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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여행을 떠나는 걸까?
ⓒ KOKI
여행은 사람을 참 설레게 한다. 그것이 단 하루의 여행이든 아니면 몇 달이 걸리는 여행이든 설렘의 크기는 별반 다르지 않다. 어릴 때는 정작 봄소풍 떠날 날은 꽤 남았는데도 며칠 전부터 새로 산 운동화를 꼭 껴안고 밤잠을 설치던 기억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번 여행 중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떠나온 것일까? 꼭 이렇게 멀리 떠나야만 했던 걸까?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해도 한국에서 한 고민에서 벗어난 것은 아닌데 말이야. 도대체 무슨 매력이 있길래 일견 두려움을 안고서라도 길을 나서는 걸까?

▲ '북쪽의 보물'이라 불렸을 정도로 매혹적인 도시, 고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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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 온 지 한 주가 지났다. 한국에서는 보지 못하던 신기한 건물과 정겨운 간판들, 소박하지만 흥겨운 축제, 시원한 맥주와 저렴하지만 달콤한 와인으로 정신이 없었다.

새빨간 우체통의 낭만에 취하고 친절한 교통 표지판을 보고 웃을 수 있었다. 이래저래 시간 가는 줄 몰랐던 날들.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기쁨이 컸던 탓일까? 아직 피로감은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유럽에서 보낸 첫 일주일을 정리하고 또 다른 일주일을 계획하기 위해 한번쯤 쉬었다 갈 필요가 있었다.

브레멘에서 '동화가도'를 따라 곧장 남쪽으로 달려 도착한 오후 5시 20분의 어둑한 고슬라. 하르츠 산지 기슭에 위치한 고슬라는 11~12세기에는 하인리히 3세를 비롯한 신성로마제국의 여러 황제들이 근 300년 동안 임지로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한자동맹의 일원으로서 '북쪽의 보물'이라 불렸을 정도로 매혹적인 도시다.

그런데 도시라고는 하지만 한국 도시와는 개념이 사뭇 다른 듯한 고슬라. 실제로 도시는 옛모습을 대부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을 정도다. 시내 곳곳은 아직도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 12~13세기의 성당과 14세기의 길드 홀(상인단체의 집합소) 같은 역사적인 건축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또 시내에 남아 있는 목재 골격의 가옥들만 해도 1800채가 넘는데 그 수가 독일에서 최대란다.

번쩍번쩍 현란한 간판이나 높이 솟은 마천루는 보이지 않고 아무리 높아 봤자 성당 높이보다 낮은 시내 한복판의 풍경. 자동차의 저돌적인 질주는 보이지 않고 사람들의 발걸음에서는 여유가 묻어나오는 듯했다. 아무래도 고슬라에서 쉬기로 한 것은 잘했다.

▲ 거의 대부분 끼니를 캠핑카 안에서 해결하느라 많이 피곤했던 우리. 오랜만에 레스토랑에서 멋진 저녁을 하자는 데 '의기투합'!
ⓒ KOKI
이왕 쉬기로 한 것 마음만 쉬지 말고 손도 좀 쉴 필요가 있었다. 그동안 끼니를 거의 캠핑카에서 해결하느라 많이 피곤한 우리. 오랜만에 레스토랑에 들어가 멋진 저녁 한 끼를 하자는 데 의기투합해 일단 한적한 골목에 차를 세워두고 황제 광장을 지나 15세기 당시의 건물이라는 고슬라 시청사 쪽으로 걸었다.

왜 시청사냐고? 그 어느 나라보다 종교개혁의 열풍이 강했기 때문인지 다른 유럽 나라들과는 달리 독일 도시들의 중심은 성당이 아니라 시청이다. 시청 근처에 가면 근사한 저녁을 먹을 만한 식당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과수원에 들어갔다고 해서 가장 맛있는 사과를 찾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지 않은가. 번화가의 중심에 위치한 시청. 사방에 보이는 것이 레스토랑과 바였지만 문제는 어느 가게에 들어가야 특색 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지 아는 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아무 데나 들어갈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종일 운전을 하느라 배가 고팠을 해얼이 형은 '여행자의 바이블'이라는 론니 플래닛을 충실히 따르자고 했지만 "바이블도 바이블이지만 종교의 시대(?)는 지났다"며 틈을 주지 않고 샘 형이 제동을 걸었다.

이미 수 차례 유럽 여행을 한 경험이 있는 샘 형은 "론니 플래닛에서 제시하는 것 말고도 맛있는 집은 얼마나 더 있다"며 다른 데를 알아보자고 했다. 이제는 누군가가 제시해 주는 정답이 있는 여행은 피해보자는 이야기였다.

