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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0년 전통의 루이젠 브로이(Luisen-Bräu)에서.
ⓒ KOKI
루이젠 브로이(Luisen-Bräu). 프리드리히 3세의 아내 소피 샤를로테의 여름 별장으로 쓰였던 샤를로텐부르크 성 옆에 있는 루이젠 브로이는, 500년 전통의 맥주집이라 했다. 유럽에 와서 가장 좋은 것 중 하나가 맛있는 맥주를 아주 저렴한 가격에 마실 수 있다는 건데, 루이젠 브로이에서도 역시 기대가 컸다. 다른 것은 몰라도 특히 바이스 비어가 기대됐다.

독일 맥주는 만드는 원료와 방법에 따라 크게 '바이스 비어'와 '필스너 비어'로 나뉜다. 그 중 필스너 비어는 맥아와 옥수수, 홉, 이스트, 물을 주원료로 해서 만드는 맥주다. 우리가 흔히 마시는 OB나 카스, 하이트 등 국산 맥주는 대부분 필스너 비어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바이스 비어. 한국에서는 마셔보지 못한 바이스 비어를 유럽에 와 접하고는, 시쳇말로 왕창 꽂혀 버리고 말았다. 금빛 투명한 국산 맥주와는 달리 불투명한 살색이 감도는 바이스 비어는 밀을 섞어 만든다고 한다. 약간 걸쭉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달콤 구수한 향. 한 번 마셔보면 홀리지 않을 이가 없을 것만 같았다.

내부 분위기도 한국에서 온 우리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누구나 볼 수 있게 겉으로 드러나 있는 양조 시설과 소시지 창고를 둘러보면서 사진도 찍는 등 새로운 분위기의 맥주집에 한껏 취했다. 독일 특유의 소시지 안주와 세트로 나오는 12잔짜리 알싸한 맥주는 루이젠 브로이에서 직접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입은 바이스 비어로, 손은 고소한 소시지 안주로, 눈은 옆 테이블에서 쉬고 있던 여행객들에게 접사되는 동안 자연스럽게 오늘의 해프닝이 새 안주가 되고 있었다.

▲ 아름드리나무들로 울창한 하르츠 산맥을 거쳐 베를린으로!
ⓒ KOKI


베를린에 도착하다

통일 독일의 수도 베를린이다. 고슬라를 출발해 아름드리 나무들로 울창한 하르츠 산맥을 통과해 도착한 베를린. 역시 날씨는 북부 유럽의 겨울을 실감하게 했다. 어두침침, 우중충 그 자체였다.

▲ 베를린종합예술대학에서 미술 이론을 공부하고 있는 김종민씨(왼쪽).
ⓒ KOKI
너무 늦게 도착한 나머지 일단 시내 외곽 가토우 캠핑장에서 하룻밤을 자고 시내로 나왔다. 김종민(38)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샘 형의 친구이기도 한 종민 형은 조각을 전공하고 베를린종합예술대학에서 미술 이론을 공부하고 있었다.

원래 샘 형과는 서로 알게 된 지 오래되지 않았다. 하지만 샘 형의 친구와 아는 사이일 뿐만 아니라 둘 다 예술을 공부했다는 점에서 마음이 통했던 것일까? 우리가 베를린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일을 제쳐두고 달려 나왔던 것이다.

그는 우리가 베를린에서 지내는 며칠 동안 싫다는 소리 하나 없이 정말 성심 성의껏 함께 해주었다. 이것도 인연이겠지? 먼 타향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 이렇게 격의 없이 지낼 수 있다는 것처럼 유쾌한 일이 또 있을까.

▲ 김종민의 기숙사에서.
ⓒ KOKI
일단 우리가 짐을 푼 곳은 그의 기숙사. 우리와는 달리 독일은 도시마다 대학이 1개 정도 있는 것이 보통이지만, 유독 베를린만은 대학 수가 많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이 동과 서로 나뉠 때 베를린 역시 동서로 나눠졌는데, 이 때 대학들도 각각의 목적에 따라 설립됐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기숙사에는 대학 구분이 없었다. 종민 형이 살고 있는 기숙사도 형이 다니는 베를린종합예술대학생들만 지내는 것은 아니었다. 훔볼트대학이나 베를린자유대학 학생도 함께 거주하는 등 여러 나라에서 온, 여러 학교 학생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그래도 개인의 사생활을 중시하는 분위기 탓인지 식당이나 화장실을 제외하고는 원하면 1인실도 쓸 수 있었다. 종민 형도 텔레비전과 오디오, 책상만 달랑 갖춘 간소한 살림살이로 독일 생활을 하고 있었다.

