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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채를 얇게, 종이보다 약간 두껍게 썰어야 합니다.
무채를 얇게, 종이보다 약간 두껍게 썰어야 합니다. ⓒ 김규환

설을 쇠고 난 뒤끝은 개운치가 않다. 군대 갔다가 휴가 나온 장병이 갑자기 고단백 음식을 먹다보면 설사로 이어지듯 명절 때 꾸역꾸역 고기에 기름진 전을 욕심부려 먹으면 잘해야 본전, 아니면 며칠간 뒷간 신세 면키 힘들게 된다. 하지만 그게 뜻대로 되던가.

간혹 소금 덩어리 한 줌 먹어서 속을 달래보기도 하지만 쉬 가라앉을 리 없다. 그렇다고 양반이나 집안 어른도 아닌 터에 혼자만 된장국이나 김칫국을 따로 끓여 달랄 수도 없다. 늘 기다려지는 게 명절이었지만 마무리는 어딘가 다시 갔다와야 하는 것처럼 서운하고 께름직한 게 사실이다.

그뿐이던가. 며칠이고 남은 음식 먹어 치우느라 물리고, 매 끼니 그 나물에 그 반찬이니 질리고 만다. 이골이 날 지경에 이른다. 안 그래도 푸성귀도 묵은 것뿐이니 비타민과 무기질 필요량은 절대 빈곤 상태에 처하고 만다.

이때 찾기 시작하는 것이 꼬들꼬들 말라 비틀어져 가는 콩떡, 인절미, 가래떡인데 불에 구워 조청이나 찍어 먹는 게 우리집 분위기였지만 그래도 쉬어빠져가는 김치에 먹는 밥인지라 입맛을 되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실고추와 홍고추, 당근 썰어 넣고 실고추 조금 넣고...
실고추와 홍고추, 당근 썰어 넣고 실고추 조금 넣고... ⓒ 김규환

그런데 보름이 코밑으로 다가왔다. 어머니는 봄부터 가을까지 말려둔 호박고지, 무말랭이, 취나물, 토란대와 토란잎, 고사리, 아주까리를 꺼내와 물에 불려서 묵은 나물 반찬을 만드신다. 평소에 먹어봐야 별 맛 나지 않던 세어빠진 이런 하찮은 나물의 대변신이 시작된다.

한줌밖에 안되던 것이 찬물에 담가놓아도 한 움큼이나 되어서는 마음까지 풍족하게 한다. 고사리, 취나물이 불어나면 조선간장 치고 들기름 참기름 섞어 들들 볶아 올리면 씹히는 맛과 향이 최고다.

무는 두껍게 채를 썰고, 토란대는 오래 우려 독을 빼고 일정하게 썰어두고, 불린 호박고지도 들깨국물과 쌀뜨물을 진하게 섞어 멸치 국물에 되직하게 들들 볶아 끓여주면 감칠 맛 입안을 감쌌다.

준비된 재료
준비된 재료 ⓒ 김규환

무나물은 보드랍고 토란대는 물컹물컹하면서도 씹히는 느낌이 일품이며 입에 닿는 순간 첫 키스를 한 듯한 착각에 빠지는 호박고지는 들깨 간 물과 어울려 풋풋한 향을 선사한다.

여기에 눈밭에 남아 있던 배추-봄동을 뽑아와 살짝 데쳐서 참기름 넣고 숙지나물을 만들어 달보드레한 봄을 부르고는 무를 얇실하고 납작하게 깍두기를 썰어 고춧가루와 동태 대가리를 쪼아 시원하고 알싸하게 담가 새 김치 맛을 보게 한다.

또한 불려서 널찍하게 펴면 손바닥 두 개를 합쳐도 모자랄 토란잎과 아주까리 피마자 잎을 조선간장으로 간하여 오랜 동안 삶아내면 양념 간장에 찰밥을 싸서 잘근잘근 씹어 먹으면 섬유질 잘게 부서지며 짭쪼름한 맛과 고소하면서 약간은 아린 쫄깃한 쌈밥이 된다.

파릇파릇한 시금치와 냉이를 무쳐 올려도 눈으로 먹으면 더욱 좋다.

김가루를 빻아 넣습니다.
김가루를 빻아 넣습니다. ⓒ 김규환

그렇다고 여기까지 음식이 다 차려지는 건 아니다. 오이냉국보다 더 맛있게 먹던 시큼하고 달짝지근한 김과 무로 만든 지국인데 부르기 편하게 '지국'이라 하자.

