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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뒷산과 묘동
마을 뒷산과 묘동 ⓒ 김규환
그런데 이보다 더 오래되고 진한 추억의 안방극장이 하나 있었다. 70년대 후반에 방영된 전설적인 드라마 <전우>는 나시찬씨가 중심인물이었는데, 골격이 어찌나 크던지 보는 이로 하여금 주눅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거기에 카리스마까지 있었다. 소대장의 지휘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그들은 시대의 희망이었다.

강이 있던, 높은 산이 가로막거나 눈보라 속에서도 난관을 헤쳐나가는 그들의 용맹은 한이 없었다. 적진 깊숙이 박혀 있어도 이빨로 수류탄 뇌관을 휙 뽑아 몇 번 던지면 수도 없이 쓰러지는 적병!

옆 마을까지 가서 밤늦도록 마당에 멍석을 깔고 몇 개월을 보았다. 그러나 이 재미난 일도 날씨가 쌀쌀해지면서부터 중단되었다. 우린 빨치산 활동으로 국군과 대치가 가장 심하게 지속됐고, 민간인 피해도 적지 않았던 곳이 바로 이 백아산(전남 화순 동북부에 있는 산으로 흰 거위가 날아가는 모양새를 갖고 있는 810m. '마당바위'는 천연의 요새다)이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은 채 반공 드라마에 넋을 잃고 있었다.

겨울이 되자 옆 마을 작은 방에 들어갈 수 없었던 아이들은 백아산판 전우를 손수 제작했다. 늦가을 오후 2시 무렵 아이들은 부모님 몰래 집을 빠져 나온다. 누가 지시한 것도 없다. 때가 되면 나타나는 건 산사람 빨치산 교육을 따로 받아서도 아니다. 부모님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가진 애를 썼다.

"어디가?"
"예, 방학 숙제 할라고라우…."
"얼렁 와서 쇠죽 쒀야 헌다."
"알았어라우."

"휴-."

간신히 몸을 집밖으로 빼내는데 성공한 아이들에게 이 때만큼 몸이 달아 힘겨울 때도 없다. 그러나 몰골을 보면 옆집으로 숙제를 하러 가는 행색이 아니다. 복장도 불량 그 자체다. 닳고 헤져 꿰매 입기도 뭐한 가장 허름한 옷을 꺼내 입고 나서는데 무슨 숙제란 말인가. 손에 들려 있어야할 책이나 '탐구생활'은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눈쌓인 묏동 주변을 더 끌어 당겨 찍었습니다. 이젠 나무도 많이 컸고 아이들이 놀지를 않아 빈 공간이 거의 없어 보입니다.
눈쌓인 묏동 주변을 더 끌어 당겨 찍었습니다. 이젠 나무도 많이 컸고 아이들이 놀지를 않아 빈 공간이 거의 없어 보입니다. ⓒ 김규환
곧장 고샅을 돌고 돌아 가파른 오르막길로 접어든다. 헉헉거리며 뒷동산으로 올라 대밭을 끼고 돌아 숨을 헐떡거리며 오르면 양씨(梁氏)들이 관리하는 '장가(張哥)들 묏동(산소)'이 나온다. 주변엔 산죽과 키 작은 잡목, 억새가 어루러져 나뒹굴기 적격이다.

벌써 많은 아이들이 와서 묏동 위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 묏동 크기는 왕릉만 했다. 묘동 봉분은 20명이 넘게 올라가 뒹굴며 놀 수 있고, 묘 주변에는 200여 명이 안전하게 행사를 치를 수 있는 대단한 크기였다. 총 면적은 300평이 넘는데 작전 지시는 항상 이곳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우린 단지 나 아닌 편은 무조건 적이라는 개념만 있을 뿐 남북으로 나누질 않았다. 두 패로 나뉘어 주변 어디에 숨는다. 억새나 대밭, 나무 숲 사이에 납작 엎드려 매복했다가 길목 또는 목 진지에서 적이 나타나면 상대방을 발견하자마자 손가락을 총 모양으로 만들어 재빨리 "빵!"하고 쏘면 그 자리에서 즉각 사살되는 간단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렇다고 큰 소리를 내게 되면 뒤따라온 적병에게 노출되어 한꺼번에 몰살당한다. 의미없는 장렬한 전사를 피하려면 나지막하게 상대가 들을 수 있을 만큼만 "빵!"하고 쏘면 그만이다. 적을 찾아 이동하기도 하지만 적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일어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가는 뒤통수를 얻어맞기도 한다. 그렇게 기나긴 전투는 지속되었다. 상대편이 한 명도 남지 않을 때까지 지속된다.