▲ 도대체 어느 집이 맛있는 거지? 여기저기 물어봐도 답은 사람마다 제각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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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샘 형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리 기웃 저리 기웃 레스토랑 밖에서 창문을 통해 분위기(?)를 살피는 우리 일행. 도대체 마음 놓고 올인할 레스토랑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나야 마음 같아서는 아무 데나 들어가서 대충 한 끼를 해결하고 싶지만 우리 일행의 일급 요리사이자 미식가인 샘 형에게 '아무 데'나 들어가 '대충 한끼 때운다는 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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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지나를 따라 나서다

그 때였다. 저쪽에 있던 해얼이 형이 손짓을 해 가보니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이른바 '삐끼'와 함께. 이리저리 무슨 식당이 있는지 알아보던 해얼이 형이 레스토랑 전단지를 돌리고 있던 카타지나 칼리노프스키라는 친구를 만난 것이었다.

원래는 어느 식당이 맛있는지 물어보려고 했던 것인데 알고 보니 레스토랑 전단을 돌리고 있던 친구였단다. 하지만 그것도 인연. 맛도 최고요, 서비스도 최고라는 말에 이미 해얼이 형은 카타지나를 따라 나설 참이었다. 뭐 이렇게 헤매기만 하다가는 제 시간에 저녁을 먹기가 힘들 것 같았다. 샘 형도 결국 카타지나를 따라가기로 결정했다.

▲ 카타지나가 안내한 헥센자우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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헥센자우버(Hexenzauber)라는 레스토랑으로 조용하지만 은은한 조명이 멋진 곳이었다. 저녁 식사를 즐기는 이들이 간간이 보였다. 그런데 카타지나를 따라온 것이 잘한 일일까? 일단 그의 추천으로 감자와 베이컨으로 만든 음식을 시켰다.

여행에 나서게 되면 낯선 환경은 물론이요, 새로운 사람들을 여럿 만나게 된다. 다만 지금처럼 일행이 있는 경우에는 새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일단 집을 떠나오게 되면 그것이 혼자이든 대여섯의 일행이 있든 숙명적으로 낯선 사람들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해서 일단 낯선 이에게 다가서기 전에 의심을 해보게 된다. 저 사람은 내게 해가 될까? 아니면 득이 될까? 평상시에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을 싫어했던, 아니 경멸했던 적이 있다.

"기봉아, 저 사람 알아두면 앞으로 도움이 많이 될 꺼야."
"기봉아, 인사 드려라. ○○그룹에 있는 선배야. 앞으로 잘 보여야 해."


정말 싫었다. 홍길동은 형을 형이라 아우를 아우라 부르지 못해 고뇌했다지만 이건 아예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 아닌가. 인간 그 자체로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득이 되는지 혹은 실이 되는지가 판단 기준이 된다는 이야기였다. 싫었다.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지금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가?

카타지나라는 예전에는 전혀 알지 못한 대륙 반대편의 사람을 아무런 의심 없이 따라간다? 일행이 있긴 했지만 이곳은 이역만리, 게다가 네오 나치로 몸살을 앓는다는 독일 아니던가.

혹시 독일어를 모르는 여행자들을 대상으로 '전문적으로' 장사하는 곳으로 데려온 것 아냐? 이미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다소 안심이 되기는 했지만 괜히 서양 식당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을 데려다 놓고 바가지라도 씌우는 것은 아닌지 걱정 아닌 걱정이 되었다. 아니 그런 거 다 제쳐 두고 혹시 이 친구 어디 불량 패거리 소속 아냐?

▲ 드디어 음식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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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이 나왔다. 음식을 시키기 전에 카타지나가 열심히 설명해주던 감자와 베이컨으로 만든 요리다. 이곳 사람들의 주식인 감자를 맛깔스럽게 개발한 것이라고 하는데 일단 겉모습은 구미를 당겼다.

음식은 사람들의 얼었던 마음을 녹이기에 충분했던 것일까? 음식을 먹으며 맥주도 한잔. 자리는 점점 무르익어 갔다. 카타지나도 비슷한 또래여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대화의 한 주체가 되었고 서로 쉴 새를 주지 않는 이야기들을 풀어내느라 음식보다는 서로에게 더 눈길이 갔다.