만들기도 간편하니 일단 무 뿌리를 하나 준비하자. 무 껍질을 칼로 득득 긁어 벗기고는 채를 생선횟집에 가면 나오는 붉게 물들인 생강 굵기로 얇게 썬다. 썰어 놓으면 종잇장처럼 가늘어 무가 투명해질 지경으로 훤히 들여다보여야 한다.

1차로 썰린 무를 계단지게 바짝 붙여서는 손톱이 썰리지 않게 조심하여 바짝 붙여 썰어 나간다. 생강 채처럼 가늘어진 무채를 널찍한 그릇에 담고 조선간장을 휘휘 둘러 뿌려주고 실고추 약간, 통 참깨, 마늘 네 쪽, 생강 약간을 넣어 기본 양념한다.

다음으로 생수를 붓고 김 세 장을 타지 않게 프라이팬 위에 살짝 구워 손으로 잘게 비벼서 넣고 식초를 넣어 휘젓는다. 이어 쪽파 서너 개 송송 썰어 넣고 마지막으로 참기름을 큰 한 숟가락 더한다.

마지막으로 여기에 태양초 고춧가루를 넣고 맛을 봐가며 소금으로 간을 맞추면 되는 간단한 방법이다. 단맛을 조금 더하려면 백설탕 반 스푼을 넣으면 끝난다. 칼로 채만 썰 줄 알면 되기에 나는 언제나 이때 꼭 한번은 해먹고 만다.


내가 지국이라 부르는 완성된 작품
내가 지국이라 부르는 완성된 작품 ⓒ 김규환

아무리 잘한 찰밥-오곡밥이라 할지라도 차진 맛은 잠시 뿐이고 이내 끈적끈적하여 먹기도 사나울 뿐만 아니라 곧 물리며 목이 마르게 되는데 이 '지국'이 상에 올려지면 부드럽게 쑥쑥 내려간다. 식은 밥이든 따뜻한 밥이든 걸리지 않고 넘어가게 하는 마술을 지닌 국물이다.

이 '지국'은 시큼하며 달고 부드럽게 씹히고 해초의 쌉싸름한 향취가 떠오르고 눈밭 생명력 강한 쪽파가 나른한 초봄을 부른다. 참깨와 참기름의 고소함이 씹히면 "호로록" "후루룩" 절로 넘어가 큰 양푼에 담긴 '지국' 금세 바닥이 나면 얼른 정지 설강으로 달려가야 하니 얼마나 맛있었겠는가.

어제 난 대보름을 맞아 어머니께 어깨 너머로 배운 실력을 맘껏 발휘했다. 푸짐하게 해뒀다가 차가운 한 데에 놓아두고 설컹설컹 언 살얼음과 같이 먹으면 입맛도 찾고 정신도 바짝 들기에 안성맞춤이다. 이래저래 묵은 나물과 지국 놓고 지낸 정월대보름은 늘 기다려진다.

고사리
고사리 ⓒ 김규환

시금치 나물
시금치 나물 ⓒ 김규환

찰밥이나 오곡밥이나 같은 종류로 봅시다. 우린 오곡보다 찹쌀에 두 종류의 팥만 넣어 만들었습니다.
찰밥이나 오곡밥이나 같은 종류로 봅시다. 우린 오곡보다 찹쌀에 두 종류의 팥만 넣어 만들었습니다. ⓒ 김규환

오곡밥에 취나물이든 아주까리든 토란잎이든 널찍한 잎을 싸서 먹어보시면 쌈의 진수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오곡밥에 취나물이든 아주까리든 토란잎이든 널찍한 잎을 싸서 먹어보시면 쌈의 진수를 느낄 수 있습니다. ⓒ 김규환

호박고지나물은 들깨가루가 아니라 들깨국물로 해야 맛이나는데 아내가 미리 실수로 한듯 합니다. 지방에 가기 전 호박고지 좀 사다달라했더니 미리 혼자서 하다보니 그렇게 된 겁니다.
호박고지나물은 들깨가루가 아니라 들깨국물로 해야 맛이나는데 아내가 미리 실수로 한듯 합니다. 지방에 가기 전 호박고지 좀 사다달라했더니 미리 혼자서 하다보니 그렇게 된 겁니다. ⓒ 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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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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