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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세된 희망 표지
거세된 희망 표지 ⓒ 서정필
버릇처럼, 들어간 책방 ‘그날이 오면’에서 버릇처럼 고른 책이 ‘거세된 희망’(폴리 토인비·2004·개마고원)이었다. 굳이 더 이유를 찾자면 표지의 목장갑이 왠지 강하게 남았고 ‘주목할 만한 새 책’을 적는 화이트 보드에 이 책의 이름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읽는 내내, 텍스트의 배경은 영국이었지만 난 그 것을 내가 살고 있는 곳 대한민국의 이야기로 보고 책장을 넘겨갔다. 그리고 책을 덮은 후, 저자가 폴리 토인비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유력 일간지의 논설위원이고 배경이 우리 사회였다고 해도 거의 동일한 글을 나왔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했다.

이 책은 바로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이 책은 영국사회에 대한 기록이지만, 책에서 우리는 우리 대한민국의 모습을 본다. 홍세화 님이 ‘악역을 맡은 자에 슬픔’에서 잘 지적한 것처럼 우리 사회는 상류층과 하류층 사이의 소득격차가 극도로 벌어지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상징적 의미의 사회적 상승이동까지 거의 멈춰버렸다.

‘노력만 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이데올로그는 사회불평등을 합리화하는 수단이 되어왔고, 가진 자들은 그들의 특별한 삶에 대한 사회적 정당성까지 획득하며 편하게 삶을 즐길 수 있었다. 가진 자들은 자신들의 노력여하와 무관하게 자녀들에게 부와 명예를 세습시킬 수 있었지만, 저임금 노동자들의 자녀는 부모들의 한숨뿐인 삶을 그대로 이어받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무능력자라는 비판과 함께, 여기서 '구두닦이 서울대 수석 신화 '장승수'와 같은 인물의 예를 들며 너무 성급한 주장이 아니냐고 되물을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대답은 전혀 성급하지 않다는 것이다. 장승수는 언론이 만들어 낸 신화일 뿐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것을 잘 받아들인 로또 당첨 확률과 같은 비율도 등장하는 신화 말이다. 장승수는 사회적 계급의 상승이동의 상징처럼 박제화되었지만 사실은 기존 이데올로그를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보는 게 정확하다.)

토인비가 지적한 이러한 상황은 영국 사회 현실에 대한 고발이지만, 정확히 한국 사회의 현실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정도는 책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통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더욱 심각하다.

"하청노동자도 인간이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

어차피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일 수밖에 없는 나의 신분에 한 점 부끄럽지 않다. 노동자 신분에 보람과 긍지, 자부심도 있었다. 하지만 한 인간으로서 이 사회에 또는 현대 좃지나 공장에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로 산다는 것은 인간이길 포기해야 하는 것이며, 현대판 노예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며, 기득권 가진 놈들의 배를 불려 주기 위해 제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 故 박일수씨 유서 중에서


그리고는 같은 제목을 가진 노래 두 개가 떠올랐다.

아! 대한민국.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가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어. 이렇게 우린 영예로운 이 땅을 위해 이렇게 우린 이 강산을 노래부르네. 아하 우리 대한민국, 아하 우리 조국 아하 영원토록 사랑하리라’
-정수라 노래, '아! 대한민국' 중에서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기름진 음식과 술이 넘치는 이 땅. 최저 임금도 받지 못해 싸우다가 쫓겨난 힘없는 공순이들은 말고. 하룻밤 향락의 화대로 일천만원씩이나 뿌려대는 저 재벌의 아들과 함께. 우린 모두 풍요롭게 살고 있지 않나. 우린 모두 만족하게 살고 있지 않나. 아, 대한민국, 아, 우리의 공화국'
-정태춘 노래, '아! 대한민국' 중에서


제목은 같지만 내용은 다른 두 개의 아! 대한민국

우리는 노력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배웠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아주 작은 의문마저도 곧 사회불안을 조장하는 불순한 행동으로 인식하도록 배워왔다. 힘든 노동으로 하루의 생존을 이어간다는 것은 그만큼의 삶의 무게에다가 젊은 날 ‘노력’을 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낙인까지 찍혀야 함을 의미했다.