처음에는 묘 주변에만 있다가 차차 대밭으로, 나중에는 묘 뒤쪽 양지바른 소나무 밭으로 돌아 기어올라 한 편을 제작하는 소요 시간이 자꾸 길어진다. 산몰랭이까지 간 아이들을 찾기란 쉽지 않다.

어떤 경우는 산으로 30분 이상을 찾으러 갔다가 허탕칠 때도 있는데 몰수 게임을 선언하고 주위를 뒤져보면 바짝 마른 억새풀 사이에서 잠을 청한 아이도 있다. 우리 양지마을 뒤쪽은 아직 해가 지지 않아 겨울에도 푹신푹신하고 따뜻했다. 그뿐이 아니다. 마을로 들어와서는 방구석에 누워 있다가 나중에 발견되면 즉시 처형당하는 일도 있었다.

감독의 "액션!" 소리에 해당하는 "시~작!" 소리와 함께 각자 자리로 갔다. 삼삼오오 또는 홀홀단신 자신이 봐둔 최고의 자리를 찾아 헤맨다. 흙구덩이에 들어가기도 하고 풀숲, 나무 사이에 또는 은폐물에 붙어 요쪽저쪽을 살핀다. 바닥만 살피는 특성을 역이용해 아예 나무 위에 올라 편히 쉬고 있는 아이도 있다.

우리 마을에서 바라본 백아산-그곳엔 마당바위가 있습니다.
우리 마을에서 바라본 백아산-그곳엔 마당바위가 있습니다. ⓒ 김규환
심심하던 차에 전우 병문이와 소곤대고 있는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토끼 마냥 귀를 쫑긋 세우고, 숨까지 멎은 상태로 병문이와 둘이서 나누어 사방을 살핀다. 몸을 수그리고 살금살금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오는 정체 모를 적이 우릴 엄습해왔다.

"빵!"
"빵!"

연발탄을 쏘자 적군은 그 자리에 고꾸라져 쓰러진다. 그 자리에 우리가 있을 거라 짐작하고, 대밭에 발을 찔리면서 까지 이곳으로 왔지만 우리가 쏜 두 방의 총탄에 쓰러지고 만 것이다.

"에잇 씨벌!"
"야 새끼들아 조용히 안 해! 니기들 큰 소리로 말하면 뒤질 줄 알아…."
"알았어, 조용히 가면 될 것 아녀."

불문율이 하나 있었다. 절대 그 자리에 누가 있다고 발설을 하지 못한다. 만약 발고를 하였다가는 다음 번에는 놀이에 참여할 수 없게 하는 혹독한 벌을 내린다. 애당초 그럴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죽은 자들은 처음 출발하였던 묘동 주변에 모여서 옴짝달싹 할 수 없게 갇히고 만다.

뒷동산은 아이들이 얼마나 쓸고 돌아다녔는지 웬만한 곳은 번지르르하게 길이 나 있다. 잔디를 헛디뎠다가는 미끄러지기 일쑤다.

전우 놀이는 한번에 끝나지 않는다. 눈보라가 쳐도 계속된다. 된바람이 몰아쳐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하루에 세 번에서 다섯 번은 지속되는 전쟁 게임이며 전투다.

상황이 종료되고 이긴 편은 "만세!"를 부른다. 묘 주위로 오르면서,

"야 너 몇 명 죽였냐?"
"두 명."
"에에 고작 그 정도."
"글면 너는야?"
"세 명. 근데 뒤 따라 온 놈한테 나도 죽었어."
"다음 판에는 같이 가자."
"좋아."

