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알 마문씨는 3월 7일로 단식 20일째를 맞고 있다.
ⓒ 전민성
알 마문 섹(28·방글라데시). "'알'은 '깨끗함, 순수함'이란 뜻이고, '마문'은 '돌'이란 뜻이에요."

다카 출신으로 한국에 온 지 5년 3개월 됐다. 가족은 부모님과 형(31), 남동생(22), 여동생(11)이 있다. 특히 가까웠던 외할머니는 시골에 사셨는데, 3~4개월 전에 돌아가셨다. 가족들이 일부러 마문씨에게 소식을 전해주지 않아 얼마 전에야 알았다.

자신의 돈 벌어 사람들을 돕고 싶었던 꿈

대학을 다니며 원단 장사를 하던 아버지를 돕던 마문씨는 자신의 돈을 벌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넉넉하게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지만, 평소 '허칸'(길에서 행상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조금씩 나눠주며 돕던 그는 아버지가 번 돈을 주는 것이 그들을 진정으로 돕는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은 '사람 되려면 대학 가서 공부해야 된다'고 했지만, 저는 저의 돈을 벌어서 사람들을 돕고 싶었어요. 그건 아빠 돈이니까."

외국 가서 돈을 벌겠다고 하자 부모님들은 반대했다. 공부를 계속해도 되는데 왜 굳이 외국에 나가야 하냐는 것이다.

"일주일 동안 할머니를 뵈러 시골을 다녔는데, 버스를 타면 매일 눈물이 났어요. 차 안에서 매일 울었어요. 돈 벌고 싶으니까. 그 때 삼일간 밥도 안 먹었어요."

그때가 1998년 11월. 한국에 있던 사촌형은 "절대 안 된다. 너는 공부도 했으니까, 이탈리아로 가라. 그럼 5년만 있으면 카드(비자)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마문씨는 결국 한국으로 왔고, 5년 동안 일하며 20~30만원씩 모두 250만원을 고향의 친구들에게 보낼 수 있었다.

"고향에서 "어떤 아가씨가 결혼하는데, 돈이 없다" 그러면 돈 보내고. 한국에 못 왔으면 그 돈 못 주잖아요."

회교도인 마문씨는 술 담배를 하지 않아 생활비를 많이 절약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때는 노동운동 같은 거 생각 못했어요. 단지 내 꿈, 내가 돈 벌어 사람들을 돕는다는 그 꿈을 이루고 있어서 기뻤어요."

삼년 반 일한 마석의 공장에서 가구 기술자로 인정받아

"2001년 12월까지 계속 마석에서 일했어요. 그 때 3년 반 정도 한 가구 공장에서 일했는데, 이주노동자 4명에 한국인 4명이 함께 일했어요. 3년 전 제가 처음 왔을 때, 두 사람이 조립하고 있으면, 옆에서 두 사람은 아무것도 안하고 포장을 하기 위해 기다리는 거예요."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마문씨는 일을 세분화하자고 회사에 제안했고,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여덟명이 9시까지 일하며 이틀 걸리던 것을 5시까지 일하고도 하루만에 끝냈어요."

당시 월급을 110만원 받으며 일하던 마문씨는 공장장이 될 수 있는 기술을 얻어 140만원까지 받을 수 있었지만, 그 곳에서 계속 일했다. 쉬는 시간도 없이 하루 종일 일만 하던 이주노동자들이 오후 4시에 30분 정도 쉬었더니 관리자가 "왜 쉬냐"고 묻더란다. ""우리 이렇게 힘들게 일하는데, 이 정도 쉴 수 있는거 아니냐" 하니까 아무 말 못하시더라고요."

▲ 지난 2월 29일 안산에서 가진 이주노동자 집회에서
ⓒ 전민성
아버지처럼 따르던 한국인 동료, 말다툼에 망치 들고 나와

"당시에 38살 먹은 아저씨가 있었어요. 일을 잘 하지 못했지만, 한국 사람이니까, 팀장으로 있으면서 같이 일했는데, "아저씨, 아저씨"하며 아버지처럼 따르던 분이었어요. 조립실에서 4시 반까지 침대 15개를 만들기로 하고 일하고 있었어요. 일을 빨리 끝내야 우리들도 쉬니까, 최선을 다해 일하고 있는데, 그 팀장 아저씨가 "너희 월급 봉투 두개 받아?"하며 시비를 걸었어요."

마문씨는 힘들게 일하고 있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자신이 너무 한심하다는 생각에 "아, *발"하는 소리가 무심결에 나왔다고 한다. 그 아저씨는 "너 지금 나한테 그러는 거야?"라고 따졌고, "아니요, 나한테 그런 거예요"라고 대답했지만, 흥분한 그 아저씨는 망치를 들고 나와 "니 머리를 때려 부수겠다"고 말했다.