'너도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

그렇게 부모들은 하룻밤 향락의 화대로 일천만원이나 뿌려대는 재벌의 아들과 최소한 친구라도 되라 하며, 최저임금을 받지 못 해 쫓겨난 공순이들을 인간취급도 하지 말라고 자식들에게 강조했다. 왜? 가 거세된 채…

마치 OX퀴즈에서 '컨닝'을 해서라도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사람들은 OX로 구분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강박 속에 아이들은 자라난다. 하지만 최종단계까지 오르는 사람들이 정해져 있다. 게임이 공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국보다 더한 부의 불평등에 그보다 더한 부조리와 편견을 가진 사회 바로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가슴아프지만 현실이다.

책 속에서, 나는 크게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같은 사람, 다른 대접

‘거세된 희망’에는 두 명의 ‘폴리 토인비’가 있다. ‘가디언 지’ 칼럼니스트 토인비와 생존을 위해 이 곳 저 곳 용역회사를 전전해야 하는 일당 잡부, ‘폴리 토인비’, 이 글은 분명 동일인이지만 어떤 것에 의해 ‘전혀’ 다른 대접을 받아야 했던 작자의 기록이다. 그 어떤 것에 대한 생각을 담은 기록 말이다. 같은 사람이지만 사회적 위치에 따라 완벽하게 다른 대접을 받게 한 무언가는 과연 무엇일까? 그 것은 그를 둘러싼 것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가 아니라….

무서웠다.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 경험을 서술한 글을 접하니 좀 더 무서웠다. 같은 사람이라도 위치에 따라 다른 대접을 받는 것, 지금까지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능력사회’ 라는 허무한 이데올로기가 한 번에 완전히 무너지는 듯 했다.

책 말미에 상위 0.5%에 해당하는 소득을 버는 중간관리자가 들으면 정말 철없는 소리라고 할지는 모르지만 난 아직 돈보다는 사람이 먼저라고 생각했는데 그 것이 완전히 잘못된 생각임을 더욱 절실히 깨닫게 해 주었다.

삶의 마지노선

'당신 삶의 마지노선은 어디인가? 그러니까 당신 삶은 적어도 어때야 한다는 기준은 어디까지인가? '

책을 읽으며 난 계속해서 이런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지고 있었다. 과연 나는 이런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자신이 없었다. 아니 자신이 없어야 할 것 같았다. 대충 계산만 해도, 난 ‘용역직원 토인비’가 수많은 시간 발품을 팔아야 할 돈을 고정적으로 나를 위해 쓰고 있었다. 일주일마다 한 번씩 구입하는 시사잡지 두 권, 거리를 지날 때마다 하나씩 사 마시던 테이크 아웃 커피, 버릇처럼 들른 사회과학 서점에서 한 권씩 사 오는 책, 거기다가 신문구독료…. 토인비가 한 고민을 나도 똑같이 하고 있었다. 살면서 한 번도 내일 삶을 유지하기 위해 오늘 내가 쓰고 싶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적어도 반년에 한 번은 영화를 봐야 하고, 계절이 바뀌면 유행하는 옷도 사야 하고, 오락도 한 게임 해야 하고, 차도 한 잔 마셔야 하고, 친구들도 만나야 하고, 지하철에서 버릇처럼 시사잡지도 펴들어야 하고, 스트레스 풀기 위해 술도 한 잔 해야 하고… 기타 등등

솔직히. 한 번도 그런 것들이 삶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지 않았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과연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사뭇 궁금하다. 우리 삶의 마지노선은 어디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동안 내가 기대어 온 알량한 안위는 좀 더 망가져 갈 것이다. 최저임금도 받지 못 해 하루하루를 허덕이며 사는 사람들의 마지노선은 어디인가? 우리는 같은 사람을 다르게 보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살만하다고 모든 사람이 살만하다고 착각을 하며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마치며

이 책을 통해 어떠한 사실에 대해 새롭게 알았다고 할 것은 없다. 단지 그동안 추상적 관념으로 떠오르던 것이 이젠 구체적 형상을 띄며 질문을 계속 하기 시작했다. ‘자아실현’이라는 말이 얼마나 대단한 사치일 수 있는지? 하루하루의 삶의 유지하기가 얼마나 힘들 수 있는지? 어떤 사람이 하루만에 벌 돈을 많은 사람들은 왜 몇 년을 일해도 벌 수가 없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계속

‘공부 안 하면 너도 저렇게 된다’

를 반복하는지? 밥맛이 떨어지고 술맛만 생기게 하는 질문들이 좀 더 명확한 모습으로 다가온 것이다. 이 책은 어떻게든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고 선전하는 사람들에 대한 질문이다.

자, 이래도 '노력'만 하면 잘 살 수 있는가?

거세된 희망

폴리 토인비 지음, 이창신 옮김, 개마고원(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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