는 도전 정신을 숨기고 있는 '수정'의 모습이 되었다. 그렇게 한 장면 한 장면씩 연습을 해나가면서 우리는 차츰 영화 속 인물들의 모습을 우리 마음속에 세워 나갔다.

하지만 영화 속 인물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기가 힘이 드는 장면도 제법 있었다. 그럴 때는 지아는 우리의 삶에서 그 유사한 감정을 느꼈었던 때를 한번 떠올려보라고 주문했다. 그러면 영화 속 인물의 감정에 쉽게 동조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이러한 방법이 이른바 그 유명한 스타니슬라브스키의 메소드 연기법임을, 나는 나중에 <영화의 이해>라는 책을 보고서 알게 되었다.

즉, “연기하는 매순간마다 극중인물로서의 생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이론에 따르면, 연기의 진실은 외면적인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배우 자신의 개인적 감정과 어딘가 공통적인 부분이 있는 극중 인물의 내면적 정신세계에 대한 탐구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그가 개발한 가장 중요한 기법 중의 하나가‘정서회상(emotional recall)’이란 것인데, 이것은 극중인물의 감정과 유사한 감정을 찾기 위하여 배우가 자신의 과거 경험을 깊이 살펴보는 것이다. 우리의 감정처리가 미숙하여 연기의 리얼리티가 떨어지는 장면에서, 지아는 바로 이‘정서회상’을 우리에게 요구했던 것이다.

“모든 연기는 배우의 과거, 혹은 언젠가 경험한 바 있는 어떤 감정과의 연결점이 있다”고 선언한 1950년대 미국의 여배우 줄리 해리스의 말처럼, 가만히 내 지나온 삶을 뒤돌아보니, 그리고 지난 2년 반 동안의 내 이민 생활을 돌이켜보니, 막혔던 내 연기에 감정의 흐름이 다시 살아났다.

연기 연습을 한 지 세 달 만에 우리는 이제 아마추어 수준을 벗어났고, 그런 우리의 연기에 지아는'퍼펙트!'를 연발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둘이 함께 대화를 주고받으며 하는 연기보다 나 혼자 등장하는 장면에서의 연기가 더 힘들었다는 사실이다. 함께 연기 연습을 할 때는 상대방과 서로 호흡을 맞추다보니 자연스럽게 감정의 흐름이 이어진 반면에, 혼자서하는 연기 연습은 쉽게 몰입이 안 되고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럽게 느껴진 것이다.

둘이서 하는 것보다 혼자서 하는 연기가 훨씬 더 어렵다는 이 사실 앞에서, 나는 삶과 세상은 고립이 아니라 연대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리고 이것이 뉴질랜드에 갓 이민 온 중년의 한국인 부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단편영화의 또 다른 주제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단지 배우로서만 지아의 단편영화 제작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영화는 단지 감독인 ‘그녀’의 영화만이 아니라 배우인 ‘우리’의 영화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낯선 나라를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선택한 이민자로서 박수애씨와 나는, 감독인 지아 ‘그녀’의 영화에 출연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아와 함께 ‘우리’의 영화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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