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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있는 ‘만화로 보는 그리스로마신화’ 주인공들
어린이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있는 ‘만화로 보는 그리스로마신화’ 주인공들 ⓒ 가나출판사
출판계의 ‘대박’이 터졌다. ‘만화로 보는 그리스로마신화(토머스 불핀치 지음/편집부 글/홍은영 그림/가나출판사)’가 천만 부(출판사측 집계)라는 기록적인 판매량을 보인 것. 하지만 어린이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이 책에 양성평등을 저해하는 내용과 형식이 많다는 지적이 있다. 무엇이, 어떻게, 왜 문제인지 살펴본다.

최근 어린이들 사이에서는 그리스로마신화 속의 신들의 계보를 외우는 것이 인기다. 초등학교 2학년 딸을 둔 신수민(36·청담동)씨는 “요즘 초등학생 사이에서는 공부를 잘해도 신들의 계보와 신화의 내용을 줄줄 꿰차고 있지 못하면 친구들 사이에서 무시를 당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대학생과 일반인도 버거워했던 ‘교양’을 어린이들이 체득하고 있는 것.

그리스로마신화 열풍의 근원은 ‘만화로 보는 그리스로마신화’이다. 2000년 11월 1권을 출간한 뒤 현재까지 18권이 나온 이 책은 그리스로마신화를 최대한 ‘쉽게’ 전하기 위해 노력했다.

바로 그 점이 어린이들에게 먹혀든 것. 아빠가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액자형식’을 취한 것도 그 일환. 그런데 그것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이 있다.

아빠가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이, 엄마가 등장한다. 어김없이 엄마는 식모처럼 앞치마를 두르고 다과를 준다.

아빠는 언뜻 자상하게 이야기를 전하는 듯하다. 하지만 전하는 이야기의 내용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리스로마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도식적이고 이분법적으로 나누기 때문.

남성 '능동적', 여성은 '수동적' 묘사

사랑과 일 앞에서 여성은 늘 수동적으로 기다리며, 남성은 늘 적극적으로 쟁취한다. 여성은 하나같이 구슬 같은 눈에 글래머 몸매를 지녔고, 남성은 판에 박은 것처럼 울퉁불퉁한 근육질을 자랑한다. 여성은 남성에게 깍듯이 존대하고, 남성은 여성에게 반말로 하대하면서 낡은 순정만화식 구어체로 대화를 나눈다.

이렇듯 이 책은 알록달록 과장된 색의 옷을 입은 '얼짱', '몸짱' 인물들이 과장된 몸매를 자랑하는 내용이 적지 않다.

일부 학교에서는 이 책의 야한 장면만 돌려봐 문제라고 한다. 만화계에서는 이 책이 ‘교육용’이라는 포장에 싸인 ‘독버섯’이 아닌지 검토해야 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 책의 번역과 그림, 편집 등을 총괄했던 출판사의 입장은 어떨까. 표광수 가나출판사 편집장은 “옳고 그름을 떠나서 책을 꼼꼼하게 분석해 비판하는 것은 환영할 일”이라면서도 “남녀평등과 역할 분담 등의 가치도 중요하지만 신화의 세계를 현재의 관점만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반박했다.

또한 표 편집장은 “일부 그림의 선정적인 면은 인정하며, 만화가의 의견을 수렴해 수정하는 작업을 거친 바 있다”면서 “일부 역기능을 떠나 많은 어린이들이 왜 이 책을 읽고 좋아했는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만화계도 이 책의 순기능에 대해서는 인정한다. 교육용 만화의 확대로 만화의 편견을 불식시키고 만화시장의 저변을 확대한 긍정적인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성평등을 저해하며 외모지상주의를 부추기는 이 책에 대한 합당한 비판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만화계 안팎에서 커지고 있다.

“내용·언어·형식등 성정체성”지적

만화 스토리작가인 이영미씨는 이 책에 대해 “평가조차 곤란한 ‘저질’이라며 침묵하던 만화계도 반성해야 한다”면서 “이 책이 많은 어린이들에게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부추기고 그릇된 성 정체성을 심어줄 위험이 크다는 것을 만화계가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비판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작가는 “이 책은 ‘교육’과 ‘교양’의 가면을 쓴 채 남녀차별적 요소를 주입시키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또한 “내용, 언어, 형식, 색채, 기법 등 만화의 모든 요소가 낡은 성 정체성을 부추기고 있다”면서 “앞으로는 질적인 부분을 고려한 성교육만화가 많이 나올 수 있도록 만화계와 출판계가 함께 고민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비틀대던 출판계는 천만 권의 책을 찍은 후에야 비로소 바로 걸을 수 있는 것일까. 최근 출판계에서는 아동용 그리스로마신화 도서를 ‘참되게’ 만들겠다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 신화의 인문학적 향기를 온전히 전하는 ‘동화로 읽는 그리스로마신화’(파랑새 어린이)가 그 예. 또한 김영사도 3년 동안 노력해 만든 아동용 신화 서적을 곧 출간할 예정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여성종합신문 <우먼타임스>에서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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