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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외숙모로부터 전화를 받자마자 우리 부부는 대충 짐을 꾸렸습니다. 아이들을 대전에 사는 여동생 집에 데려다 놓고 급히 서울행 고속버스를 탔습니다. 아내는 손가락을 불안스럽게 꼼지락거리며 말없이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저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아내의 깊은 한숨소리를 듣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전화를 통해 아이들 외숙모가 축 처진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복수 검사를 하고 있는데 암이 확실한가봐요.”

아내에게는 언니가 한 명 있습니다. 그 처형이 담낭암 선고를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담낭은 쓸개라고도 하는데 담낭암은 다른 암에 비해 걸릴 확률이 그리 높지 않고 한번 걸리면 아주 절망적이라고 합니다.

얼마 전 설날, 처가에서 처형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처형은 배와 허리 통증을 호소하며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아무 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어쩌다 음식물을 넘겼다 싶으면 속이 쓰리다며 견딜 수 없어 했습니다.

경기도 구리시에 살고 있는 처형은 한동안 동네 병원 신세를 졌다고 합니다. 그곳 의사가 하는 말이 위가 좋지 않아서 그러니 걱정 말라고 하더랍니다. 그 의사 처방에 따라 위장약을 두 달 넘게 먹었다고 합니다. 암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말입니다.

우리 부부가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도착했을 때 처형은 두 개의 주사바늘을 꽂고 누워 있었습니다. 옆구리 쪽에서는 복수(腹水)를 뽑아내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주사바늘을 통해 영양분을 공급받고 있었습니다. 누렇게 뜬 얼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찾아갔을 때 처형은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처형을 끔찍하게 위하는 손위 동서는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만큼 슬픔과 불안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큰 처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열일 제쳐두고 달려와 복수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절망감을 누르고 복수 검사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있었습니다.

처형이 속해 있는 병실 환자들 모두가 암 환자들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알게된 처형에게 손위 동서는 병원 입원실이 부족해서 잠시 머물고 있을 뿐이라고 둘러댔다고 합니다.

처형의 침대 바로 옆에는 말기 암 환자 한 분이 끊임없이 호흡곤란을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앉아 있지도 누워 있지도 못하고 안절부절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습니다. 50대 초반 쯤으로 보이는 그 암 환자의 남편 역시 까칠하니 환자가 다 되어 있었습니다. 7개월째 병간호를 하고 있다는 그는 내내 웃는 얼굴이었지만 반쯤은 넋이 나간 듯 보였습니다.

처형은 가난한 살림을 살찌우기 위해 아주 지독하리 만큼 먹을 것 입을 것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철저하리만큼 냉정했습니다. 작은 우유팩 하나 허투루 버리지 않고 두고두고 사용할 정도입니다. 그렇게 알뜰하게 살아왔지만 남을 돕는데는 두손 두발 다 걷어붙이고 나서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단 한 방울의 물도 마시지 못한 채 물 먹인 거즈로 타들어 가는 입술을 축여가며 조직검사를 기다리고 있는 처형은 지쳐 보이는 얼굴로 말했습니다.

“여보, 인효 아빠 데리고 나가 맛있는 거 좀 사주지….”

처형의 권유에 못 이겨 밖으로 나온 손위 동서는 나를 붙들고 꾹꾹 눌러 참았던 아픔을 쏟아냈습니다.

“송 서방, 사는 게 너무 불공평하다. 왜 이런 착한 사람에게 몹쓸 것이 찾아와 먼저 가야 하는 거지. 인제 오십이여 오십, 아직도 살아갈 날이 창창한데….”

하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희망의 끈이 있었습니다. 처형의 배에는 여전히 복수가 차 오르고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있지만, 병원에서는 항암제 투여 이외에는 그 어떤 방법도 없다고 절망적으로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어떤 방법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그 어떤 방법을 찾아보고 있습니다. 그 희망조차 없다면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우리는 저마다 기도를 올렸습니다. 우리는 좋은 마음은 좋은 기운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처형에게로 모여지는 좋은 기운들은 악성 종양조차도 물리칠 수 있는 그 어떤 치유의 힘이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몇 년 전 나는 ‘죽음 아닌 죽음’ 앞에서 잠시 서성거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내게도 암에 대한 위협이 있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시골로 마악 이사올 무렵 오랜 세월 동안 징글맞게 달고 다녔던 축농증을 수술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전신 마취를 하려면 여기저기 X레이를 찍어 봐야 한다기에 가슴팍에도 X레이 사진기를 댔습니다.

헌데 X레이 결과 폐 쪽에 뭔가 아주 작은 혹 같은 것이 잡혔다는 것입니다. 담당 의사는 폐 쪽이니 폐암 덩어리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습니다. 20년 넘게 하루 담배를 한 갑 이상을 피워대면서도 전혀 관심 밖이었던 폐암에 대해 여기저기에서 자료를 긁어모았습니다. 폐암은 죽음과 한 통속이라고들 하더군요. 폐암 선고를 받으면 길어봤자 3년에서 5년 정도밖에 못 산다고 합니다.