기숙사는 시내 곳곳에 건물 형태로 분산돼 있고, 대학 구분 없이 한 기숙사에 여러 학생들이 생활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숙사 안에서는 취사도 가능해, 간단한 커피는 물론 밥도 해먹을 수도 있는 구조였다. 다만 청국장을 끓일 때는 조심할 필요가 있단다.

아무래도 주로 좁은 캠핑카 안에서 식사를 해 왔던 경험이 있던지라, 비록 며칠에 불과했지만 일반적인 식당에서 하는 식사는 정말로 편안했다. 물론 캠핑카에서의 식사도 나쁜 것은 아니지만, 매일 그렇게 생활하다 보면 바퀴 아래 생활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인터넷을 찾아 헤매다

▲ 피시방을 찾아 시내로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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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잔 데다 식사를 하고 나니 몸이 노곤해지면서 스르르 잠이 왔다. 하지만 몸을 누일 시간은 없었다.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이용해 한국으로 긴급히 보내야 할 자료가 있었던 것. 그 동안은 여행에 적응하느라 도통 인터넷에 접속할 수가 없었던 것도 이유지만, 도대체 피시방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종민 형의 안내로 피시방도 찾을 겸 구경도 할 겸 쪼(Zoo)역으로 나갔다. 쪼역 인근은 우리로 치자면 서울 명동과 같은 번화가인데, 거리를 밝히고 있는 조명이나 작고 아기자기한 간판들이 참 정겨웠다. 아마도 백열 전구의 은은한 느낌과 단정한 거리 모습은 유럽에서만 접할 수 있는 느낌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이럴 수가! 피시방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야 골목마다 하나씩, 심지어는 두 개 이상 있는 게 피시방이라지만, 한 나라의 수도라는 베를린에서는 거의 보이질 않았다. 그러고 보니 독일과 네덜란드의 여러 도시와 마을을 지나오면서 피시방을 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암스테르담을 제외하고는.

결국 종민 형이 자주 다니던 피시방으로 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노트북 연결은 물론 시디나 디스켓은 아예 넣을 수도 없게 막혀 있었다. 쿠폰을 통해 무인으로 운영되는 피시방이었기에 주인에게 사정을 이야기 하고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기다리고 있던 이들에게 다른 곳에서는 가능하냐고 물어봐도 잘 모르겠다는 대답뿐이었고, 마친 종민이 형의 후배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 때 독일 생활 경험이 많은 종민 형의 한 마디.

"아랍 애들이 하는 데로 가 보자."

▲ 시내인 데도 불구하고 피시방을 찾기가 그리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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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민 형에 따르면, 아랍에서 온 사람들의 경우 유럽에서 살아가는 방식이 우리와 그나마 비슷하다고 했다. 피시방 시스템도 우리와 비슷해 시디 연결도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골목을 여러 차례 돌아 찾아간 피시방. 점원은 시디를 넣을 수 있다고 했다.

그래, 시디는 들어갔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시디를 컴퓨터에 넣을 수는 있었지만 인식이 안 되는 거였다. 어? 도대체 왜 이러지? 고장이라도 난 거야? 이건 우릴 두 번 죽이는 일인데….

문제는 시디에 저장한 파일의 이름을 한글로 쓴 데 있었다. 별 생각 없이 사진과 문서 이름을 한글로 했는데, 컴퓨터가 시디는 인식을 하면서도 '자료가 들어 있다'는 것은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사이트에 가서 한글IME(윈도우용 프로그램에서 영문이나 한글, 한자, 특수 문자 등을 입력할 수 있게 하는 공개 소프트웨어)를 다운 받아봤자 별 효과가 없었다. 분명 시디에 자료가 담겨 있었는데도 말이다.