"그때 눈물이 나오더군요."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던 마문씨의 눈이 금세 빨갛게 충혈됐다. 마문씨는 아무 말 않고 일을 끝낸 후 다음 날 사장한테 가서 말하고 일을 그만두었다.

"그때까지 '내 공장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열심히 일만 했는데, 막상 그만두고 나니까, 아무것도 없었어요. 자기 공장 아니지만, 3년 일하면서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아직도 생각하면 눈물이 나요."

마문씨는 얼른 눈물을 훔쳐냈다.

'단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 집회 현장에서 들은 '철의 노동자' 노동운동 결심하게 해

"처음에는 (평등노조) 이주지부 활동에 별 관심 없었어요."

말다툼으로 그만 둔 그 가구공장에서 퇴직금을 주지 않자, 친구를 통해 이주지부로 연락을 했고, 퇴직금 300만원 중 200만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알게 된 이주지부 활동가와 함께 여의도 집회에 참석했다가 노동가요 '철의 노동자'를 듣게 된다.

"'단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 그 가사가 저의 마음에 와 닿았어요. 그 때 '다음 날부터 이주지부 활동 해야지' 결심했어요. 육개월 교육 받고, 남양주 지역 분회장이 되었어요. 그렇게 빨리 분회장이 된 경우는 없다고 사람들이 그래요. 분회장 중에서 제가 제일 막내예요. 교육 받으면서 '사람들에게 돈 주면서 도우려면 나도 자본가 되야 하는구나'하는 생각 들었어요."

▲ 고향이 같은 투쟁단의 자히드씨와 절친한 사이다. 자히드씨는 지난 2월 26일 '자진출국정책 파산 선포 기자회견'에서 삭발을 했다.
ⓒ 전민성
마음 속으로 많이 사랑하는 나라 한국, 이주노동자를 노동자로 인정해 주었으면

"이주노동자는 한국 살면서 한국 사회에 도움이 될 거예요. 우리 투쟁이 승리하는 날까지 많이 지지해 주셨으면 해요."

마문씨는 한국 이주노동자 투쟁이 한국 노동자들의 투쟁과 함께 한다며, 한국 노동자들이 투쟁하는 곳 어디라도 함께 할 거라고 말한다.

"이주노동자들 말도 배우고 기술도 익히고, 한국 땅에서 돈 버는 것 보다 한국이라는 나라 마음 속으로 많이 사랑해요. 합법화 얻을 수 있도록 우리 목소리로 우리 권리 요구할 거예요."

"(정부는) 투쟁하면 잡는다고 했지만, 단속 추방 100번 온다면 100번 다 잡히겠어요. 그래도 꼭 우리 권리를 찾겠어요. 우리는 멈출 수 없어요. 어떤 노동자도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해야 해요. 한국 정부가 우리 요구 들어 줬으면 해요."

고국의 노동 환경 바꾸는 노동 운동 하고 싶어

마문씨는 고향에 있는 의류공장 노동자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다며 고국으로 돌아가면 노동 운동을 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는 '돈(을 주기) 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진정으로 그들을 돕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노동자가 있으니까 사장도 있다' '우리 있으니까, 회사 돌아가는거다' '우리 피땀 먹고 사장 돈 버는 거다' 그런 마음 생기도록 먼저 이야기 해 주면서 스스로 투쟁할 수 있도록 돕겠어요."

"여기(한국)서 함께 투쟁하는데 어떤 한 분이 제게 많은 힘 주었어요. 이렇게 투쟁해도 옆에서 믿어 주는 사람 있잖아요."

이름을 밝히지 못하지만, 이주노동자들을 존경심을 갖고 대해 주는 그 분을 많이 존경한다고 꼭 기사에 넣어달라고 부탁한다.

우리가 언젠가 한번쯤 가져보았던 꿈, '가난한 이웃과 가진 것을 나누고 그들과 함께 현실을 바꾸어 보고자 하는 그 소박한 꿈'을 28살의 청년 마문씨는 '이주노동자 운동'으로 실천하고 있었다.

'산업연수생제도 폐지'와 '미등록 이주노동자 합법화'를 요구하며 114일째 명동성당 찬 바닥을 지키고 있는 알 마문씨. 그는 외국인보호소 안에서 단식농성 중인 이주노동자들을 지지하며, 지난 2월 17일부터 단식을 시작해 3월 7일 단식 20일째를 맞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알 마문씨를 비롯한 일곱 명의 이주노동자들이 여수와 화성외국인보호소, 그리고 명동성당에서 '연행동지 석방'과 '미등록 이주노동자 합법화'를 요구하며 3월 7일로 단식 20일째를 맞고 있습니다. 

◈ 후원계좌
농협 386-12-095004 예금주: 김선희

http://migrant.nodong.net/sitin/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03년 동네의 성미산이 벌목되는 것을 목격하고 기사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2005년 이주노동자방송국 설립에 참여한 후 3년간 이주노동자 관련 기사를 썼습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