올해 20세. 부모를 따라 폴란드에 갔다가 7년 전인 13살 때 다시 독일 고슬라로 돌아왔다는 카타지나 칼리노프스키. 인도 여행을 하고 싶다는 카타지나 역시 이런저런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나와 다를 바 없는 젊은이였다.

시간은 이미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아직 고슬라 구경을 못해서 그러는데 혹시 고슬라를 소개시켜 줄 수 있겠느냐"는 부탁에 카타지나는 흔쾌히 "오케이"했다. 게다가 근처에 친구가 있다며 합석해 더 이야기하자고 제안하는 카타지나. 우리가 독일 중부에서는 보기 드문 동양인이었기에 신기했던 것도 있었을 테고 캠핑카를 타고 두 달 정도 여행을 한다니 그 이야기를 듣고 싶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찌됐든 카타지나는 종전의 독일인에 대해 가졌던 편견은 말 그대로 편견이었음을 조금씩 느끼게 해주었다. 방금 전에 가졌던 의심을 비웃기라도 하듯 친절하고 또 유쾌한 친구였다.

▲ 카타지나, 의심해서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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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카타지나에 대한 의심은 인간적인 미안함, 나 자신에게 돌이킬 수 없는 미안함으로 변해갔다. 만난 지 한참이 될 때까지 의심의 끈을 놓지 못한 편협한 나. 평소에는 그처럼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행태'에 분노했지만 정작 나 자신이 그런 행동을 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리고 무엇이 그리 안도감을 주었는지 금세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어 들이고. 지금 생각하면 피식 웃음이 나오는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을 일이라지만 당시에는 무척이나 진지했을 자신을 돌이켜보면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개진다. 이 한 없이 어린 인간에 대해. 나라는 존재의 크기에 대해.

여행, 나를 다듬어가는 과정

▲ 주마간산이든, 비조간산이든 중요한 것은 기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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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는 그랬다. 한달 여행한다고 해서 유럽을 다 알 수 있겠느냐고. 두 달 여행한다고 해서 두 배로 알 수 있겠느냐고. 지난 99년 여행 당시에는 그런 질문에 적잖이 고민했다. 벌이도 시원찮은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들여 떠나는 여행이었으니 두말 할 나위가 없었고 여행을 갔다 오면 무언가를 얻어와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였을까? 내 안의 욕심은 한달보다는 두 달을 원하고 있었고 두 달보다는 세 달이 나을 것 같았다.

이와 관련해 결정적인 한 마디가 바로 주마간산! 보통 여행하는 이들을 두고 '주마간산 한다'고들 한다. 특히 유럽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한달 혹은 두 달 정도의 여행을 계획하기 마련인데 이에 대해서도 예외 없이 주마간산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래, 그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도 99년 당시에는 항변하고픈 마음도 있었다. 당신이 내가 한 여행에 대해 잘 아느냐고, 여행도 알고 보면 생고생을 하는 건데 그걸 그렇게 폄하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알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주마간산이냐 아니냐가 아니었다.

달리는 말 위에서 산천을 구경해도 좋다. 아니 아예 비조간산(飛鳥看山), 날아가는 새를 타고 가며 구경해도 좋다. 정작 중요한 것은 달리는 말 등에 앉았든, 나는 새를 타고 있든 머리는 항상 깨워두고 마음은 열어 두어야 한다는 사실. 중요한 것은 여행 기간의 길고 짧음이 아니었다.

어쩌면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당연한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과거를 돌이켜 보면 그렇지 않다. 그동안 한국에서든 외국에서든 여행을 할 때에는 언제나 '혹시 당할지 모른다'는 의심과 '무엇을 배우고 돌아와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언제나 긴장으로 온 몸은 경직되어 있었고 동시에 나 자신은 혹사당하고 있었다.

여행. 도대체 왜 떠나는 건데? 여행이 오히려 걱정거리를 늘린다면 여행을 와서도 여행을 떠나기 전 고민을 안고 있다면 무슨 소용이지? 카타지나를 만난 이후 내 심경의 변화를 보면서 느끼건대 여행의 매력은 아마도 자신을 다듬어 가는 기회를 마련해 준다는 점에 있지 않나 싶다.

아직 떨쳐버리지 못한 미혹들이 부지기수지만 여행을 하면서 하나 둘 알아나갈 수 있지 않을까. 카타지나와 같은 새로운 만남, 새로운 환경에 나를 던짐으로써 나 자신을 계속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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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1.  더 많은 사진은 www.finlandian.com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2. 'KOKI'는 권기봉, 박해얼, 샘, 최승희가 함께 하는 여행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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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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