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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20년쯤 지난 이야기이다. 부서는 달랐지만 한 해 차이로 입사해 서로 동기처럼, 친구처럼 지내던 남자 동료가 있었다. 야근을 하기 위해 이른 저녁을 먹으러 간 자리에서였다. 회사 근처에 새로 문을 연 자그마한 우동 가게였는데, 그날따라 머리 희끗희끗한 분들이 유난히 많이 앉아 식사를 하고 계셨다.

자리에 앉아 각자 먹을 음식을 주문하고 나서 주위를 한 바퀴 휙 둘러보더니 그 친구가 입속말로 중얼거린다.

"노인이 되면 무슨 재미로 살까?"

당시 나는 노인 대상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로 노년의 삶에 관심이 있었긴 하지만, 뭐라 답할 말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저 옆에서 국수를 드시는 할아버지 얼굴만 슬쩍슬쩍 훔쳐보며 앉아있었다.

나보다 두 살 위니까, 그 친구 나이 올해 마흔 일곱. 그 때로부터 비록 이십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지만, "노인이 되면 무슨 재미로 살까?"라는 그 때의 질문에 이 책〈삶의 열정에는 마침표가 없다〉를 그 답으로 내밀고 싶다.

이 책은 지금 노년기를 보내고 있다는 공통점을 빼고는 다 다른 배경과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나이 먹는 것"이란 주제에 대해 답한 것을 방송인인 윌러드 스콧이 정리한 것이다. 길게는 대여섯 쪽에서부터 짧게는 서너 줄에 나이 먹는 것에 대한 그 사람 나름의 생각, 의견, 경험, 느낌들이 담겨있다.

남성과 여성은 물론 전직 대통령에서부터 유명한 방송인, 작가, 경영인, 전문직 종사자, 평범한 시민이 두루 섞여있는데 그들의 이야기에서 모아지는 재미있는 사실은, 한 두 사람을 빼고는 모두들 나이 먹는 것이 그리 나쁘지 않다고 털어놓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나이 들어가면서 가족, 사랑, 우정, 관계, 이런 것들이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제대로 알게 되었고, 그 소중한 것들을 진정으로 즐길 수 있게 된 노년의 시간적·정신적 여유가 참으로 편안하게 고맙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유쾌한 한마디를 덧붙이기도 한다.

"나이 먹는 게 이렇게 좋을 줄 알았다면 진작 나이를 먹는 건데…."

지금 사는 물건은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 섹스 없이도 그럭저럭 살 수 있음을(투덜대기는 하겠지만) 알게 되지만 안경은 필히 있어야 한다, 납치된 비행기에 인질로 잡혀있을 경우 맨 먼저 풀려나게 된다, 일요일 저녁에 다음날 출근할 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비수기를 골라서 여행할 수 있다, 하기 싫은 일은 더 이상 안 할 수 있다, 사람들이 더 이상 생명보험에 들라고 권유하지 않는다…. 책 속에서 노년들이 털어 놓는 '나이 먹는 즐거움'이다.

즐거움이 많아서일까. 책 속에서 그들은 다시 젊어지고 싶지는 않다고 한다. 그리고는 성장의 과정에서 경험할 수밖에 없는 실수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하긴 올해 77세인 내 친정어머니도 다시는 청춘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말씀을 간혹 하신다. 어머니가 그러시는 이유는 젊은 시절의 실수나 실패와는 다른 딱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수험생 부모 노릇이 싫으시단다. 지난 시절, 우리 삼남매 모두 재수 한 번하지 않고 원하는 학교에 다 들어갔는데도 어머니께 수험생 엄마 노릇은 가장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던 모양이다.

한편, 책 속의 인물들은 자신이 오래 전에 지나온 젊은 시절을 지금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는 충고도 빼놓지 않는다. 자신이 선택한 일을 행복하게 하라, 현재의 일을 즐겁게 하고 즐겁지 않으면 상황을 바꿔라, 자신이 되고 싶은 사람이 되려고 열심히 노력하라, 역경 앞에 강해지고 성공 앞에 겸손해져라, 말을 조심스럽게 골라서 하라…. 평범한 사람들의 잠언이기에 오히려 쉬우면서도 간단명료하다.

다만 안락한 노년 생활이 보장되는 미국의 상황이기에 저들은 먹고사는 일에 아무런 걱정이 없고 캠핑카를 타고 다니며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여유가 곳곳에 넘쳐나고 있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힘들고 그리 행복하지 않은 우리 사회의 노년이 몹시 아프게 느껴진다.

'나이 먹는 것, 나이 들어 좋은 점, 젊은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라는 같은 주제로 우리나라의 노년들에게 질문을 한다면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차이가 드러날 것이다. 살아온 배경도, 삶의 철학과 방식도, 노년을 받아들이는 사회와 개인의 눈도, 인간의 기본 생활을 보장하는 정도도 다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와 견주어 부족한 것뿐이라 해도 노년이야기를 자꾸 하는 수밖에 없다. 상황이 다르고, 사람이 다르다 해도 노년을 자꾸 이야기해 우리들 인생에 노년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도록 도와야 한다. '준비 없이 맞는 노년'에는 차라리 '위태롭다, 위험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이다.

삶을 마치는 그 날까지 자신의 신체와 정신 능력에 걸맞은 열정을 갖고 살아가는 일, 거기다가 자신과 가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가진 것이 많든 적든 인생의 마침표는 선명하고 아름답게 찍힐 것이다.

그러니 과욕(過慾)을 버릴 일이다. 노욕(老慾)을 경계할 일이다. 그러나 팽팽한 욕심 주머니가 노년에 접어든 순간 알아서 바람이 빠지는 것은 아니므로, 미리 미리 준비할 일이다. 결국 지금 사는 이 모습 그대로 우리는 늙어갈 것이 분명하다.

이 모든 것을 알아차린 노년이 어찌 재미없겠는가. 다시 또 누가 내 옆에서 "노인이 되면 무슨 재미로 살까?" 궁금해 한다면, 노년의 즐거움과 행복을 이야기하기 전에 나는 먼저 그에게 물어보리라. "너는, 당신은 무슨 재미로 사는가?"

(삶의 열정에는 마침표가 없다 / 윌러드 스콧 편저, 박미영 옮김 / 크림슨, 2004)

덧붙이는 글 | 〈나이 먹는 것에는 근사한 장점이 있다!(휴 다운즈)〉
·중년에 이르기까지 삶을 잘 관리해 왔다면 인생을 안전하고 유쾌한 여정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 
·섹스를 통제할 수 있다.
·그 자체로 기쁨이 되는 많은 감사한 생각들을 만들어내게 된다.
·인생 프로젝트를 세 배나 크게 즐길 수 있다.
·나이가 들수록 질적으로 완성된 삶이 이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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