별 수 없었다. 다시 종민 형 방으로 돌아가 파일의 이름을 영어로 고친 후 다시 시디를 구워오는 수밖에. 결국은 저렴하지도 않은 버스를 타고 기숙사로 돌아가 다시 시디를 구워와 간신히 자료를 보낼 수 있었다.

도대체 한국에서라면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을 겪게 되니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황당함 못지않게 의아한 생각도 들었다. 유럽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봤을 때도 선진국 대열에 당당하게 끼는 독일의 인터넷 환경이 이렇게 안 좋을까 하는.

편견을 버려!

▲ 인터넷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그다지 커 보이지 않았다. 베를린 지하철에서 만난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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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의 유럽 국가들이 국가 차원에서 인터넷의 가능성에 눈을 뜨고 많은 투자를 하고 있고 젊은이들 역시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다. 인터넷에 아예 관심이 없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베를린으로 오다가 들른 고슬라에서 만났던 카타지나 칼리노프스키만 해도 그렇다. 그는 우리식으로 생각하자면 이미 인터넷 도사가 되어 있어야 할 20대 초반의 대학생. 그러나 그녀는 예상을 뒤엎고(?) 우리라면 서너 개씩 갖고 있는 이메일 주소를 하나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이메일 주소는 하나쯤 가졌으리라 생각했던 것은 편견이었을까? 실제로 나중에 연락하자며 이메일 주소를 묻던 샘 형에게 '난 그게 없다'고 했던 카타지나. 그 말을 듣자마자 깜짝 놀란 샘 형이 바에 있던 컴퓨터로 이메일 주소를 만들어줬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건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이메일 주소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인터넷 접속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그저 가끔 인터넷에 접속해 이메일이나 확인하는 정도라고.

실제로 서로 연락할 일이 있으면 주로 전화로 하고, 서류 같은 것을 전달할 필요가 있으면 팩스나 택배를 이용한다고 한다. 인터넷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그다지 커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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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민 형에 따르면 이들은 학교에서 인터넷 교육을 받기는 하지만, 굳이 인터넷을 이용하지 않아도 생활하는 데 별 불편한 것이 없다고 한다. 그래도 종민 형은 이메일 계정을 갖고 있었지만, 이마저도 한국에 있는 사람들이나 한국 유학생들과 연락을 하는 데 이용한다고.

가족들과 직접 쇼핑을 하는 것도 삶의 낙이기에 굳이 인터넷 쇼핑을 할 필요가 없고, 우리처럼 쇼핑을 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부족한 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게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밤을 새워 가며 ‘스타 크래프트’ 등 오락을 하는 이도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물론 10분에 우리 돈으로 1000원이 넘는 등 인터넷 접속료가 비싼 것이 한 이유라고 하더라도, 인터넷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 KOKI
그러고 보면 이곳 젊은이들은 사는 재미가 있을까 싶을 정도다. 유학생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유학생들이야 시간이 나면 인터넷으로 영화도 보고 한단다. 그러나 이곳 독일 젊은이들은 ‘놀러 간다’고 하면 그저 카페나 바, 클럽 정도에나 가는 것이라고 한다. 휴가나 방학이라면 다른 유럽 국가 등으로 여행을 떠날까마는.

인터넷은 물론 한국이라면 클럽만 해도 나이트 등 '유사' 클럽들이 많아 일단 집밖으로만 나가면 놀고 마실 데가 천지인데, 여기는 그럴 데가 없다. 이곳에 와서는 웬만한 번화가가 아니면 그저 조용해 보이는 바나 레스토랑 정도나 볼 수 있었지, 휘황찬란한 간판을 내다 건 상점도 백화점이나 섹스숍 등 특정 업종을 제외하면 보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 독일을 두고 그저 인터넷 후진국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굳이 인터넷을 통하지 않고서도 삶의 질을 확보할 수 있는 이들의 여유라고 해야 할까. 아니, 바라는 것이 많은 걸 보니 내가 바로 인터넷 중독자인가?

덧붙이는 글 | 1. 더 많은 사진은 (클릭!) www.finlandian.com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2. 'KOKI'는 권기봉, 박해얼, 샘, 최승희가 함께 하는 여행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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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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