의술로도 몇 년밖에 살지 못한다면 구태여 고통을 겪어가며 의술에 의지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한동안 병원을 멀리하고 매일같이 산에 올라 마음을 가다듬었습니다. 짐짓 도를 닦는 마음으로 죽음 앞에 당당하게 서 보았습니다. 죽음의 문 앞에는 당당하게 다가설 수 있었지만 죽음을 받아들여 문을 열고 들어서기는 결코 말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어머니, 아내, 자식들 그리고 형제들이 서럽게 울고 있었습니다. 내 자신을 비롯한 모두가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암일 가능성이 높다’는 그 말 한마디에 폭싹 주저앉아 나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한 생애를 다 살아버렸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1년여 동안 서울의 큰 병원을 다니면서 그 불안스럽게 자리잡고 있던 의혹의 덩어리를 밝혀 냈습니다. 그것은 적어도 내 폐를 작살내는 암 덩어리는 아니었습니다. 그 아주 작은 혹 덩어리는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전문의 말로는 나조차도 모르는 사이에 그 어떤 질병이 폐에 머물고 갔던 흔적일 가능성도 있다고 합니다.

뒤돌아보면 ‘안락한 아파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하루 하루를 행복이 아닌 고통을 이웃하고 살아가고 있을 때 나는 이미 그 병치레를 했던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당시 나는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혀오는 고통을 겪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고통은 시골로 이사와 의식주 전반을 바꿔 나가며 뱃속 편하게 '적게 벌어 적게 먹고'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또한 폐에서 발견된 자그마한 혹 역시 그 고통에서 벗어나면서 발견된 것이기에 더 이상 자라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단지 암일 가능성이 있다는 의사의 말 한마디에 천당과 지옥을 수없이 오갔던 나이지만,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처형의 고통은 상상하기조차 어렵습니다.

그 날 저녁 우리 부부는 처형과 한시라도 떨어져 있지 않으려는 손위동서를 병원에 두고 처형네 집에서 묵었습니다. 아내는 며칠 내내 비워 있던 집안 청소도 하고 묵은 냉장고를 뒤져 이것저것 반찬거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처형은 20평쯤 되는 3층 짜리 좁은 빌라에 살고 있었는데 앞뒤 건물에 둘러 쌓여 있어 햇빛이 거의 들지 않았습니다. 트인 곳에서 생활하고 있는 나로서는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한 공간이었습니다.

경제적인 가치로 비교한다면 우리 집은 처형네 집의 30분의 1도 안 되는 허름한 농가일 뿐이지만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볕이 따사로운 남향에 사방 팔방 숨통이 트여있습니다. 처형이 병원에서 나오게 되면 집부터 옮겨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일이 당장 어렵다면 당분간 우리 집에서 지내도록 하기로 했습니다.

처형은 지난 봄, 우리 집에 당일치기로 왔다가 일주일을 머물렀던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처형은 고혈압 약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그 약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약 없이는 한시라도 견디지 못했던 처형이었는데 약 없이도 일주일을 아주 기분 좋게 잘 지내고 갔습니다.

다음날 다시 병원에 갔을 때 처형이 누워있는 바로 옆 침대가 허전하게 비어 있었습니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던 옆 환자가 그 날 밤을 넘기지 못했다고 저 세상으로 떠난 환자의 남편이 쓴웃음으로 무겁게 입을 열었습니다.

“희망 없는 치료로 고통스럽게 몇 개월을 더 연장하느니 차라리 잘됐는지도 몰라요. 말기 선고를 받고 7개월 동안 고통만 안고 살았던 셈인데 이제는 고통 없는 세상으로 떠났으니까요.”

그날 처형의 몸 어느 부위에 얼마만큼의 암이 퍼져 있는지를 좀 더 확실하게 알아보기 위해 조직검사를 했습니다. 나는 조직검사를 받고 나와 잠이 든 처형과 아내를 병원에 남겨두고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고속버스를 탔습니다. 버스 안에서 자꾸만 처형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병원에서 눌러 참았던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처형을 위해 기도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처형이 암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나는 그 기도 속에서 처형과 연관된 많은 사람들을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처형은 유난히 우리 집 아이들을 좋아했습니다. 특히 작은아이 인상이의 몸짓이며 말투 하나하나에 자지러지게 웃곤 했습니다. 어쩌면 그런 다정다감한 처형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아이들이 알게 되면 얼마나 슬퍼할까라는 생각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아내와 장모님…. 처형과 연관된 주변 사람들 모두가 불쌍했습니다. 차창이 뿌옇게 흐려집니다. 자꾸만 눈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처형을 위해 기도를 한다고 해 놓고 나는 문득 주변 사람들에 대한 연민에 빠져 있는 나를 보았습니다. 나는 처형을 통해 살아온 내 시간들을 되돌아보고 있었고 내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습니다. 처형의 아픔을 위해 기도하겠다는 인간이 주변 사람들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 자신을 위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처형을 위한 기도가 아닌 내 주변 사람들이나 내 고통을 비우기 위한 욕심 가득한 기도였습니다.

여동생 집에서 머물고 있던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 다음 날 아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언제나 당차기만 했던 목소리가 힘이 쪽 빠져 있었습니다.

“처음 진단한 대로 담낭암 4기래….”

처가 식구들은 고민 끝에 암이라는 사실을 처형에게 알려줬다고 합니다. 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처형이 아내에게 그러더랍니다.

“그동안 하느님에게 너무 죄송스럽고 부끄러운 기도만 올렸던 것 같아, 늘 뭔가를 해 달라고 매달려 애원하기만 한 것 같다.”

나는 처형의 뉘우침에서 그 어떤 희망보다도 큰 희망을 읽었습니다. 희망은 욕망과 집착의 끈을 놓고 내 자신을 온전하게 비울 때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욕망이나 집착이 가득한 마음 속에는 희망이 끼어들 틈이 별로 없을 것이니까요. 처형을 위한 나와 주변 사람들의 기도 역시 그렇게 온전히 비운 상태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담낭암을 극복할 수 있는 도움 말씀 남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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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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