고교 졸업 후까지도 살았던 우리마을 전라남도 화순군 북면 방리 양지마을
고교 졸업 후까지도 살았던 우리마을 전라남도 화순군 북면 방리 양지마을 ⓒ 김규환
다시 다음 판이 이어졌다. 밤 6시 무렵 몇 명 남지 않은 아이들은 발아래 쌓인 눈에 미끄러지면서도 계속 이어갔다. 사람이 보일락말락한 상황 귓전이 떨어져 나갈 듯 손이 곱아오는데도 밥 먹으러 갈 생각을 않는다. 결국 하나 둘 빠져나가고 열 명 정도밖에 안 되는 아이들은 마을로 잠입을 감행하고 조용히 집으로 숨어들었다.

"야 이 호랭이 물어갈 놈아. 시방까장(지금까지) 뭐하고 왔냐?"
"……."
"얼렁 밥 쳐 묵어!"

끽 소리 한번 못하고 무를 얇게 쳐서 끓인 냉잇국에 밥을 둘둘 말아 후루룩 몇 번 떠먹고는 윗목에 조용히 버티고 있다가 잠잠해진 틈을 보아 옆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지속된 전우 놀이는 숱한 놀이 중에서 결코 잊지 못할 재미난 놀이였다.

감독, 주연, 섭외, 소품 준비, 행정, 대본 작성에 제작기간과 시간 투자 마저 만만치 않았던 전우 놀이, 같이 했던 전우는 다 어디로 갔을까.

전우 제작에 관한 기본 사항

감독
초기만 중학교 선배, 나중엔 감독 권한이 유명무실해져 배우 겸 감독 체제로 바뀜

주연
김규환 등 화순 북면동국민학교 학생 3~40명,

조명
하느님이 주신 자연광. 어두워지면 제작이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음악
전축은 필요없었다. 참새, 까치 등 새들이 스텝과 배우를 따라다니며 함께 놀았다. 간혹 머리 위에서 짹짹거리는 바람에 적에게 들키는 경우도 있었다.

섭외
각자 알아서 몸만 갖고 나오면 됨

소품
굴러다니는 나무막대기나 돌멩이 다량과 손가락

행정
300평이 넘는 묘지를 중심으로 수년간 아이들이 놀았던 '장가들 묏동' 주변 장소 섭외를 위해 특별히 한 것은 없고 개기는 게 다였다.

원작 및 대본
원작은 TV에 나오는 한 주간 <전우(戰友)> 방영 분이었고, 대본은 그날그날 각본 없이 아이들 상상력에 의해 즉흥적으로 써짐

제작기간
70년 대 후반 가을부터 늦겨울까지 약 4개월간 3년 간 총 12개월. 오후 2시부터 밤 예닐곱 시까지 중단 없이 진행

제작 총 비용
물적 양적으로 계산하기 힘드나 일설에 의하면 당시 그 지역의 소가 삐적 말랐다고 함

제작 후 반응

부모들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배우들을 찾으러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마을방송을 해댔지만 제작이 끝날 때까지 아이들 태반이 사라져 마을이 텅 빈 듯 고요했다고 하며 후에 남자 배우는 방방곡곡 흩어져 대한민국을 지켰다고 함. 한 집 당 최소 1명에서 최대 4명까지 차출되어 마을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힘.

제작진 한사람의 소회-김규환 편

다시는 이 땅에서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 국내뿐일까. 전 세계 민중에게 어떤 명분으로도 전쟁은 미화될 수 없다. 더군다나 냉전시대에 살았던 우리들은 서바이벌게임이나 전우놀이도 장려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또한 약육강식의 논리가 횡행하는 이 때 어느 누구도 절대강자라고 생명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행위는 범죄행위다. 인권을 논하기 전에 미국을 비롯한 이라크 파병국가들은 한시 바삐 점령국을 떠나라. 추가파병도 철회되어야 마땅하다. 늑대 탈을 쓰고 어찌 평화유지군 노릇을 하려고 하는가.

덧붙이는 글 | 우린 그렇게 아무 것 없어도 즐겁게 놀았습니다. 우리 마을엔 78년도에 전기가 들어오고 TV가 설치되었지만 옆마을 가야 볼 수 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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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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